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 교/이규왕목사

참 감사한 교회 /(살전 1:1-4)

미션(cmc) 2013. 1. 16. 19:24

참 감사한 교회
(살전 1:1-4)

(살전 1) “1 바울과 실루아노와 디모데는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데살로니가인의 교회에 편지하노니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2 우리가 너희 모두로 말미암아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며 기도할 때에 너희를 기억함은 3 너희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를 우리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끊임없이 기억함이니 4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은 형제들아 너희를 택하심을 아노라

감사와 순종과 믿음으로 새해를 열었습니다. 구약의 욥기를 끝내고 순서를 따라 오늘부터 매주 데살로니가서를 강해하려고 합니다.
오늘은 맨 처음시간 살전 1장의 상반부를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깨우쳐 주시고자 하는 진리의 말씀이 무엇인지 저는 기도하고 말씀을 연구하는 가운데 찾아내고, 우리 성도들은 그 말씀을 사람의 말로 받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을 때 우리 교회도 데살로니가 교회처럼 하나님 앞에 참 감사한 교회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데살로니가 교회는 왜 하나님 앞에서 참 감사한 교회가 되었는지 오늘 성경 말씀을 통해서 기도하는 마음으로 말씀을 전하고 말씀을 듣는 중에 전하는 자와 듣는 자가 함께 은혜를 받고자 합니다.

사도행전을 보면 바울이 선교 여행 중 자기가 가려고 목적했던 것과 달리 성령께서 강권적으로 발걸음을 유럽 쪽으로 돌이키게 하신 적이 있습니다.
그것도 전도가 잘 안되기 때문이 아니라 나름대로 잘되고 있었는데도 성령께서 바울의 일행에게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셨다고 하였는데 과연 그 이유가 무엇 때문인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행 16:5) 이에 여러 교회가 믿음이 더 굳건해지고 수가 날마다 늘어가니라
여기서 ‘굳어지고’라는 말(stereovw)은 ‘견고하다, 강하게 하다’ 라는 뜻의 미완료 이고, ‘날마다 늘어가니라’는 말(perisseuvw)은 ‘넘치다, 풍성하다’는 뜻의 미완료로 매주가 아니라 날마다 계속 늘어가는 상태를 뜻합니다.
너무나 고무적이지 않습니까? 전도는 물론 타문화권에 가서 선교한다는 일이 그렇게 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며, 하나님의 도우심이 없이 사람의 노력만으로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바울 선교단 일행의 발걸음을 더 이상 아시아에 머물게 하지 않고 강권적으로 유럽 쪽으로 돌이키게 하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행 16:9) 밤에 환상이 바울에게 보이니 마게도냐 사람 하나가 서서 그에게 청하여 이르되 마게도냐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 하거늘
물론 바울의 일행에게 마게도냐는 생소한 지역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곳에서 바울의 도움을 요청하는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과연 어떤 사람들이 바울의 일행을 기다리고 있었을까요?

