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 교/이규왕목사

유모와 아버지 같은 사랑으로 /(살전 2:9-12)

미션(cmc) 2013. 2. 1. 16:06

유모와 아버지 같은 사랑으로
(살전 2:9-12)

(살전 2:9) “형제들아 우리의 수고와 애쓴 것을 너희가 기억하리니 너희 아무에게도 폐를 끼치지 아니하려고 밤낮으로 일하면서 너희에게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였노라” (살전 2:10) “우리가 너희 믿는 자들을 향하여 어떻게 거룩하고 옳고 흠 없이 행하였는지에 대하여 너희가 증인이요 하나님도 그러하시도다” (살전 2:11) “너희도 아는 바와 같이 우리가 너희 각 사람에게 아버지가 자기 자녀에게 하듯 권면하고 위로하고 경계하노니” (살전 2:12) “이는 너희를 부르사 자기 나라와 영광에 이르게 하시는 하나님께 합당히 행하게 하려 함이라”

오늘 예배에 참석한 성도들 가운데 부모 없이 홀로 세상에 태어난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부모님은 우리를 세상에 태어나게만 하신 것만이 아니라, 우리가 스스로 세상을 살아갈 수 있을 때까지 사랑으로 우리를 키워주신 고마운 분들입니다.
예 화 1 누가 이런 글을 블로그에 올렸습니다. 우리가 어렸을 때 어머니의 사랑은 생선가시를 발라서 살점을 계속해서 밥숟가락에 올려주시는 것이라면, 아버지의 사랑은 얼마 남지 않은 생선에 절대로 젓가락을 대시지 않고 쳐다보시지도 않는것이라고 말입니다. 우리가 그와 같은 부모님의 사랑을 받으면서 자라서 그 사랑을 자녀들에게 대물림하면서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문제는 어렸을 때 부모에게 얼마나 사랑을 많이 받으면서 자랐는가? 하는 것은 중년의 삶에도 영향을 미칠 뿐 아니라, 결혼을 해서 자식을 낳아 키우는데 있어서도 좋은 엄마, 아빠가 되는 일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예 화 2 오래전 미국의 하버드 대학교의 건강한 남학생 126명을 대상으로 ‘부모와의 관계를 어떻게 느끼는가?“에 대한 설문 조사를 하였는데 35년이 지난 후 이 설문에 참가했던 학생들의 의무 기록을 수집하여 상세한 병력과 심리 상태를 조사하였다고 합니다. 그 결과 아버지 어머니에게 다정함과 친밀감을 느끼지 못한다고 답했던 학생이 중년에 이르러 관상동맥 질환, 고혈압, 알콜 중독 등 심각한 병에 걸리는 확률이 부모와의 관계가 친밀하다고 답했던 학생들보다 두 배나 많았다고 합니다.
이는 부모님의 사랑이 자녀의 평생에 크나큰 영향을 미치는 것을 나타내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와 같은 아버지와 어머니의 사랑은 인간의 육신만이 아니라 신앙생활에도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입니다. 그것이 곧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어머니 같은 사랑과 아버지 같은 사랑을 경험할 수 있을까요? 그와 같은 하나님의 사랑은 성경 말씀을 통해서 성령안에서 경험할 수 있습니다. 또한 주님의 몸된 교회안에서 성도의 교제를 통해서 경험할 수 있습니다.

1. 성경을 통한 하나님의 양면적 사랑
하나님께서 인간을 얼마나 사랑하셨는가 하는 것은 인간만 유일하게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으셨다고 것과, 엿새 동안 창조하신 세상은 보시기에 좋았다고만 하셨으나 인간을 창조하신 후에는 보시기에 심히 좋았다고 말씀하신 것을 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어느 이단단체가 말하는 것처럼 아버지 하나님과 어머니 하나님이 따로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유한한 인간과 달리 전능하신 하나님은 한 하나님 안에 아버지와 같은 정의와 어머니와 같은 자비가 공존하신 사랑의 하나님을 성경 전체의 맥락에서 찾아 볼 수 있습니다.

