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 교/이규왕목사

마음을 꿰뚫으시는 하나님/(살전 2:1-4)

미션(cmc) 2013. 1. 23. 19:17

마음을 꿰뚫으시는 하나님
(살전 2:1-4)


(살전 2) “1 형제들아 우리가 너희 가운데 들어간 것이 헛되지 않은 줄을 너희가 친히 아나니 2 너희가 아는 바와 같이 우리가 먼저 빌립보에서 고난과 능욕을 당하였으나 우리 하나님을 힘입어 많은 싸움 중에 하나님의 복음을 너희에게 전하였노라 3 우리의 권면은 간사함이나 부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속임수로 하는 것도 아니라 4 오직 하나님께 옳게 여기심을 입어 복음을 위탁 받았으니 우리가 이와 같이 말함은 사람을 기쁘게 하려 함이 아니요 오직 우리 마음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 함이라

인간 역사 이래 인간은 그동안 온갖 죄악을 저지르며 살아왔습니다. 그와 같은 인간의 심성을 밝혀내기 위해 각종 심리학, 정신 신경학, 범죄 수사학, 각종 종교등을 통해서 많은 연구를 거듭해왔지만 인간의 심성은 변하지도 더 착해지지도 않았습니다. 무엇보다도 겉으로는 그 속내를 정확하게 알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진실을 밝히기 위해서 연구해 낸 것이 거짓말 탐지기이지만 그것도 지능적인 범죄 전과자 속이고 넘어가는 세상이기 때문에, 법정에 산처럼 쌓인 고소장은 죄의 경중이 아니라 거짓과 진실을 가리는 진실 게임에 엄청난 시간과 돈과 인력을 허비하고 있는 현실입니다.

태고 이래로 변함없이 돌고 있는 지구처럼 세상은 여전히 속고 속이는 거짓이 되풀이 되고 있으며 말세가 되면 더욱 거짓이 만연할 것이라고 성경이 경고하고 있습니다.
(딤후 3:13) “악한 사람들과 속이는 자들은 더욱 악하여져서 속이기도 하고 속기도 하나니”
라는 말씀처럼 짧은 성경 한 절에 속인다는 말이 세 번이나 거듭될 정도로 강조되고 있습니다.
그와 같은 거짓이 이제는 교회 밖에서만 난무하는 것이 아니라 마치 공기 중에 유해가스가 포함되어 있고 음식물 중에 발암물질이 섞여 있는 것처럼 이제는 교회 안에도 깊숙이 파고 들어와 있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인간이 위선의 탈을 벗어 던지고 보다 더 진실한 삶을 살 수 있을까요? 속고 속이는 세상에서 어떻게 하면 인간이 서로를 신뢰하고 사랑하며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을까요? 오늘 성경에서 그 답을 찾아야 하겠습니다.