1) 빌립보 사람들
바울의 일행이 더 이상 아시아에서 선교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셨을 뿐 아니라 마게도냐 사람들이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는 환상만을 보고 마게도냐로 건너 갔을 때 바울을 기다리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바울의 일행은 밤에 환상만을 보고 마게도냐로 건너가기 위해 드로아에서 배를 타고 사모드라게로 직행하여 네압볼리를 거쳐서 빌립보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물론 성령께서 인도하신 발걸음이라면 빌립보에서 누군가 바울의 일행을 맞을 준비를 하고 기다리고 있어야 하는데 아무도 반기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바울이 이전에 소아시아에서 복음을 전할 때 는 가는 곳마다 유대인들이 모이는 회당이 있었기 때문에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접촉점이 있었으나 빌립보에서는 전혀 없었기 때문에 막연하기만 하였습니다.
겨우 안식일에 기도할 곳을 찾자가 성문밖 강가에 나가 거기 앉아서 모인 여자들을 만난 것이 두아디라 시에서 자색 옷감 장사를 하는 루디아라는 여자를 만난 것이 계기가 되어 전도하여 그의 집에 가서 가족들에게 세례를 베풀면서 탄력을 받게 되었습니다.
바울의 일행은 전도 대상자를 물색하기 위해 기도하는 곳에 가다가 점치는 귀신 들린 여종을 만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었을 때 더 이상 점을 쳐서 돈을 벌 수 없게 되자 그 여인의 주인이 바울의 일행을 고소를 해서 감옥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그 때문에 바울과 실라는 많은 매를 맞고 두 발에 차꼬로 채운 채 감옥에서 갇혔으면서 한 밤중에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송할 때 갑자기 큰 지진이 나서 옥터가 움직이고 감옥 문이 열리고 매인 것이 풀어지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탈옥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도망치지 않았을 때 바울의 일행이 탈옥한 줄 알고 책임을 느낀 간수가 자결을 하려하지 이를 본 바울이 ‘네 몸을 상하지 말라 우리가 다 여기 있노라’ 크게 소리를 질렀습니다.
그 때문에 감동을 받은 간수가 바울을 그의 가정으로 모시고 가서 그의 가족들에게 복음을 전하였을 때 그와 온 가족이 다 예수를 믿고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로 말미암아 복음의 불모지였던 빌립보 지방에 두 가정이 온전히 구원을 받는 기적이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행 16:34) 그들을 데리고 자기 집에 올라가서 음식을 차려 주고 그와 온 집안이 하나님을 믿으므로 크게 기뻐하니라
우리가 생각할 때는 고작 두 가정인가? 라고 소홀히 생각하기 쉽지만 실제로 선교를 하는 사람들에게는 타문화권 사람들을 만나서 단시일에 두 가정을 구원시킨다고 하는 것은 기적이 일어나지 않고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고 수년이 걸려야만 가능한 일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왜 바울의 일행을 아시아에서 강권적으로 돌이켜 빌립보에서 그런 역사를 하게 하셨을까요?
그것은 그 두 가정이 기초가 되어 빌립보지방에 교회가 세워지고 더 나아가서 유럽 선교의 전초기지가 되게 하기 위한 놀라운 계획이 있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다가 아니었습니다. 바울의 일행이 루디아와 간수의 두 가정을 발판으로 얼마든지 빌립보에 정착하여 더 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그들을 아시아에서 마게도냐로 부르신 이유는 그 것이 전부가 아니었기 때문에 바울의 일행을 강권적으로 빌립보에서 떠나게 하셨습니다.
그것은 바울이 로마시민권자인 것을 모르고 매질을 하고 감옥에 가두었던 빌립보 지방의 관리들이 상관에게 보고 하였을 때 후환이 두려워서 강제로 바울의 일행에게 빌립보를 떠날 것을 청하였기 때문입니다.
(행 16:38) 부하들이 이 말을 상관들에게 보고하니 그들이 로마 사람이라 하는 말을 듣고 두려워하여 39 와서 권하여 데리고 나가 그 성에서 떠나기를 청하니 40 두 사람이 옥에서 나와 루디아의 집에 들어가서 형제들을 만나 보고 위로하고 가니라”