1) 하나님께서 인간을 위해 지상 낙원 에덴동산을 만드시고 그곳에 인간이 마음대로 따먹을 수 있는 생명과일 나무와 더불어 따먹는 것을 금하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동산중앙에 함께 심어 놓으신 것은 하나님의 사랑과 정의의 균형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2) 노아의 홍수 심판으로 지상에 인류가 심판을 받은 것이 하나님의 정의라면 그 가운데서 노아의 가족이 구원을 받아 제 2의 인류 조상이 되어 그 후손이 오늘에 이르게 된 것은 오래 참으시는 사랑입니다.

3)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자유와 해방을 주시기 위해 어린양의 피를 통해서 값없이 구원하신 것이 사랑이라면, 시내 산에 율법을 선포하신 것은 사랑과 정의의 균형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4) 이스라엘 백성들이 율법을 완벽하게 지키지 못하였기 때문에 그 죄를 대신하여 제물을 드리면 속죄함을 받는 것이 사랑이라면, 짐승이 인간의 죄를 대신하여 대신 하여 죽고 불에 태워져야만 죄가 속죄되는 공의의 양면을 뜻하는 것입니다.

5) 인간의 연약한 눈으로 사랑과 정의를 겸비하신 하나님을 볼 수는 없지만 하나님께서 사랑과 정의의 화신이신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신 것은 하나님의 참 사랑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독생자가 인간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못박혀 죽음으로 속죄를 받을 수 있게 된 것은 죄를 용납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공의를 뜻합니다.

6) 세상에서 누구든지 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믿고 회개하기만 하면 예외 없이 죄사함과 구원을 받는 것은 사랑입니다. 그러나 믿지 않는 사람은 주님의 사랑과 자비를 거절하는 것이기 때문에 영원한 심판과 형벌을 받는 것은 공의입니다.
(요 3:18) ‘그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그러므로 십자가의 구원과 불신의 심판을 아울러 전해야만 하나님의 온전한 사랑을 증거하는 것이 됩니다.

2. 바울을 통한 하나님의 사랑
사도 바울도 이를 깨닫고 가는 곳마다 복음을 십자가의 복음과 심판을 열심히 증거 하였습니다.
바울은 일평생 가정을 갖지 않고 무소유로 일관하면서 오로지 복음만을 전하는 사도 바울이었지만 그와 같은 종교 사기꾼들은 마치 먹이 감을 발견한 매처럼 바울을 공격해댔습니다. 바울을 비난하고 헐뜯어 그의 권위를 땅에 끌어내어 바울이 전하는 복음을 사람들이 듣지 못하게 하려고 온갖 모략을 일삼았습니다.
(살전 2:5) “너희도 알거니와 우리가 아무 때에도 아첨하는 말이나 탐심의 탈을 쓰지 아니한 것을 하나님이 증언하시느니라”
여기서 ‘아첨’이라는 말과 ‘탐심’이라는 말은 ‘더 많이 가지려고 욕심을 부리는 부도덕한 모습’을 가리키는 말들로 당시 대적들이 바울을 모함하는 말이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어디에 가든지 누구를 만나든지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으로 말씀을 전하고 가르쳤음을 오늘 성경에서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첫째 권위가 아니라 어머니 사랑으로 전하였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예수님께 직접 이방사도로 임명을 받았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처럼 얼마든지 자신의 사도권을 내세워 대접을 받을 수 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거룩한 사도라는 권위가 아니라 어머니와 같은 예수님의 사랑이 더 절실하였기 때문입니다.
(살전 2:7)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도로서 마땅히 권위를 주장할 수 있으나 도리어 너희 가운데서 유순한 자가 되어 유모가 자기 자녀를 기름과 같이 하였으니”
여기서 ‘기름과 같이’라는 말(qavlpw)은 젖만 먹이는 행위가 아니라 마음으로 따뜻하게 하다, 소중히 여기다, 양육하다는 뜻의 현재 능동형의 말씀으로 지속적인 상태를 뜻합니다.
바울은 왜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의 어머니가 아니라 유모라고 하였을까요? 그것은 자기 자녀가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에 대한 사랑은 자기 자녀를 기름과 같이 하였다고 하였는데 여기서 ‘기른다’는 말은 단순이 젖만 주는 것이 아니라 ‘따뜻하게 하다, 소중히 여기다, 양육하다’라는 뜻입니다.
이는 바울은 데살로니가 성도들에게 단순히 성경을 가르치고 설교만 한 것이 아니라 따뜻하고 소중한 마음으로 그 영혼을 자라게 하기 위해 복음만이 아니라 목숨까지도 아깝지 않을 정도로 사랑하였습니다.
(살전 2:8) “우리가 이같이 너희를 사모하여 하나님의 복음뿐 아니라 우리의 목숨까지도 너희에게 주기를 기뻐함은 너희가 우리의 사랑하는 자 됨이라”
여기서 ‘사모하여’라는 말(oJmeivromai)은 ‘애정있는 감정을 가지고 사랑하는 마음’의 동분사 현재형으로 지속적인 상태를 뜻하는 말로 바울 사도가 목숨까지도 아끼지 않고 복음을 전한 것은 그 만큼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을 사랑했을 뿐 아니라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도 그와 같이 바울을 사랑하였기 때문입니다.

