소망이 있는 그리스도인
(살전 4:13-18)
(살전 4:13) “형제들아 자는 자들에 관하여는 너희가 알지 못함을 우리가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는 소망 없는 다른 이와 같이 슬퍼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살전 4:14) “우리가 예수께서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심을 믿을진대 이와 같이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도 하나님이 그와 함께 데리고 오시리라” (살전 4:15) “우리가 주의 말씀으로 너희에게 이것을 말하노니 주께서 강림하실 때까지 우리 살아 남아 있는 자도 자는 자보다 결코 앞서지 못하리라” (살전 4:16)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 소리로 친히 하늘로부터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살전 4:17) “그 후에 우리 살아 남은 자들도 그들과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살전 4:18) “그러므로 이러한 말로 서로 위로하라”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에는 반드시 죄악과 죽음이 있다는 공통점과 더불어 그 어간에 사람들은 나름대로 종교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종교만이 죄와 죽음의 문제를 놓고 고뇌하는 인간에게 어떤 해답을 줄 수 있다는 기대감 때문입니다.
우리가 기독교를 믿는 이유도 그 때문이며 그 핵심 교리가 바로 부활입니다. 기독교의 부활은 어느 종교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구원의 교리일 뿐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고민하는 인생의 궁극적인 문제에 대해서 명쾌한 답을 주고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구원을 얻되 부활이라는 축복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 부활은 사람들이 소원하는 무병장수나 윤회나 영생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것으로, 죽어도 다시 살되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변화를 받아 영생을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고전 15:53) “이 썩을 것이 반드시 썩지 아니할 것을 입겠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으리로다”
여기서 ‘썩는다’는 말(fqartov")은 ‘썩어질, 파멸될’이라는 뜻이며, ‘입는다’라는 말(ejnduvw)은 ‘옷을 입히다’ 라는 뜻은 마치 군복을 입힘으로 군인이 되는 것처럼 하나님의 은총으로 말미암아 썩지 아니할 것과 죽지 아니할 것으로 변화되어지는 것을 뜻합니다.
그것은 예수께서 인간의 모습으로 오시고 십자가에 달려 처참하게 죽으시고, 장사한지 사흘 만에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마치 과일 나무가 맨 처음 열매를 맺어 주인에게 소망을 주듯이 예수를 믿는 자들에게 부활의 소망을 갖게 하는 첫 열매가 되었습니다.
(고전 15:20)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나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고전 15:23) “그러나 각각 자기 차례대로 되리니 먼저는 첫 열매인 그리스도요 다음에는 그가 강림하실 때에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요”
그것만이 아니라 부활하신 예수님이 사십 일 동안 제자들과 함께 하시다가 제자들이 보는데서 하늘나라로 가시면서 제자들이 주님과의 이별을 두려워하거나 슬퍼하거나 낙심하지 않도록 다시 오시마! 재림을 약속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도 예수님처럼 부활하여 예수님처럼 하늘나라에 가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에게는 부활과 연장선상에 있는 주님의 재림에 대한 궁극적인 소망을 갖게 되었습니다.
(행 1:11) “이르되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려지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하였느니라”
오늘 성경 말씀은 예수님의 부활과 승천을 목격한 사람들이 아직도 생존해 있는 시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데살로니가 성경과 동 시대에 기록된 고린도 전서 15장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고전 15:6) “그 후에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나니 그 중에 지금까지 대다수는 살아 있고 어떤 사람은 잠들었으며”
만일 오늘 우리들이 갈릴리 사람들 중에 하나였다면 어떠하였을까요? 아마도 자주자주 하늘을 쳐다보며 살아갈 것입니다. 혹시나 주님이 오늘오시지 않을까? 내일 오시면 좋겠다고 하면서 하늘을 쳐다보며 살아갈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예수님이 다시 오시마 약속하신 재림에 대한 해석이 문제였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 재림이 금방 이루어질 것처럼 과장 해석하는 극단론자들과 또 하나는 재림이 지체됨으로 말미암아 재림을 불신앙하는 회의론자들이 데살로니가 교회만이 아니라 현대 교회 안에서도 여전히 대립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는 부활의 연장 선상에 있는 예수님의 재림에 대해서 어떤 믿음으로 갖고 있습니까?
