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려워하지 않는 신앙 공동체
(살전 5: 6-11)
(살전 5:6)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이들과 같이 자지 말고 오직 깨어 정신을 차릴지라” (살전 5:7) “자는 자들은 밤에 자고 취하는 자들은 밤에 취하되” (살전 5:8) “우리는 낮에 속하였으니 정신을 차리고 믿음과 사랑의 호심경을 붙이고 구원의 소망의 투구를 쓰자” (살전 5:9) “하나님이 우리를 세우심은 노하심에 이르게 하심이 아니요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게 하심이라”
혹시 해외에 친척이 있으신 분들은 때때로 ‘지금 한국 괜찮으냐?’고 말입니다. 해외에서는 한국이 곧 전쟁이 터질 것처럼 불안해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주 반복되는 북한의 위협에 면역이 되어서 그런지 몰라도 북한이 기대하는 것처럼 벌써 남한 곳곳에 동요가 일어나야 하는데 별로 그런 모습을 찾아 볼 수 없고 국민들은 각자 자기가 해야 할 일을 묵묵히 해 나가고 있습니다.
그러한 한국 민의 모습은 외국 기자들의 눈에는 놀라울 정도로 생소한 것이기도 합니다. 과연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또 하나는 한국 교회를 대표하는 대형 교회들이 하나 둘 무너져 내리고, 이단들이 공공연히 기성 교회에 도전하고, 입법 예고 중인 차별 법으로 결혼질서들이 붕괴되고 기독교가 도리어 역차별을 받게 되는 부정적인 요소들이 먹구름처럼 한국 교회에 몰려오고 있는 불안한 상황입니다.
이러한 현실에서 과연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무엇을 해야 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 말씀은 두려움에 처한 교회가 무엇을 해야만 두려워하지 않는 신앙 공동체로 만들 수 있는지에 대한 답을 주는 말씀입니다.
1. 두려움의 본질은 무엇인가?
세상에서 두려움을 한 번도 겪어보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요? 갓난아이들은 태어날 때 무엇이 두려운지 자지러질 듯이 울면서 태어납니다. 그 후로 인간은 누구를 막론하고 세상을 살아가면서 마지막 죽음이라는 두려움과 맞닥뜨릴 때까지 온갖 두려움을 경험하면서 살아가게 됩니다.
과연 인간에게 있어서 그와 같은 두려움의 실체는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는 인류의 조상 아담이 하나님께서 금하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따먹은 후 하나님이 부르실 때 제일 먼저 보인 반응이 두려움이었습니다.
(창 3:10) “이르되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여기서 ‘두려워’라는 말(arey)은 ‘두려워하다, 무서워하다, 경외하다’라는 뜻의 와우 계속법 미완료 동사로 구약에 330회나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후로 여인은 해산의 고통과 남자는 노동이라는 고통 속에 살다가 결국 흙으로 돌아가는 존재로 전락되고 말았습니다.
(창 3:16) “또 여자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게 임신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너는 남편을 원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 하시고”
(창 3:19) “네가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 네가 그것에서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
마치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의 바로 왕의 손아귀에서 벗어나 자유와 해방을 얻은 것처럼, 하나님은 그와 같은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어 십자가에 달려 우리를 죄를 대신하여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죄와 고통과 사망에서 구원하여 자유와 해방을 얻게 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와 같은 자유와 해방의 감격을 아직도 누리지 못한 채 여전히 불안과 두려움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과연 누구일까요?
그 사람들은 이 예수께서 십자가로 다 이루어 놓으신 구원의 복음을 듣지 못했거나, 아니면 들었지만 믿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예 화
▲ 일본군 소위 오노다 히로는 1974년 2월 20일 패전 후 30년 만에 필리핀 정글에서 나와 투항한 일이 보도 된 적이 있습니다. 그는 “명령이 없으면 산에서 내려갈 수 없다.” 명령에 복종하여 29년 4개월을 정글 속에서 보내습니다. 오노다가 태평양 전쟁의 패색이 짙던 1944년 9월 “전멸하는 한이 있더라도 절대로 투항하지 말라”는 상관의 명령을 따르기 위해 미군이 일본의 항복 사실을 알리는 전단을 산속에 뿌리고, 일본 정부와 가족 역시 수차례 현지를 방문해 투항을 권고했지만 오노다는 일본의 패전 사실을 믿지 않았다. 22세 청년이 52세 중년으로 변해버린 오노다는 결국 오노다의 요구대로 과거 직속상관에게 투항명령문을 보내 하산을 하였습니다.