2) 데살로니가 사람들
빌립보를 부득불 떠난 바울의 일행은 암비볼리와 아볼로니아를 거쳐서 발걸음이 머문 곳이 데살로니가였습니다.
데살로니가는 마게도니아 지방에서 가장 큰 도시였고, 수도이기도 했습니다. 아름다운 항구와 더불어 썩 잘 어울리는 도시로 무역의 천연적인 관문으로 번영의 요지였습니다.
빌립보에는 기도처가 단 한곳에 있었을 뿐이나, 데살로니가의 거민들 안에는 강력한 유대인 사회가 자리 잡고 있어서 유대인들의 회당이 있었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회당 중심의 바울 선교 방식으로 볼 때 데살로니가는 바울의 관심을 끌 만한 모든 것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빌립보를 떠나 데살로니가에 당도한 후 곧장 회당에 들어가서 “세 안식일”에 거기서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행 17:1-2) “1 그들이 암비볼리와 아볼로니아로 다녀가 데살로니가에 이르니 거기 유대인의 회당이 있는지라 2 바울이 자기의 관례대로 그들에게로 들어가서 세 안식일에 성경을 가지고 강론하며
비로소 바울의 일행은 회당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셨는지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을 마음껏 전하여 듣는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구세주가 된다는 순수한 복음을 자유롭게 전할 수 있었습니다.
바울의 전도는 극히 성공적이었습니다. 데살로니가 회당에 모여서 바울이 전한 복음을 들은 사람들 중에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기로 결심을 하고 바울과 실라를 따르는 큰 성과가 있었습니다.
(행 17: 4) 그 중의 어떤 사람 곧 경건한 헬라인의 큰 무리와 적지 않은 귀부인도 권함을 받고 바울과 실라를 따르나
데살로니가에서는 빌립보에서처럼 무슨 기적이 일어난 것도 아닙니다. 불과 세 안식일에만 복음을 전하였을 뿐인데 어떻게 이런 성과가 있게 되었는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오늘 성경에 보면 그 원인을 밝히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의 일행은 얼마나 기뻤을까요? 얼마나 감사했을까요? 빌립보에서도 열매가 있었지만 데살로니가에서는 그 보다 더 많은 열매를 맺었으니 말입니다.
더구나 데살로니가는 전략적으로 유럽 선교에 거점이 될 수 있는 좋은 조건들을 골고루 다 갖추고 있었으니 말입니다.
아마도 바울의 일행은 “아하! 이런 성과를 위해서 성령께서 우리를 이곳에 오게 하셨구나” 라는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요?
그러나 그 기쁨도 잠시 일 뿐 그것을 시기한 유대인들이 폭력배를 동원하여 바울의 일행만이 아니라 바울이 머물고 있는 야손과 그의 형제들까지 당국에 반국가 사범죄로 고소를 하였습니다.
(행 17:7,8) 야손이 그들을 맞아 들였도다 이 사람들이 다 가이사의 명을 거역하여 말하되 다른 임금 곧 예수라 하는 이가 있다 하더이다 하니 무리와 읍장들이 이 말을 듣고 소동하여
바울의 일행은 부득불 데살로니가를 떠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데살로니가 지방은 그처럼 잠깐 머물다가 떠난 곳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대부분은 데살로니가는 마치 자갈밭에 뿌린 씨처럼 잠깐 싹이 났다가 말라 죽을 수밖에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후일에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회에 쓴 편지인 오늘 성경 말씀을 보니 자갈밭이 아니라 옥토에 뿌린 씨처럼 크게 번성하였음을 보고 크게 감사하였습니다.
바울이 빌립보 교회에 대해서는 (빌 1:3) “내가 너희를 생각할 때마다 나의 하나님께 감사하며” 라고 했으나, 오늘 성경에 데살로니가 교회에 대해서는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며’라고 하였습니다.
(살전 1:2) 우리가 너희 모두로 말미암아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며 기도할 때에 너희를 기억함은
여기서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며’ (Eujcaristou'men)는 현재 능동태로 ‘두고두고 감사하는 것’을 뜻합니다. 또 “항상”이란 말은 ‘감사한다’는 말을 수식하는 것으로 감사가 부단히 계속되는 것이지 이따금씩 행해지는 것이 아님을 뜻합니다

3. 데살로니가 교회에 대한 감사
우리는 오늘 성경 본문에서 무엇 때문에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회에 대해서는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였는지 그 이유를 오늘 성경이 가르치고 있는데 감사의 조건이 삼중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살전 1:3,4) 너희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를 우리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끊임없이 기억함이니