예수님이 다시 오실 것을 믿습니까? 그렇다면 예수님의 재림은 언제 이루어질 것이며, 왜 재림이 아직까지도 이루어지지 않고 있으며, 예수님의 재림을 믿는 사람은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해서 오늘 성경 말씀을 통해서 그 답을 찾고자 합니다.
1.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의 긍정적인 믿음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십자가와 부활만 예언하신 것이 아니라 승천에 대해서도 예언을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떠나 하늘나라로 가시는 이유는 제자들을 세상에 버려두는 것이 아니라 제자들이 장차 가야 할 하늘나라를 준비하기 위함이라고 하였습니다.
(요 14:1)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요 14:2)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요 14:3)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물론 예수님의 제자들의 반응은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것을 잘 이해하지 못하고 동문서답을 하였습니다.
(요 14:5) “도마가 이르되 주여 주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사옵나이까”
정작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셨지만 부활하신 예수님을 눈으로 보면서도 믿지 못하고 의심하게 된 것입니다.
(마 28:17) “예수를 뵈옵고 경배하나 아직도 의심하는 사람들이 있더라”
그렇다면 제자들이 예수님의 승천이나 재림의 약속에 대해서 얼마나 잘 이해하고 믿었을까요?
예수께서 그 같은 제자들에게 부활의 확신을 갖게 하기 위하여 사십일 동안을 세상에서 지체하셨습니다.
그로 말미암아 처음에는 예수님의 부활을 의심했던 제자들이 다 예수님의 부활을 확신하게 되었을 때 예수님은 열두 제자만이 아니라 일시에 오백 여명이 보는 앞에서 하늘나라로 올라가셨기 때문에 승천을 의심하는 사람들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승천에 대한 소망을 가져다준다면, 예수님의 승천은 재림에 대한 소망을 가져다줍니다.
예수님의 승천을 목격한 제자들은 예루살렘을 떠나지 않고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며 예루살렘을 떠나지 않았고, 약속하신 성령을 충만히 받은 후에도 이전과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과 승천과 재림을 사람들에게 담대히 증거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그 중에 일부분이 아니라 마치 패키지처럼 부활 승천 재림까지를 다 믿는 것을 뜻합니다. 이는 오늘 우리들의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믿는 기독교는 십자가와 부활과 승천과 재림을 이해하기 쉽게 하기 위해 이론적으로는 나누어 설명을 하는 것이지, 실제적으로는 불가분리의 관계에 있기 때문에 믿으면 다 믿는 것이고, 안 믿으면 다 안 믿는 것이지 그 중에 일부만 믿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의 믿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사도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에게 오늘 성경 말씀을 기록해 보낸 이유가 그 때문입니다.
바울 사도는 데살로니가 전서를 시작하면서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을 칭찬하는 가운데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소망의 인내’라는 항상 있어야 할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가 항상 있는 교회라고 칭찬하였습니다.
(살전 1:3) “너희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를 우리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끊임없이 기억함이니”
그 중에 ‘소망의 인내’라는 말씀 가운데 ‘소망’이 바로 다시 오시마 약속하신 예수님의 재림에 대한 소망을 뜻하는 것이었습니다.
(살전 1:10)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그의 아들이 하늘로부터 강림하실 것을 너희가 어떻게 기다리는지를 말하니 이는 장래의 노하심에서 우리를 건지시는 예수시니라”
여기서 ‘기다리는지’ 라는 말(ajnamevnw)은 인내와 신뢰를 가지고 간절히 고대하고 있는 모습으로 믿음이 과거라면, 사랑은 현재이고, 소망은 미래를 뜻하는 것으로 균형 잡힌 신앙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데살로니가 교회 안에 균형이 아니라 어느 한 편에 치우쳐 호기심을 유발하게 하는 이단들의 사상이 침투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것이 이단들이 예수님의 재림이 임박했다고 확대해석하여 교인들로 하여금 그릇된 열심에 빠지게 유혹하는 자들입니다.
2.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의 부정적인 믿음
불은 추위를 녹여주고 더러운 것들을 불태워 정화시켜주고 굳은 것들은 녹여 새롭게 만들어 주는 긍정적인 요소가 있기 때문에 인간이 살아가는데 있어서 불은 절대로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다가 아닙니다. 불을 잘못 다스리게 되면 수십년 된 삼림을 초토화시키고, 가옥을 전소시키고, 화상을 입히기도 하고, 심지어 사망에 이르게도 하는 부정적인 요소도 가지고 있습니다.