둘째 아버지와 같은 사랑으로 가르쳤습니다.
남을 비난하는 것과 충고하는 것은 귀로는 비슷하게 들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마음으로 들으면 비난하는 소리는 마음을 아프게 하지만 충고하는 소리는 마음에 사랑을 느끼게 합니다.
비난하는 소리는 누구에게나 상처와 아픔을 주지만 충고는 상차와 아픔을 회복하게 합니다.
인간들이 모인 교회는 아무리 이상적인 교회라고 할지라도 장단점이 있고 잘하는 것과 못하는 것이 있기 때문에 비난이 아니라 반드시 충고가 필요합니다.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에게 비난이 아니라 충고를 하였습니다.
(살전 2:11) “너희도 아는 바와 같이 우리가 너희 각 사람에게 아버지가 자기 자녀에게 하듯 권면하고 위로하고 경계하노니”

여기서 ‘권면하고 위로하고 경계하노니’라는 말은 ‘ 아버지가 자녀를 대하듯 한 사람 한 사람을 돌보아 주며, 격려하고, 위로하고 하나님을 위해 선한 삶을 살아가라고 타이르듯이 권고하고, 그릇된 길을 갈 때 바른 길로 인도하며, 잘 모를 때 호의적으로 가르치는 아버지의 정의로운 사랑’을 뜻합니다.
이는 앞서 (살전 2:7,8)에서 마치 ‘어머니가 자기 자녀를 돌보듯이 부드럽게 대하고, 너무나 사랑했기 때문에 생명까지도 아끼지 않고 기꺼이 희생하려는 자비로운 사랑’과 대조적인 아버지의 사랑입니다.
그 이유는 데살로니가 교인들을 이용해서 무슨 이득을 보려고 그렇게 한 것이 아니라 그들을 부르신 하나님의 나라의 영광에 이르기에 합당한 성도들이 되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선한 생활을 하게 하기 위한 선한 목적 때문이었습니다.
(살전 2:12) “이는 너희를 부르사 자기 나라와 영광에 이르게 하시는 하나님께 합당히 행하게 하려 함이라”
그것도 사도로써 마땅히 주장하고 명령할 수 있지만 권위보다는 어머니의 자비와 아버지의 정의로운 사랑과 같은 사랑으로 그렇게 한 것입니다.
더구나 사도 바울은 자기 혼자서 그렇게 한 것이 아니라 '우리‘라고 말하는 바울의 일행인 전도 팀이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을 그렇게 사랑하였습니다.