1. 하나님을 힘입은 복음 전도
환골탈퇴(換骨脫退)라는 말처럼 사도 바울이 지난날 열심히 섬겼던 유대교를 완전히 벗어던지고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온전히 돌이킨 까닭은 유대교와 기독교 사이에서 어느 종교가 진실된 참 종교인지를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딤후 3:13) 악한 사람들과 속이는 자들은 더욱 악하여져서 속이기도 하고 속기도 하나니 14 그러나 너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 악한 사람들과 속이는 자들은 더욱 악
그래서 사도 바울은 거짓된 종교에 속아 넘어가고 있는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 복음을 전하는 선교를 위해 일생을 번제물에 쏟아 붓는 포도주처럼 한평생을 다 바친 것입니다.
만일 바울 사도의 그와 같은 헌신이 아니었다면 복음이 오늘 우리에게까지 전해질 수 없었을 것입니다.
바울 사도가 소아시아 선교에서도 최선을 다해 복음을 전한 것처럼 미지의 땅 마게도냐 에서도 열심히 복음을 전하다가 체포되어 매를 맞고 감옥에 갇힐 정도로 변함이 없었습니다. 그것이 빌립보 전도입니다.
바울은 빌립보에서 핍박으로 인해 더 이상 복음을 전할 수 없었기 때문에 데살로니가로 피신하게 되었습니다.
다른 사람 같았으면 빌립보에서 받은 핍박이 너무 컸기 때문에 데살로니가에서는 휴식이라도 가져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잠시도 쉬지않고 유대인의 회당에 들어가서 열심히 복음을 전하여 나름대로 큰 성과를 맺었습니다.
(행 17:4) “그 중의 어떤 사람 곧 경건한 헬라인의 큰 무리와 적지 않은 귀부인도 권함을 받고 바울과 실라를 따르나”
바울은 그 상황을 가리켜 오늘 성경 본문에 ‘고난과 능욕과 많은 싸움’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그 만큼 견디기 어려운 상황이었지만 여전히 복음을 전할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의 강한 의지가 아니라 오늘 성경에 보면 그 ‘하나님을 힘입었기’ 때문이라고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렸습니다.
2 너희가 아는 바와 같이 우리가 먼저 빌립보에서 고난과 능욕을 당하였으나 우리 하나님을 힘입어 많은 싸움 중에 하나님의 복음을 너희에게 전하였노라
이같은 바울의 모습은 오늘 교회 안팎에서 주를 위해서 사소한 일을 하고서도 생색을 내고 자랑하기 좋아하고 때로는 그것을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는다고 삐지고 낙심하는 우리들과는 너무나 큰 차이가 난다는 생각이 듭니다.
오늘 우리도 사도 바울처럼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을 힘입어 해야 하고 무슨 일을 하고 나서도 바울 사도처럼 하나님을 힘입어 했다고 겸손히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데살로니가에서 많은 열매를 맺는 좋은 일만 있었습니까? 아닙니다. 호사다마라고 반기독교적인 유대인들이 조직 폭력배들을 동원하여 바울의 일행에게 테러를 가하였기 때문에 더 이상 복음 전도가 불가능했습니다.
데살로니가에 있는 믿음의 형제들은 바울과 실라를 염려하여 야간에 베뢰아로 떠밀어 보내었기 때문에 부득불 데살로니가를 떠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행 17:10) “밤에 형제들이 곧 바울과 실라를 베뢰아로 보내니 그들이 이르러 유대인의 회당에 들어가니라”
그렇다면 유대인들이 여호와 하나님을 믿으면서 왜 그렇게 바울을 핍박하였을까요? 그 이유는 시기심 때문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행 17:5) “그러나 유대인들은 시기하여 저자의 어떤 불량한 사람들을 데리고 떼를 지어 성을 소동하게 하여 야손의 집에 침입하여 그들을 백성에게 끌어내려고 찾았으나”
이는 종교에 대한 맹목적인 열심히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 하는 것을 단적으로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유대교인들의 그 같은 시기심은 지금 우리 주변에 우후죽순처럼 일어나고 있는 이단들과 별반 차이가 없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그러한 악조건 속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복음전도를 계속한다고 하는 것은 정말 하나님을 힘입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힘입은 전도자 바울과 실라는 어디에 이르든지 가는 곳마다 복음을 전한 것은 하나님께서는 복음 전도자를 지키시고 보호하신다는 것을 굳게 믿었기 때문입니다.
(딤후 1:12) 이로 말미암아 내가 또 이 고난을 받되 부끄러워하지 아니함은 내가 믿는 자를 내가 알고 또한 내가 의탁한 것을 그 날까지 그가 능히 지키실 줄을 확신함이라
여기서 ‘지키실 줄’이라는 말(fulavssw)은 ‘파수하다, 주의하여 지키다, 수호하다, 감옥을 지키다, 보호하다’라는 뜻입니다.
예-박태로 선교사
우리는 기도할 때마다 세계 각처에 파송을 받아 나간 우리 교회의 선교사만 아니라 수 많은 선교사들이 하나님을 힙입어 복음을 전할 때에 하나님께서 함께 하여 주시고 지켜 주시기를 지속적으로 간절히 기도해야 할 책임과 의무가 있습니다.