오늘 우리의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이미 다 속해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오노다 소위처럼 복음의 소식을 듣지 못했거나, 들었어도 믿지 않는 사람의 마음속에 진정한 구원의 감격과 기쁨이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오늘 우리는 어떻습니까? 오늘 이 예배에 참석한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의 죄를 대속해 주시기 위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장사한지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입니다.
그 때문에 세례도 받았고, 그래서 수년 수십년 교회도 다니고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마음에 진정한 평화와 기쁨이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마음에 불안이나 두려움이 사라졌는가? 하는 것입니다.
(롬 8:1)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사람은 정죄를 받지 않습니다.(롬 8:2) “그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생명을 주시는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여러분을 해방시켰기 때문입니다.”
이 같은 믿음을 회복하기만 한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이라는 두려운 상황이 오히려 부활과 영생이라는 기쁘고 복된 상황으로 역전한 것처럼 우리가 어떤 어려움에 처한다고 할지라도 주께서 주신 구원의 기쁨을 그 누구에게, 그 무엇에게 빼앗길 수 없는 것입니다.
지상 교회들 가운데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만큼 완벽한 신앙생활을 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의 믿음은 흠잡을 데가 없었습니다.
이미 짚고 넘어갔던 부분을 복습하는 마음으로 돌이켜 보면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은 매우 어려운 환경에서 기쁨은 고사하고 예수를 믿는 것조차 쉽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크게 기뻐하였다고 바울 사도가 위로와 격려와 칭찬을 아끼지 않은 교회였습니다.
(살전 1:6) “또 여러분은 많은 환난 가운데서 성령이 주신 기쁨으로 말씀을 받아 우리와 주를 본받는 사람들이 됐습니다.”
여기서 '많은 환난‘이라는 말(poluv", qlivyi" )은 가만히 참고 견뎌내기 힘든 ‘여러 가지 억압과 고난과 환난과 근심‘을 뜻하는 말로 데살로니가 교회가 처한 주변 환경이 얼마나 어려운가 하는 것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게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은 그러한 환경에서도 성령이 주신 기쁨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경험해야 할 기쁨이 바로 이와 같은 성령의 기쁨입니다. 우리가 항상 소유해야 할 기쁨이 바로 이와 같은 성령의 기쁨입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영원하신 삼위일체 하나님이십니다. 그 하나님은 지금도 살아계셔서 우리를 도우시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설령 주변 환경이 어렵다고 두려워하거나 낙심하지 말고 삼위일체 하나님을 더욱 의지할 때 두려움이 사라지고 도리어 기쁨이 충만한 신앙 공동체를 이룰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1) 성령께서 우리와 함께하셔서 우리를 도우시기 때문입니다.
(롬 8:18) “ 나는 현재 우리가 겪는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하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롬 8:26)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2) 하나님께서 우리의 모든 필요를 공급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롬 8:32)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3) 승천하신 성자께서 지금도 우리를 위해 기도해주시기 때문입니다.
(롬 8:34)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비록 우리의 현실이 안팎으로, 영육 간에, 국가적으로 교회적으로 어려움에 처한 것이 사실이지만 우리는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랑받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모인 신앙 공동체이기 때문에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롬 8:38) “나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놓을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고 확신합니다. 죽음도 그렇게 할 수 없고, 생명도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천사들도 그렇게 하지 못하고 지옥의 모든 세력을 다 합친다 해도 하나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멀리 떼어놓을 수 없습니다. 오늘에 대한 우리의 염려도 내일에 대한 우리의 공포도” (롬 8:39) “또는 하늘 높이 올라가거나 바다 깊은 곳에 들어가거나 우리가 어디에 있든지간에 우리 주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실 때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놓을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2. 성경에 대한 바른 이해가 중요합니다.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은 이미 바울 사도를 통해서 주님의 재림에 대한 가르침을 받았기 때문에 그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습니다.
(살전 1:10) “또한 그들은 여러분이 하나님의 아들이 다시 오시기를 고대하고 있다고 말해 주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아들을 다시 살리셨고, 그 아들 예수님은 하나님의 노여운 심판에서 우리를 구해 주실 것입니다. 그분은 반드시 다시 오십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문제일까요? 오늘 성경 말씀을 보니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의 초미의 관심사는 그 주님이 언제 어떻게 오시는가? 하는 때와 시기에 대한 관심이었습니다.