물론 우리가 믿는 기독교 신앙은 반드시 불과 같은 열정을 동반합니다.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성령의 역사는 뜨겁습니다.
그래서 믿음을 갖게 되면 마음이 뜨거워지게 되고 열심히 믿게 되고 열정을 다해 헌신하게 되고 마치 용광로에 제련된 쇠처럼 사람을 새롭게 변화시키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다가 아닙니다. 전통 교회를 잘 다니던 사람이 이단에 넘어가는 경우 공통점은 다른 사람보다 열심히 있는 사람들이 대부분입니다. 이단들은 바로 그 불같은 열심을 유혹의 미끼로 삼는 것입니다.
그들은 전통교회를 다니는 사람들의 신앙은 차지도 덥지도 않고 미적지근하다고 말합니다. 이왕 믿으려면 뜨겁게 믿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런 말에 현혹되어 이단이 시키는 대로 만사를 제쳐 놓고 열심히 다니고 열심히 배우고 열심히 시키는대로 하였을 때 점점 더 그 영혼은 성경의 본질을 벗어나 잘못된 신앙에 빠지게 됩니다.
오늘 성경에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 가운데도 ‘예수님이 다시 오시마 하셨으니 우리 대에 예수님의 재림을 맞이하자’는 기대감에 부풀어 있었습니다. 별로 잘못된 것이 없어 보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다시 오실 주님을 맞이해야 할 준비를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일상적인 생활은 헛된 것이니 주님 맞을 준비에 총력을 기울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치 일상적인 가정이나 직장이나 교회 생활은 마치 주님을 맞이하는 일에 방해가 된다는 착각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육신의 일을 헛된 것이니 중단해야 한다면서 일하기를 거부합니다.
사도 바울은 그러한 잘못된 사상에 빠져 있는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에게 오늘 성경에서 이렇게 명령하였습니다.
(살전 4:11) “또 너희에게 명한 것 같이 조용히 자기 일을 하고 너희 손으로 일하기를 힘쓰라”
1) 여기서 ‘조용히’ 라는 말(hJsucavzw)은 ‘침묵하다, 진정시키다, 평온하다’ 라는 뜻으로 이는 마치 전쟁이 끝난 뒤에 오는 평화, 또는 열심히 일을 한 후에 취하는 휴식과 같이 안정된 자세를 말합니다.
요즘 말로 하면 ‘설치지 말라’는 것입니다. 경상도 말로 ‘나대지 말라’는 것입니다. 마음에 열심히 불타오르지만 마치 보일러 불길처럼 차분히 타오르게 하라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불을 지르지 말고, 덕을 세우며, 교회를 안정되게 하라는 것입니다.
2) 또한 ‘일하기를 힘쓰라’는 말(filotimevomai)은 가정이나 직장이나 교회 안에서 자기에게 주어진 책임과 자기가 마땅히 해야만 하는 일에 보다 더 열심을 내라는 것입니다. 즐겁게 그 일을 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말세의 징조에 대해서 말씀하시는 가운데 그에 대한 대비책에 대해서 오늘 성경과 똑같은 맥락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마 24:23) “그 때에 사람이 너희에게 말하되 보라 그리스도가 여기 있다 혹은 저기 있다 하여도 믿지 말라” (마 24:24)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큰 표적과 기사를 보여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리라”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정말 예수님의 부활과 승천과 재림을 믿는다면 우리도 오늘 성경 말씀처럼 조용히 자기 일에 힘써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다시 말해서 주님이 언제 오시든지 부끄럽지 않도록 자기가 하고 있는 일이나 해야 할 일에 대해서 묵묵히 최선을 다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 24:44) “이러므로 너희도 준비하고 있으라 생각하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 (마 24:45) “충성되고 지혜 있는 종이 되어 주인에게 그 집 사람들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눠 줄 자가 누구냐”
과거에 한국뿐만 아니라 세계 교회 앞에 웃음꺼리를 만들었던 다미 선교회의 시한부 휴거설에 현혹된 많은 사람들이 가정이나 직장을 버리고 휴거를 준비하였으나 허탕을 치고 말았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그와 같은 이단들도 같은 기독교로 오해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 후로 기성교회도 재림에 대한 설교가 점점 줄어들었습니다.