2. 하나님께 옳게 여기심을 입은 복음 전도
바울 사도는 예수님이 직접 택하시고 부르시고 훈련시킨 열두 제자의 반열에 들어가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그 사도들보다 더 열심히 복음을 전한 까닭이 무엇일까요? 사도 바울은 자신이 복음을 전하는 것은 자신의 의지나, 누가 억지로 시켜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기를 옳게 여기시고 맡겨주신 일이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4 오직 하나님께 옳게 여기심을 입어 복음을 위탁 받았으니
여기서 ‘옳게 여기심’ 이라는 말(dokimavzw)은 ‘시험하다, 조사하다’는 뜻으로 본래 금과 은의 제련하는 것을 뜻하는 말로 시험을 통해서 그 진가를 인정했다는 뜻입니다.
세상에는 사람이 보기에는 옳지만 하나님이 보시기에 옳지 않은 일이 너무나 많습니다. 그것이 인간이 즐겨 행하는 죄입니다.
반면에 사람들이 옳지 않게 여기지만 하나님이 옳게 여기시는 일이 있습니다. 그것이 복음 전도하는 일입니다.
물론 바울도 처음에는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않고 기독교를 핍박했던 사람이었지만 다메섹으로 가는 길목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직접 눈으로 보고 음성을 귀로 들었기 때문에 복음 전하는 일에 생명을 걸게 된 것입니다.
그 후로 바울이 복음을 전하는 일에 올인을 하게 된 것은 자신의 의지가 아니라 다메섹에 길목에서 만나 주님이 직접 이방선교를 명령하셨기 때문입니다.
(행 9:15) “주께서 이르시되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대인들과 이단자들은 사도 바울이 복음을 전하는 일이 마치 옳지 않은 일을 하는 것처럼 바울이 열심히 복음을 전파한 곳을 뒤따라 다니면서 예수를 믿지 못하게 하는 일에 혈안이 되었습니다.
오늘 성경에서 간교한 유대인들은 바울의 일행이 유대인들의 핍박으로 인해 데살로니가를 황급히 떠나서 다시 데살로니가로 돌아오기가 어려운 것을 알고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에게 바울을 모함하는 말을 하였습니다.
3 우리의 권면은 간사함이나 부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속임수로 하는 것도 아니라
당시 순회 설교자들은 보통 자기의 주머니만 채우는 데 관심을 기울여 왔었던 것이 보편화되었기 때문에 바울도 그처럼 전도하며 방황하는 같은 부류로 취급하였던 것입니다.
유대교인들은 바울이 데살로니가에서 불과 세 안식일 동안 복음을 전한 후에 온다 간다는 말도 없이 밤중에 사라진 이유가 바로 바울의 간사함과 부정함과 속임수가 드러났기 때문에 도망친 것이라고 사람들에게 매도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바울에 대한 신뢰를 깨뜨리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래야만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의 바울을 불신하고 바울이 전해준 복음을 믿지 않게 만들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처럼 이단자들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바울을 모함하였고 또한 일부가 미혹을 받기도 한다는 소식을 듣게 되자 당장 쫓아가서 해명할 수 없었기 때문에 바울은 데살로니가 성도들에게 급히 편지를 쓰게 된 것이 바로 오늘 데살로니가 성경입니다.

사단의 그와 같은 전술은 오늘도 변하지 않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마귀가 노리는 아주 치명적인 틈새가 있는데 병도 재산의 손실도 아닙니다. 복음의 말씀을 전하는 교역자와의 신뢰를 깨뜨려서 말씀을 듣지 못하게 하고 교회에 대한 회의와 갈등을 갖도록 부채질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야만 말씀을 들어도 은혜가 되지 못하게 하여 그 영혼을 고사시키고 교회를 시끄럽게 하는 분쟁의 도구로 사용하려는 고도의 전술인 것입니다.
그 결과 교회에 대한 회의와 환멸을 갖게 만들기만 하면 제 아무리 누가 그 사람을 억지로 붙잡는다고 해도 결국은 교회를 떠나게 되고 심지어는 타종교로 개종하는 일도 마다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러한 시험에 들지 않도록 기도해야 하고 만일 의혹이 있거든 풀어야 하고 불편한 상태에서 계속 교회를 다니는 것이 결과적으로 내 영혼을 병들게 하는 사단의 전술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그와 같은 시험에 들지 않도록 마음에 마귀가 비집고 들어갈 틈을 보이지 말아야 합니다.
(엡 6:11) “마귀의 간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입으라”