물론 그러한 관심은 비단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만이 아니라 현대 교회 안에서도 여전히 사람들의 관심사인 것입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언제 역사의 종말이 임할 것인가? 하는 문제에 대해서 천사도 모르고 심지어 아들이신 예수님도 모르고 오로지 하나님 아버지만 아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마 24:36) “그러나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시느니라”
바울 사도 이미 그 사실을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에게 가르쳤기 때문에 다 알고 있는 사실임을 오늘 성경에서 재확인하였습니다.
(살전 5:1) “형제들아 때와 시기에 관하여는 너희에게 쓸 것이 없음은”
이는 예수님의 재림의 시기 문제에 대해서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이 이미 다 알고 있기 때문에 다른 무엇을 가르칠 것이 없다는 말입니다. 이 말씀은 현대 교회에도 그대로 적용되어져야 할 말씀입니다.
1) 주님이 다시 오시는 날이 언제인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마치 야밤에 도적이 몰래 담을 넘어 창문을 뜯고 집안으로 들어오는 것처럼 ‘예상하지 않고 있을 때’ 갑작스럽게 오신다는 것입니다.
(살전 5:2) “주의 날이 밤에 도둑 같이 이를 줄을 너희 자신이 자세히 알기 때문이라”
여기서 ‘자세히’라는 말(ajkribw'")은 ‘정확하게’라는 뜻이며 안다는 말(ei[dw)은 ‘경험하다’라는 뜻으로 확실히 알고 있다는 뜻입니다. 데살로니가 교회가 주의 재림에 대해서 바르게 알고 있는 까닭은 이미 바울 사도를 통해서 배웠기 때문입니다.
2) 물론 주님이 오실 그 때와 시기가 임박했다는 징조에 대해서는 성경이 조금씩 문을 열어 보이고 있습니다.
(살전 5:3) “그들이 평안하다, 안전하다 할 그 때에 임신한 여자에게 해산의 고통이 이름과 같이 멸망이 갑자기 그들에게 이르리니 결코 피하지 못하리라”
여기서 ‘평안하다 안전하다’라고 하는 때는 사람들이 평화와 번영을 누리는 동안 안전 불감증에 빠져 있는 상태를 뜻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태평한 사람들에게 주님의 재림은 평화나 안전이 아니라 멸망의 날이 될 것이며, 그것을 결단코 피할 수 없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3) 예수님께서도 역사의 종말인 심판이 임박한 징조에 대해서 그날에는 세상이 마치 노아 홍수 심판과 소돔과 고모라의 불 심판의 때와 같은 상태가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눅 17:27)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 들고 시집 가더니 홍수가 나서 그들을 다 멸망시켰으며” (눅 17:28) “또 롯의 때와 같으리니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사고 팔고 심고 집을 짓더니” (눅 17:29) “롯이 소돔에서 나가던 날에 하늘로부터 불과 유황이 비오듯 하여 그들을 멸망시켰느니라” (눅 17:30) “인자가 나타나는 날에도 이러하리라”
이 같은 재림의 징조는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만이 아니라 현대 교회들에게도 두려움을 주는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래서 간혹 교회를 잘 다니고 나름대로 열심히 믿고 있는 성도들도 구원의 확신을 잃어버리고 혹시 구원받지 못하면 어떻게 하나? 라는 두려움에 사로잡히는 것입니다.
3. 영적인 대안이 필요합니다.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이 두려움의 날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어떤 믿음의 자세가 필요 할까요?
신구약을 막론하고 성경 전체를 관통하는 큰 맥은 구원과 심판이 마치 하루 중에 밝은 낮과 어두운 밤이 공존하는 것처럼, 동전의 양면의 그림이 다른 것처럼 공존하는 것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미래에나 하나님이 세상을 심판하시는 궁극적인 목적은 세상을 멸하시는데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주 멸망하지 않도록 남은 자를 구원하시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노아의 홍수 심판은 하나님께서 120년 동안이나 오래 참으셨지만 그냥 내버려두신다면 유일하게 남은 노아의 가정까지 오염이 되어 씨가 말라버리기 때문에 그 가정을 구원하시기 위해 세상을 심판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노아 홍수 심판은 불신앙의 모든 사람들에게는 멸망의 날이었지만 노아의 가족에게는 구원의 날이었습니다.