첫째, 믿음의 역사가 있는 교회였기에 하나님께 항상 감사하였습니다.
여기서 믿음의 역사라는 말은 “믿음 가운데서 우러나온 선한 행위”란 뜻입니다. 데살로니가 교회는 믿음이 뿌리내리기에는 너무나 짧은 기간 복음을 전하였을 뿐인데도 그 믿음이 마침내 싹이 나서 선한 역사를 하게 하였다는 말입니다.
물론 사도 바울은 평소에 사람의 구원이 행위가 아니라 믿음임을 매우 강조하였습니다.
(엡 2:8)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그러나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회를 생각할 때마다 감사할 수 밖에 없게 한 ‘믿음의 역사’라는 말은 믿음은 살아 계신 구세주를 인격적으로 뜨겁게 신뢰하는 것으로, 그러한 믿음은 결국 삶 전체를 변화시키지 않을 수 없고, 많은 종류의 선한 역사를 발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약 2:22)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하게 되었느니라
오늘 우리 교회도 하나님께 감사할 것이 많은 교회가 되기 위해서는 오늘 우리 성도들이 입으로만 믿지 말고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처럼 선한 역사가 동반되는 온전한 믿음의 성도들이 되어야 합니다.
정말 우리들이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는다면 2013년 교회와 가정과 직장에서 내가 하는 일이 죄가 아니라면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선한 일이라는 믿음으로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그래서 얼마나 많고, 좋고 가 아니라, 내게 맡기신 일에 최선을 다해 성실하게 일하는 성도들이 모인 교회가 될 때 데살로니가 교회처럼 참 감사한 교회가 될 수 있습니다.
(고전 15:58)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라