오늘 교회 주변에서 신천지를 비롯해서 바람몰이를 하고 있는 이단들의 공통점도 마찬가지입니다. 때로 그들의 열심히 미적지근한 기독교인들을 부끄럽게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것 때문에 이단을 부러워하거나 기죽을 필요가 없습니다. 그것은 믿음보다 더 인간의 잘못된 열심을 강조한 결과 결국 그 열심히 다른 사람이 아닌 자기 자신의 영혼을 태우는 무서운 불이기 때문입니다.
3. 재림을 믿은 성도들의 삶의 자세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이 가지고 있는 또 하나의 잘못된 신앙은 재림에 대한 회의론입니다.
극은 극과 통한다는 말처럼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이 주님의 재림이 임박할 것이라는 소망은 또 다른 문제를 가져다주었습니다.
그것은 주님이 곧 오신다고 하였는데 생전에 그 주님을 영접하지 못하고 일찍 죽는 것이 마치 신앙의 실패자처럼 오해하고 심히 낙망하며 슬퍼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생각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부활을 믿는 그리스도인의 죽음은 불신자의 죽음과 달리 잠을 자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죽은 사람은 아무리 큰 소리로 불러도 깨어 날 수 없지만, 아무리 깊은 잠든 사람일지라도 흔들면 다 깨어 일어나게 되는 것처럼, 주님의 부활을 믿고 또한 주님처럼 부뢀 할 것을 믿는 사람이 주님이 오시기 전에 죽는 다는 것은 마치 자는 사람처럼 재림의 날에 부활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살전 4:13) “형제들아 자는 자들에 관하여는 너희가 알지 못함을 우리가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는 소망 없는 다른 이와 같이 슬퍼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여기서 ‘슬퍼하다’ 라는 말(lupevw)은 그냥 섭섭해하는 정도가 아니라 ‘고통을 가하다, 화나게 하다, 기분 상하게 하다’ 라는 뜻으로 육체적으로는 물론 정신적으로, 정신적으로는 물론 육체적으로도 심히 고통스러워하며 비탄에 젖는 상태를 뜻하는 말입니다.
그러나 설령 예수님이 재림하시기 전에 죽었기 때문에 재림을 영접할 수 없다고 할지라도 주님이 오시기 전에 죽은 사람이나, 예수님이 오실 때까지 살아있는 사람이나 둘다 동일한 구원을 받는 다는 것입니다.
다만 시간적으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후에 살아남은 자들이 변화를 받아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주님을 영접하여 둘다 주님과 함께 영원토록 함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살전 4:16)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 소리로 친히 하늘로부터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살전 4:17) “그 후에 우리 살아 남은 자들도 그들과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그것은 마치 동일한 목적지를 가는 기차에 맨 앞 칸에 탄 사람과 맨 뒤 칸에 탄 사람처럼 공간의 차이가 있을 뿐이지 결국은 다 함께 주님을 영접하여 항상 주님과 함께 있게 된다는 점에 있어서는 차별이 없기 때문에 주님을 재림 전에 죽었다고 너무 슬퍼하지 말고 서로 위로 하라고 당부하고 있습니다.
(살전 4:18) “그러므로 이러한 말로 서로 위로하라”
여기서 ‘위로하라’는 말씀은 ‘격려하다, 권면하다, 긍휼히 여기다’ 라는 뜻입니다.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들은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과 승천과 재림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오늘날도 수많은 성도들과 주의 종들이 다시 오시마 약속하신 주님의 재림을 목격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고 있습니다.
어쩌면 오늘 우리들도 그렇게 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주님의 재림의 약속은 부도가 난 것입니까? 결코 아닙니다.
마치 구약 성경 여러 곳에 약속된 메시아의 초림이 오랜 세월이 흐른 후에 이루이진 것처럼 주님의 재림도 오랜 세월이 지난 후에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 이유는 백년도 채 살지 못하는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하루 24시간이라는 시간 개념과 단 엿새 동안 천지와 만물을 창조하시고, 하루를 천년같이 천년을 하루 같이 여기시는 하나님의 시간 개념에는 상당한 차이가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벧후 3:8)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다는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
물론 지금 당장이라도 주님이 재림의 약속을 지키실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하시지 않는 이유가 나름대로 있기 때문입니다.