(히 11:7) “믿음으로 노아는 아직 보이지 않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아 경외함으로 방주를 준비하여 그 집을 구원하였으니 이로 말미암아 세상을 정죄하고 믿음을 따르는 의의 상속자가 되었느니라”
오늘 성경도 마찬가지입니다. 데살로니가 성도들에게 주님의 재림은 기쁨의 날이지만 재림을 믿지 않고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집을 짓고 세상 향락을 추구하는 일에만 급급하는 불신앙의 사람들에게는 두려움의 날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똑같은 시대를 살아간다고 할지라도 예수님의 재림을 바로 믿고 신앙 생활하는 사람과 믿지 않는 사람은 영적인 주소지 각기 다르기 때문에 신앙의 사람들은 빛의 아들이고, 불신앙의 사람들을 어두움의 자식이라고 한 것입니다.
(살전 5:4) “형제들아 너희는 어둠에 있지 아니하매 그 날이 도둑 같이 너희에게 임하지 못하리니”
그렇다면 왜 빛의 아들에게는 주님의 재림이 도둑같이 임하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하나님께서 빛의 아들들에게 그 날을 미리 알려주시기 때문일까요?
주님의 재림이 영적인 주소가 빛이요, 그 신분이 빛의 아들인 성도들에게는 도적같이 임하지 못하는 이유는 빛의 아들들이 밤이나 어둠에 속하지 않는 삶을 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살전 5:5) “너희는 다 빛의 아들이요 낮의 아들이라 우리가 밤이나 어둠에 속하지 아니하나니”
만일 어두움에 속해 산다면 주님의 언제 재림하실지 알 수 없지만 빛 가운데 깨어서 주님의 재림을 고대하는 빛의 아들에게는 주님의 재림이 결코 급작스러운 것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1) 도적은 밤을 좋아합니다. 그러나 밤에도 볼 수 있는 적외선 감지기를 켜놓고 창문에 손을 대기만 하면 요란 경보음이 들리는 보안 시스템을 설치한 집에는 아무리 캄캄 한 밤이라고 할지라도 쉽게 접근하지 못합니다.
2) 만삭이 된 임산부가 예정일을 미리 계산해두고 출산 할 병원을 미리 예약해 두었다가 산통이 시작될 때 병원에 전화를 걸어 구급차를 요청하거나 하루 이틀 미리 입원을 하면 출산에 대한 두려움을 어느 정도 벗어날 수 있습니다.
우리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정말 주님의 재림이 두려움의 날이 되지 않고 구원이 온전히 성취되는 축제의 날이 될 것을 기대하고 주님 오시기를 기다리는 성도들에게는 결코 도적같이 임하지 않게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1) 깨어 있어야 합니다.
(살전 5:6)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이들과 같이 자지 말고 오직 깨어 정신을 차릴지라”
여기서 ‘자지 말고’라는 말(kaqeuvdw)은 철야기도를 하라는 말이 아니라, 사람이 깊은 잠에 빠져 있어서 모든 지력과 의지와 감각이 완전히 마비된 상태, 즉 영적 무감각, 무지각, 무의식 상태에 깊이 빠져 있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의 믿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영적인 잠에 빠지게 되면 자신의 믿음 상태가 어느 정도인지, 지금 시대가 어느 때인지 분별력을 잃게 됩니다.
그러나 말씀과 기도에 전념하게 되면 성경 말씀에 비추어 자신의 영적 상태를 돌아보게 되고 지금 이 시대가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말세에 얼마나 근접하고 있는가를 깨닫게 되기 때문에 자연이 주님 맞을 준비를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눅 12:37] 주인이 와서 깨어 있는 것을 보면 그 종들은 복이 있으리로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주인이 띠를 띠고 그 종들을 자리에 앉히고 나아와 수종하리라
2) 영적 무장해야 합니다.
(살전 5:8) “우리는 낮에 속하였으니 정신을 차리고 믿음과 사랑의 호심경을 붙이고 구원의 소망의 투구를 쓰자”
영적으로 깨어 있다는 말은 ‘믿음과 사랑’으로 무장하고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어려울수록 두려워하지 말고 믿음으로 우리 삶 전체를 하나님께 맡기는 결단을 말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향한 이러한 절대 의존은 그분에 대한 흔들림 없는 확신에서 비롯됩니다.
‘호심경’은 요즘 말로 방탄복입니다. 전투에 임하는 병사의 심장을 보호하는 필수 적인 장비입니다. 만약에 영적인 호심경으로 무장하지 않게 되면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 마음에 불안을 떨쳐 버릴 수 없게 됩니다.