3. 교회를 통한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
여기 모인 사람들은 너나를 막론하고 누군가의 전도와 권유와 사랑에 이끌려 교회에 나와서 구역과 전도회에서 앞서 믿은 성도들을 통해서 오늘 성경 말씀과 같은 어머니의 자비로운 사랑과 아버지의 정의로운 사랑과 같은 사랑을 받으면서 믿게 되었고 변화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것은 마치 자식이 부모의 사랑을 받으며 자라서 자기도 시집가고 장가가서 아이를 낳아 자기가 부모에게 받은 사랑을 대물림하면서 자녀를 키워서 또 새 가정을 이루게 하는 대물림과 똑같은 역사가 지속적으로 이어져야 하는 곳이 바로 교회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앞서 믿은 우리들은 내 주변에 믿음이 연약한 자나 어려움을 당하는 시웃에게 어머니와 같은 사랑으로 부드럽게 대하고 때로는 자라고 있는 성도들에게는 아버지와 같은 사랑으로 가르치고 권면하는 성도들이 되어야 합니다.
물론 교회 안에 소수의 교역자들이 있지만 그들만으로 많은 성도들을 일일이 전도하고 섬기고 훈련시킨다고 하는 것은 분명히 한계가 있기 때문에 더 이상의 성장과 부흥이 이루어질 수 없는 것입니다.
앞서 믿은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교회의 비전은 불신자에게 하나님 아버지의 자비와 정의의 복음을 전하고, 새 신자들을 자비와 사랑으로 섬기고, 말씀과 성령으로 가르치고 훈련시켜 헌신하는 제자가 되게 하고, 그들이 다시 다른 사람을 전도하고 새 신자를 섬기고 그들을 가르치고 훈련시켜 또 제자를 삼는 생명력있는 제자가 되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 안에 그와 같은 일들을 성도들이 나누어 할 수 있도록 여러 가지 직분과 시스템을 만들어 교육과 훈련을 시키는 이유가 어머니와 아버지의 사랑으로 교인들을 섬기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물론 교역자도 부족한데 평신도가 완전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 사역이 목회자 중심에서 평신도 중심으로 활성화되어야 하는 이유는 교회는 영적인 가정이기 때문입니다.
가정에는 어른만이 아니라 어린아이도 있고 아직 태어나지 않는 아이도 있습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는 동안 아이가 태어나고 자라나서 어른이 되어 또 다른 가정을 번식시키는 것처럼 교회도 그렇게 자라가는 것입니다.
물론 교회를 다니면서 점점 더 깊이 섬기다 보면 오늘 성경에서 전도자 바울의 일행처럼 수고와 진심을 알아주기는커녕 대적자들로 부터 교인들의 마음을 사려고 그럴듯한 말로 가르치는 것은 궁극적으로 돈을 우려내려는 수작이라는 오해와 비난과 험담을 듣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머니의 자비와 아버지의 정의로운 사랑으로 전도하고, 새 신자를 섬기고, 믿음이 연약한 자를 가르치고, 훈련하는 일에 매진하는 일을 묵묵히 하는 것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가 우리의 마음을 꿰뚫어 보시고 기뻐하시는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러한 믿음은 본래 내 마음이 아니라 그런 일을 당할 때마다 바울의 일행이 경험했던 것처럼 하나님께서 말씀과 성령으로 위로와 용기와 격려의 은혜를 공급하여 주시기 때문에 그러한 것들을 능히 이기고 견디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누구든지 처음에는 불신자요 새 신자였지만 그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믿음이 자라서 오늘에는 남에게 전하고 섬기고 가르치고 훈련시키는 성숙한 제자가 될 수 있다는 꿈과 희망을 가지고 교회가 제공하는 모든 교육과 훈련의 과정에 참여하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결 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세상에 어느 누구도 예수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을 듣지도, 알지도 못하면서 자기 발로 교회를 찾는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우리는 누군가의 전도와 권유와 사랑에 이끌려 교회에 나왔을 것입니다. 처음에는 선뜻 나서지 않았는데도 여러 차례 간청을 해서 부득이 나온 분도 있을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 성경에서 유모와 같은 어머니의 사랑입니다.