둘째, 사랑의 수고가 있는 교회였기에 하나님께 항상 감사하였습니다.
데살로니가 교회에 ‘사랑의 수고’가 있었습니다. 사랑은 자기희생적 수고 없이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여기서 ‘수고’라는 말(kovpo")은 믿음의 역사라는 말보다 더 고되고 고통스러운 일을 뜻합니다.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병자와 굶주린 자를 돕기위해 자선을 행하였으며, 모진 박해에도 불구하고 복음을 전파하는 일에 열성적 헌신을 다 하였습니다(Hendriksen).
인간은 누구나 사랑 받기를 원합니다. 그러한 인간이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위해 사랑한다고 하는 것은 자기희생이 없이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나 부모가 자식을 위해 희생하는 것처럼 사랑에는 수고가 동반되지만 결코 짐이 되지 않습니다.
사랑은 그것을 행하는 사람에게 엄청난 희생과 수고를 요구하지만 결코 그것은 그 사람을 고통스럽게 하거나 그 사람으로 하여금 낙심케 하지는 않고 오히려 수고하는 것만큼 보람과 기쁨을 느끼게 하는 사랑입니다.
물론 교회안에서 그렇게 희생적인 사랑을 한다는 것이 말처럼 쉬운일 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사가 짧은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이 그렇게 사랑의 수고를 하고 있다는 소식을 바울이 들었기 때문에 하나님께 항상 감사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랑 받기를 좋아하는 이기적인 인간이 어떻게 사랑의 수고를 할 수 있을까요? 그것은 사랑의 근원이신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그 사랑이 바로 하나님이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시고 십자가에 달려 죽게 하심으로 우리에게 나타내신 희생적인 사랑입니다.
(롬 5: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그처럼 사랑하셨기에 우리를 위해 기꺼이 십자가를 지시는 자기희생과 수고를 기쁘게 여기신 것입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우리도 하나님의 사랑을 진정으로 깨달은 사람은 데살로니가 교회처럼 사랑의 수고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진정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형제나 교우나 이웃을 사랑한다면 설령 수고가 된다고 할지라도 기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셋째, 소망의 인내가 있는 교회였기에 하나님께 항상 감사하였습니다.
여기서 소망의 ‘인내’라는 말(uJpomonh)은 ‘견고하다, 확고부동하다, 기다리다’는 뜻으로 용감한 군인이 극한 상황에서도 꿋꿋하게 버텨나가는 기상(氣像)을 의미한다고 하였습니다(Findlay).
또 유명한 주석가 윌리엄 바클레이(William Barclay)는 “인내는 단순히 체념으로서가 아니라 강렬한 소망을 가지고 참아낼 수 있는 정신을 말한다”라고 하였습니다.
데살로니가 교회의 성도들은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궁극적인 승리의 날을 바라보는 소망을 가지고 있었다. 이처럼 그리스도의 재림을 소망하는 자들은 현실 속에서 어떠한 어려움이 닥쳐온다 해도 그것을 극복할 수 있는 인내를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데살로니가 지방에 유대인들이 얼마나 악랄한지를 이미 경험한 바울 사도는 그러한 곳에서도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이 믿음이 흔들리지 않고 견고하게 서 있을 수 있었던 것은 그들에게 확고부동한 소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소망은 데살로니가 전 후서 곳곳에 강조되고 있는 예수님의 재림에 대한 말씀들을 종합할 때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더불어 천국의 소망입니다.
그와 같은 소망이 없이는 예수를 믿기 때문에 세상에서 당해야 하는 불이익과 고난을 이겨낼 수 있는 명분이 없는 것입니다. 무엇 때문에 단 한번 뿐인 인생을 예수 믿는다는 이유 때문에 온갖 고난을 참아내야 합니까?
그러나 심판주로 오시는 주님의 재림과 하늘나라에 약속된 상급과 기업에 대한 소망은 그와 같은 고난이 크면 클수록 더욱 큰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도란 이미 이천년 전에 세상에 오신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믿을 뿐 아니라 다시 심판주로 오실 재림의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그와 같은 천국의 소망을 확고하게 가지고 있을 때만이 믿음의 능력으로 서로 사랑하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한 성도에게는 비록 세상에서 고난을 당한다고 할지라도 그리스도의 재림의 때에 온전한 구원과 천국에 소망이 있기 때문에 인내할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비록 현실이 어려워도 미래에 소망이 있는 자는 절대 절망하지 않습니다. 그 소망 때문에 현재의 모든 어려움을 견뎌 낼 수 있는 힘이 있습니다.
(잠 14:32) 악인은 그의 환난에 엎드러져도 의인은 그의 죽음에도 소망이 있느니라(딛 2:13) 복스러운 소망과 우리의 크신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심을 기다리게 하셨으니
사도 바울은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어느 개인이나 교회를 막론하고 이 세 가지의 균형을 항상 유지하고 있기는 쉽지 않습니다.
물론 그 이유가 나름대로 있습니다. 그 중에 가장 큰 이유는 주변 환경이나 여건이 어렵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데살로니가 교회는 어느 교회보다 주변환경이 좋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 세가지가 항상 갖추어진 교회였기 때문에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를 더욱 사랑하고, 항상 기억하고, 항상 기도하고, 기도할 때마다 감사할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살전 1:3,4) 너희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를 우리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끊임없이 기억함이니
여기서 ‘끊임없이 기억함이니’라는 말( mnhmoneuvonte")은 동분사 현재 능동형으로 한시도 쉬지않고 계속해서 기억하고 있는 현재 진행형입니다.

우리는 이와 같은 데살로니가 교회의 아름다운 신앙의 모습을 통해서 2013년 우리의 신앙의 목표를 어떻게 설정하고 나아가야 할까요?
우리의 신앙생활에 있어서 데살로니가 교회처럼 하나님께 참 감사하는 교회가 되기 위해서 가장 기본이 되는 믿음은
1) 마치 살아있는 나무의 굵은 줄기처럼 수직적으로 하나님을 향한 것이지만, 그와 같은 믿음은 반드시 가지와 같이 수평적으로 이웃을 향해 사랑의 역사로 뻗어나가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이고 또한 소망의 인내인 것입니다.