예나 지금이나 이단들은 구원의 확신이 부족한 기성 교인들에게 먼저 불안감과 두려움을 조성합니다. 그래서 기성교회를 다녀가지고는 구원을 못 받을 것처럼 가르칩니다. 이것이 이단의 공통적인 수법입니다.
예언 사역을 하는 ‘페트리샤 킹’이라는 사람이 예언 사역의 진짜와 가짜를 어떻게 구별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사단으로부터 오는 악한 영은 ‘두려움’을 준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음에 불안과 두려움을 갖도록 조종을 하여 자기들이 시키는 대로 따르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의 사역은 성도들의 신앙을 격려를 받고 힘을 얻어 스스로 올바른 방향으로 갈 수 있도록 도와준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사역은 구원의 확신과 마음에 평안을 갖도록 한다는 것입니다.
(살전 5:9) “하나님이 우리를 세우심은 노하심에 이르게 하심이 아니요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게 하심이라”
3) 항상 주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살전 5:10) 예수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사 우리로 하여금 깨든지 자든지 자기와 함께 살게 하려 하셨느니라
주님과 동행하는 사람은 성도들과 동행하는 삶을 사는 사람입니다. 아프리카 사파리에 가면 드넓은 들판에 맹수와 더불어 연약한 영양이 함께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 가운데서 맹수들이 먹이 감을 사냥하는 방법은 무리가운데서 낙오하는 짐승을 노리고 있다가 공격합니다.
사단의 수법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므로 사단의 미혹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는 신앙 공동체인 교회를 이탈하지 말고 더불어 깨어 기도하고 영적인 꼴을 나누며 사랑 안에서 서로 권면하며 하나가 되기를 힘쓰는 신앙 공동체적인 삶을 살아야 합니다.
(살전 5:11) 그러므로 피차 권면하고 피차 덕을 세우기를 너희가 하는 것같이 하라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피차’라는 말입니다. 일방적이 아니라 ‘상대적’이라는 것입니다. ‘권면하고’라는 말(parakalevw)은 ‘비난이 아니라 서로 격려하다’ 현재 진행형입니다.
피차 ’덕을 세운다’라는 말(oijkodomevw)은 ‘집을 짓는다, 세운다’는 말의 현재 진행형입니다. 그렇다면 집을 세울 때 어떻게 합니까?
목공 철공 시멘트 공이 각각 자기가 맡은 분야에 성실하면서 서로 협력해야만 튼튼하고 아름다운 집이 세워지는 것처럼, 교회도 각자 자기가 맡은 일에 성실하고 다른 사람이 하는 것을 비판하기 보다는 그 사람이 더 잘할 수 있도록 협력할 때에 아름다운 신앙 공동체로 세워지는 것입니다.
주님의 재림을 고대하는 성도들에게는 피차 위로와 격려와 권면이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성도들에게 환난과 핍박이 반드시 있기 때문에 무엇보다 위로와 격려와 권면이 절대로 필요한 것입니다.
(히 3:13)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여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완고하게 되지 않도록 하라
결 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무엇보다 우리에게 비밀로 붙이신 종말의 때에 관한 호기심만이 아니라 두려움도 버려야 합니다.
주님이 다시 오시는 날이 그와 같은 기쁨의 날이 되기 위해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요?
우리의 한계는 그 날을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날을 알려고 하지 말고 그 날이 언제 올지라도 그 날을 맞을 준비만 하고 기다리면 되는 것입니다.
1) 주의 날, 곧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의 날이 도적같이 올 것입니다.
2) 그러므로 우리는 깨어 근신해야 합니다.
3) 깨어 근신하는 삶은 빛의 삶이며, 믿음, 소망, 사랑의 삶이요, 항상 주와 함께하는 삶입니다.
4) 자신만 깨어 근신할 뿐만 아니라, 서로 위로하고 권면하고 덕을 세우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믿음과 소망과 사랑의 말씀으로 서로의 신앙 성장을 위하고 서로 세우기를 힘써야 합니다.
우리게 그렇게 주님의 재림을 대비한다면 주님의 재림은 결코 우리에게는 두려움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오히려 신부와 신랑이 만나는 혼인 잔치처럼 지상 최대의 기쁨의 날이 될 것입니다.
(계 21:2)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준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 (계 22:17) “성령과 신부가 말씀하시기를 오라 하시는도다 듣는 자도 오라 할 것이요 목마른 자도 올 것이요 또 원하는 자는 값없이 생명수를 받으라 하시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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