3.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복음전도
우리의 신앙이 유치한 어린아이와 같을 때는 하나님을 믿는 목적이 나를 기쁘게 하기 위한 것이기 때문에 기도조차 몽땅 다 나의 소원과 요구가 대부분입니다.
그러나 신앙이 점점 자라서 성숙하게 되면 마치 철이 든 자식처럼 마음에 변화가 일어나게 됩니다.
그 결과 할 수만 있으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게 되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고민하게 되고, 할 수만 있으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을 위해 살아가려고 몸부림을 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도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는 기도로 바뀌어지게 됩니다.
(롬 12:2)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그러므로 일을 잘하고 못하고 많이 하고 적게 하고 열심히 하고 못하고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나는 이 일을 나도 다른 사람도 아닌 하나님만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서 하겠다는 바울 사도와 같은 마음을 하나님께 구해야 합니다.
(엡 6:6) 눈가림만 하여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처럼 하지 말고 그리스도의 종들처럼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오늘 성경이 가르치고 있습니다, 복음 전도는 결코 사람을 기쁘게 하는 일을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이기 때문에 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속일 수 없습니다. 마음을 꿰뚫어 보시는 하나님은 우리가 무슨 일을 하든지 어떠한 목적과 동기를 가지고 하는지를 다 알고 계시는 분입니다.
(왕상 8:39) 주는 계신 곳 하늘에서 들으시고 사하시며 각 사람의 마음을 아시오니 그들의 모든 행위대로 행하사 갚으시옵소서 주만 홀로 사람의 마음을 다 아심이니이다
바울 일행이 복음을 담대히 말한 이유는 또한 그들이 하나님의 인정을 받아 복음 전할 부탁을 받은 대로 사람을 기쁘게 하지 않고 그들의 마음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 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4 우리가 이와 같이 말함은 사람을 기쁘게 하려 함이 아니요 오직 우리 마음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 함이라
여기서 ‘감찰하시는’이라는 말(dokimavzw)은 ‘시험하다, 조사하다, 인정하다, 꿰뚫어 보다’는 뜻입니다.
만일 바울이 복음 전하는 일이 핍박으로 인해 고통만을 받았다면 그 일을 평생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이 핍박 중에서도 복음을 전한 것은 그 일이 사람을 기쁘시게 하는 일이 아니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농부가 땅에 씨를 뿌리고 그것을 가꾸는 일은 결코 기쁘고 즐거운 일이 아니라 힘들고 어려운 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농부가 마다하지 않고 씨를 뿌리고 곡식을 가꾸는 일을 계속하는 까닭은 늦가을에 그것을 거두는 기쁨을 알기 때문에 힘들고 어려워도 묵묵히 수고하는 것입니다.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 보시는 하나님께서 가장 기뻐하시는 일이 복음을 전하는 일이기 때문에 때로는 사람들로부터 오해와 모함을 받고, 때로는 매를 맞고 감옥에 갇히는 수난을 당한다고 할지라도 복음 전하는 일을 포기할 수 없는 까닭은 하나님이 그 일을 가장 기뻐하시기 때문입니다.
만일 사람을 기쁘게 하려 했다면 환난 중에 무슨 말을 할 수 있었겠는가? 그러나 그들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 하였기 때문에 환난 중에도 낙심치 않고 하나님의 원하시는 바를 담대히, 가감 없이, 자유로이 전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일하는 복음 사역자들은 현실의 악한 환경을 거슬려 담대히 일할 수 있습니다.
물론 복음 전도 사역이 바울 자신에게는 육신적으로 아무런 유익을 주지 못하고 오히려 고통만을 가중시키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개의치 않고 계속하는 이유는 그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하나님은 모든 사람의 마음을 감찰하시므로 우리가 무슨 마음을 품고 교회를 다니고 어떤 마음의 자세로 교회를 섬기는 지를 마음을 꿰뚫어 보시는 동일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결 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오늘 성경에서 바울은 그처럼 마음 아픈 상황을 어떤 자세로 극복을 하였는지 배워야만 우리도 어떤 상황에서도 변함없이 주를 섬길 수 있습니다.
성경이 이미 경고한 것처럼 세상에 지식이나 경제나 과학이 갈수록 진보하는데 비해 도덕과 윤리와 신앙은 정반대로 점점 더 약화되고 변질되고 퇴색되어가는 것처럼 생각됩니다.
아무리 돌아보아도 온통 세상이 거짓이 난무하고 불의가 판을 치는 것처럼 보인다고 할지라도 거짓된 일과 거짓 종교에 무릎을 꿇지 말고 마음을 꿰뚫어 보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믿음의 성도가 되겠다고 굳게 다짐하는 진실된 성도들이 되기 위해 다니엘처럼 감사의 기도를 중단하지 않은 성도들이 다 되어야 합니다.
(단 6:10) “다니엘이 이 조서에 왕의 도장이 찍힌 것을 알고도 자기 집에 돌아가서는 윗방에 올라가 예루살렘으로 향한 창문을 열고 전에 하던 대로 하루 세 번씩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그의 하나님께 감사하였더라”
감사와 순종과 믿음으로 2013년을 시작하면서 오늘 우리도 특별히 교회를 섬기고 성도들을 섬기고 이웃을 섬길 때에 오늘 성경에 사도 바울처럼
1) 하나님을 힘입어야 합니다.
2) 하나님의 옳게 여기심을 받아야 합니다.
3) 하나님만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물론 거짓이 난무하는 세상에서 믿음으로 살고 말씀대로 살고 복음을 전하는 삶을 산다고 하는 것이 말처럼 쉽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때로는 실망스럽기도 하고 때로는 주변 사라들에게 상처를 받아서 마음이 상할 때가 있을지라도 실망하지 말고 우리의 마음을 꿰뚫어 보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생각,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을 더욱 열심히 하기로 다짐하고 기도해야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