2) 소망의 인내라고 하는 것이 죽어봐야 알 수 있는 막연한 미래에 대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주님의 재림에 대한 확고한 소망을 가지고 있을 때 비록 현실여건이 좋지 않을지라도 우리의 믿음이 나약해지거나 사랑이 식어지지 않도록 그 소망이 우리의 믿음을 붙잡아 주는 강력한 힘이 되는 것입니다.
만일 주님의 재림이나 천국에 대한 소망이 없는 믿음이라면 결코 이 땅에서 믿음 때문에 감당해야 하는 수고나 고난을 묵묵히 감사하면서 인내할 수 없게 됩니다.
물론 이론적으로는 믿음의 역사, 사랑의 수고, 소망의 인내라고 세 가지로 분리하였지만 실제로는 분리될 수 없는 상호 통합적이고 유기적인 관계인 것입니다.
칼빈이 ‘믿음과 사랑과 소망은 참된 기독교에 대한 간략한 정의’라고 한 것처럼 ‘믿음과 사랑과 소망’ 이 세 가지는 참 감사할 것이 많은 모범적인 교회의 삼대 조건이라고 해도 좋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이론이 좋아도 그것이 실천으로 옮겨져야만 변화가 일어나는 법입니다. 그렇다면 데살로니가 교회가 그렇게 짧은 역사와 어려운 주변 여건에도 불구하고 이처럼 하나님 아버지께 항상 감사할 수 있는 세 가지 조건 즉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소망의 인내를 다 갖춘 이상적인 교회로 성장하였다는 것은 역사가 오랜 교회도 쉽지 않은 일입니다, 과연 그 비결이 무엇일까요?
그 답이 바로 (살전 1:1) “ 바울과 실루아노와 디모데는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데살로니가인의 교회에 편지하노니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라는 말씀처럼 데살로니가 교회가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교회였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교회는 두가지 주소가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는 땅에 주소입니다. 수원시 팔달구 지동 286번지가 주소입니다. 그 주소는 주변 환경 여건에 따라 좋을 수 도 있고 않 좋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참 감사할 것이 많은 교회의 영적인 주소는 데살로니가 교회와 똑같이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할 때 그 교회는 데살로니가 교회처럼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소망의 인내가 항상 균형을 이룬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그 교회는 자연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교회요, 말씀에 견고하게 뿌리를 박은 교회요, 날마다 성령이 새롭게 하시는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와 같은 교회가 하나님의 사랑하심과 택하심을 받은 참 감사한 교회인 것입니다.
(살전 1:4)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은 형제들아 너희를 택하심을 아노라

결 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바울은 위대한 사도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항상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는 기도의 사람이었습니다.
자신의 처지는 아무것도 감사할 것이 없는 사람이었으나 하나님의 사랑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사랑하는 교회들을 생각할 때 감사할 것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누가 행복한 사람입니까? 누가 감사할 것이 많은 성도 입니까?
하나님께 감사하는 사람은 자신의 부족함을 인식하고 겸손히 기도로 하나님을 의지하는 믿음의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기도는 자신의 연약함을 인정하게 하고 겸손히 무릎 꿇게 합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자신의 무능을 인정하며 오직 더 크신 분 곧 능력의 하나님을 의지하여 먼저 그분의 도우심을 구하게 마련입니다.
(골 4:2) 기도를 계속하고 기도에 감사함으로 깨어 있으라
그렇습니다. 감사는 기도함으로써 느끼는 것이고, 기도는 감사의 기쁨에 기초하는 것입니다. 나만이 아니라 바울처럼 교회를 위해서 기도하고 나라와 민족을 위해서 기도하고 남을 위해서 기도할 때 우리는 반드시 감사할 수 있으며 순간마다 감사할 때 더욱 간절히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습니다.
2013년은 바울 사도처럼 데살로니가 교회처럼 감사할 것이 많은 교회와 성도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빌 4:6)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