(벧후 3:9) “주의 약속은 어떤 이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결 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오늘 성경 말씀을 통해서 요즘에 교회 주변에서 자기들의 믿음이 성경적이고 최고 인양 떠들어 대는 이단들의 정체가 얼마나 잘못된 것인가를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1) 구원을 앞세워 지금까지 신앙생활 해온 교회를 버리고, 주님의 재림이 임박했으니 가정도 직장도 버리고 오로지 자기들의 집단에 들어와야만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이단의 정체와 그 열심히 얼마나 잘못된 것인가? 를 깨닫고 미혹을 받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성경이 가르치는 것처럼 가정과 직장과 교회 안에서 내게 주신 직분에 최선을 다하는 것만이 올바른 믿음입니다. 두 사람이 함께 맷돌을 갈지라도, 어디서 무엇을 하든지, 오직 믿음으로 사는 사람은 거기서 들림을 받고 주님의 재림을 영접할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2) 이천년 전에 주님이 재림을 약속하시고도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의심하거나 낙심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만일 백 년 전에 주님이 오셨다면, 구십년 전에 주님이 오셨다면, 여기 모인 우리는 만일 백 년 전에 주님의 재림이 앞당겨졌다면 저와 여러분 중에 구원받을 사람이 있을까요? 단 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의 입장에서는 주님의 재림이 늦춰지고 있는 것이 감사한 일이 아닙니까?
주님의 재림이 지체되는 동안 우리의 사명은 한 사람이라도 더 예수를 믿고 구원을 받게 하는 전도의 사명을 감당하여 하늘에 상급을 받게 하려고 주님의 특별히 우리에 허락하신 기회임을 깨닫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내 가족, 내 친구, 내 이웃에게 주님의 십자가와 부활과 승천과 재림의 소식을 증거 하는 전도자의 사명을 충실히 감당해야만 장차 주님 앞에 서는 날 칭찬과 상급이 있을 것입니다.
3) 누구보다 주님을 신실히 믿다가 이미 세상을 떠난 분들 때문에 너무 슬퍼하거나 낙심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앞서간 이들은 한 평생 믿음으로 살다가 마지막까지 믿음을 지켰지만 오늘 나는 죽음이 오기 전까지 죄와 싸워 이겨야 할 날들이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럼으로 자신의 죽음에 대해서 지나친 두려움보다는 오히려 장차 주님 앞에 서야 할 준비를 하지 않고 태만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것을 더 걱정하며 너무 세상에 연연한 삶을 살고 있지 않는지 염려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에 대해서 지나치게 슬퍼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부활과 재림의 소망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는 증거입니다. 오로지 세상에서 무병장수하는 것만이 축복으로 아는 허접한 신앙인이라는 증거입니다.
오히려 주 안에서 자는 것이 복되다고 하였습니다. 그것은 주를 위해 일평생 수고한 이들에게 마치 잠을 자는 것처럼 휴식의 시간이기 때문에 감사한 일이며, 부활을 준비하는 시간이기 때문에 더욱 감사한 시간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이 오실 때는 이미 죽은 자나 아직까지 살아있는 자도 둘 다 똑같이 믿음대로 공평하게 주님을 영접하게 될 것입니다. 이 땅에 주님을 위해 수고한 모든 수고는 이 땅에서 보상되어지지 못 하지지만 주님과 함께 영원히 함께하는 그 때는 심은대로 거두게 하실 것이고, 주님과 더불어 영원한 영광중에 거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살든지 죽든지 가장 큰 축복은 언제 어디서나 주님과 함께하는 임마누엘을 삶이라면 죽음은 주님과 영원히 함께 하는 시간이기 때문에 죽음 앞에서 오히려 큰 위로를 받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계 21:3) “그리고 나는 보좌에서 큰 음성이 말씀하시는 것을 들었습니다. “보아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니 그분께서 그들과 함께 거하실 것이다. 그들은 그분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께서 친히 그들과 함께 계실 것이다.” (계 21:4)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닦아 주실 것이며 더 이상 죽음이 없고 다시는 슬픔이나 우는 것이나 아픈 것이 없을 것이다. 이는 처음 것들이 지나갔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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