교회에 다닌다고 저절로 하나님의 사랑이 깨달아지고 성경이 저절로 다 이해되는 것이 아닙니다. 누군가가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으로 우리에게 말씀을 잘 가르쳐 주어야만 비로소 성경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예 화 3
어떤 여자가 아들을 데리고 간디를 찾아왔다. "선생님, 도와 주세요. 아들이 사탕을 너무 많이 먹어서 이가 다 상했습니다. 제가 아무리 사탕을 먹지 말라고 타일러도 말을 잘 듣지 않습니다. 그런데 아들이 간디 선생님을 존경해서 선생님 말씀이라면 듣겠다고 합니다." 간곡한 부탁을 듣고 간디가 말햇다. "도와 드릴테니 보름 뒤에 아들을 다시 데리고 다시 오십시오." 보름 뒤, 여자는 아들과 함께 간디를 찾아 왔다. 간디는 소년에게 말했다. "얘야, 사탕을 많이 먹으면 이가 상하고 건강을 헤치니 먹지 않는 것이 좋겠구나." 아이가 대답했다. "선생님 말씀대로 할게요." 아이의 어머니는 고마운 뜻을 전하며 간디에게 물었다."선생님, 제가 전에 선생님을 찾아 뵈었을 때 왜 보름 후에 다시 오라고 하셨습니까?" "실은 저도 사탕을 좋아해서 먹고 있었거든요. 아이에게 사탕을 먹지 말라고 하기전에 제가 먼저 끊어야 했습니다."
물론 교회 안에 소수의 교역자들이 있지만 그들만으로는 나가서 전도하고 교회를찾는 새 신자에게 성경을 가르치고 제자 훈련을 시킨다는 것은 분명히 한계가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여러 조직과 프로그램을 만들고 거기에 오늘 성경 말씀처럼 어머니의 자비와 아버지의 정의로운 사랑을 가르치고 증거할 수 있는 믿음의 사람들을 배치하여 섬기게 하는 것입니다.
그 조직이 바로 구역이니, 셀이니 하는 곳이고, 그 기관이 주일학교, 새 가족부, 비전학교, 세례학교, 제자훈련, 사역자 훈련, 일대일 양육 훈련, 화요 성경공부와 같은 곳입니다.
분명히 목회자가 아닌 평신도임에도 불구하고 어머니의 자비와 아버지의 정의로운 사랑으로 전도하고, 새 신자를 섬기고, 믿음이 연약한 자를 가르치고, 훈련하는 일에 매진하는 일을 묵묵히 하는 성실한 일꾼들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한 일꾼들은 처음서부터 저절로 그렇게 믿음이 좋아진 것이 아니라 앞선 신앙의 선배들 가운데 오늘 성경에서 바울의 일행처럼 어머니와 같고 아버지와 같은 사랑으로 전도를 받고 양육을 받고 훈련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들로 언젠가 거슬러 올라가면 오늘 처음 교회를 나온 형제자매처럼 쑥스러워하던 초신자 시절이 있었는데 누군가가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으로 섬기고 도왔기 때문에 그처럼 믿음이 자란 것입니다.
교회는 마치 가정과 같이 아이가 자라서 어른이 되어 결혼하여 새로운 가정을 이루어 새 생명을 출산하여 또 어른이 되게 하는 것처럼 교회도 오늘의 새신자가 한 발자국 앞선 신앙의 선배들로부터 마음껏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면서 믿음이 자라서 내일에는 오늘의 나와 같은 새 신자를 전도하고 양육하는 신앙의 성장이 있으시기 바랍니다.
그렇습니다. 누구든지 처음에는 불신자요 새 신자였지만 그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믿음이 자라서 오늘에는 남에게 전하고 섬기고 가르치고 훈련시키는 성숙한 제자가 될 수 있다는 꿈과 희망을 가지고 교회가 제공하는 모든 교육과 훈련의 과정에 참여하는 성도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