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 교/이규왕목사

우리들과 함께 계시려고/(요 1:14-16)

미션(cmc) 2012. 12. 23. 07:12

우리들과 함께 계시려고
(요 1:14-16)

(요 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요 1:15) 요한이 그에 대하여 증언하여 외쳐 이르되 내가 전에 말하기를 내 뒤에 오시는 이가 나보다 앞선 것은 나보다 먼저 계심이라 한 것이 이 사람을 가리킴이라 하니
라 (요 1:16)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 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러라

성탄절이 불과 열흘도 채 남지 않았습니다. 성탄절에 숨겨진 영적 의미를 찾아보는 시간으로 오늘은 성경 본문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왜 이 세상에 오셨는지? 그 깊은 뜻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가 이 세상에 오시기 전에는 어떤 분이었나? 하는 것이 궁금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생애를 기록한 복음서 가운데 공관복음이라고 일컫는 마, 막, 눅, 요 복음서를 읽게 되면 예수님이 태어나심에서 죽으심까지가 기록되어있는데 예수님이
1) 언제 어디서 태어나 자라나셨으며,
2) 공생에 기간에 무슨 말씀과 어떤 일들을 하셨으며,
3) 십자가에 달리시기까지 무슨 일을 하셨으며,
4) 어떻게 죽으시고 무덤에서 부활하셨으며,
5) 부활하신 후 사십일 동안 무엇을 하셨으며,
6) 승천하시면서 무엇을 당부하셨는지에 대해서,
마치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손으로 만지는 것처럼 인간의 육신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신 예수님의 행적을 사실적으로 기록해 놓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열두 제자 중에 한 사람인 사도요한은 요한복음을 통해 예수님이 곧 하나님이심을 기록하고 있는데 그 대표적인 말씀이 바로 오늘 성경 본문인 요한복음 1장 입니다.
(요 1:1)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여기서 ‘말씀’이란 단순한 소리나 글자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호칭하는 말입니다. 그 이유는 창세기 1장에서 하나님이 천지와 만물을 창조하실 때 크레인이나 포클레인을 사용하시지 않고 오로지 말씀만으로 창조하셨습니다.
세상을 창조하신 그 말씀이 무슨 소리나 글이 아니라 (요 1:1)하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고 하신 것처럼, 이 세상은 우연이나 저절로가 아니라 ‘말씀’이신 하나님에 의해 창조되었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요 1:3)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물론 여기서 만물을 지으신 ‘그’는 태초부터 하나님과 함께 계신 ‘말씀’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세상 모든 만물을 그 ‘말씀’이 지으셨다는 것입니다.
그 만물이 바로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지구, 그 지구가 속한 태양계, 그 태양계와 같은 행성들이 무수히 더 많은 우주까지도 그 말씀이 지으셨다는 것입니다.
창세기에 보면 하나님이 창조하시기 전의 세상은 온통 어두움 뿐 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태초에 말씀이 그와 같은 어두움을 물리치고 아름다운 세상을 지으실 수 있었던 것은 그 말씀안에 생명이 있고 그 생명이 빛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요 1:4)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그렇습니다. 어두움을 빛을 창조할 수 없으며, 생명이 없는 죽음은 생명을 창조할 수 없고, 선은 죄에서 나올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태초에 그 말씀이 우주 만물을 만드셨다면 그 ‘말씀’이 얼마나 ‘지혜와 능력과 권세’가 많으신가? 하는 것은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그렇게 위대한 ‘말씀’이 바로 이 세상에 오시기 전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과연 그러한 예수님을 세상에 석가모니, 공자, 마호멧, 소크라테스 등 어느 누구와 비교를 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그러한 위대한 분이 무엇이 답답하고, 무엇이 부족하여, 굳이 어두움과 죄악이 가득한 이 세상에 오실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태초에 만물을 만드시고, 어두움을 물리치신 참 빛이요, 생명의 근원이신 말씀이 당신이 지으신 세상, 그러나 죄악으로 말미암아 어두움과 죽음에 처한 세상에 오신 이유가 무엇 때문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성탄하신 이유입니다.
그 이유를 오늘 성경에서 크게 두 가지로 말씀하고 있는데, 첫째는 어두움에 처한 각 사람에게 비치는 빛이 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요 1:9)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
둘째는 그를 영접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기 위함이었습니다.
(요 1: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그렇다면 이 세상 사람은 당연히 그 빛이요 생명이요 만물의 창조자이신 ‘말씀’ 오시는 것을 환영하고 반갑게 영접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세상에 전혀 그 분의 오심을 깨닫지 못했고, 또 환영하지도 않았으며, 오히려 죽이려고 하였음을 첫 성탄에 어떤 일이 있었는가? 하는 것을 기억하게 되면 잘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마 2:16) 이에 헤롯이 박사들에게 속은 줄 알고 심히 노하여 사람을 보내어 베들레헴과 그 모든 지경 안에 있는 사내아이를 박사들에게 자세히 알아본 그 때를 기준하여 두 살부터 그 아래로 다 죽이니
과연 그 이유가 무엇 때문인지를 오늘 성경에 가르치고 있는 것처럼 죄악으로 말미암은 영적인 무지 때문이었습니다.
(요 1:5)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
하나님은 그와 같이 영적으로 무지한 인간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이 세상에 오시기 위한 방편이 무엇이었는가? 하는 것을 오늘 성경 본문이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요 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여기서 ‘말씀’은 천지와 만물을 지으신 ‘신성’을 가리키는 것이고, ‘육신’이 되어는 우리와 똑같은 ‘인성’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성품과 더불어 연약한 인간의 성품을 아울러 가지고 오신 분이라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와 같은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고 또한 영접하지도 못하는 인생들을 돕게 하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보다 먼저 이 세상에 태어나게 하신 사람이 바로 세례 요한인 것입니다.
세례 요한의 사명은 마치 옛날 왕국 시대에 왕이 행차할 때 먼저 선발대를 보내어 왕의 오심을 미리 알리어 왕을 맞을 준비를 하게 하는 전령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신성과 인성을 아울러 가지고 이 세상에 오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을 미리 선포하는 광야의 소리였고, 사람들에게 회개의 세례를 베풀어 정결한 마음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게 하는 사명이었습니다.
(요 1:15) 요한이 그에 대하여 증언하여 외쳐 이르되 내가 전에 말하기를 내 뒤에 오시는 이가 나보다 앞선 것은 나보다 먼저 계심이라 한 것이 이 사람을 가리킴이라 하니라
그렇기 때문에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기만 하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라는 은혜 위에 은혜를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와 똑같은 육신을 입은 인성이라는 두터운 커튼에 가려진 예수님은 우리와 다름이 없이 연약한 분처럼 보이지만, 간간이 그 커튼이 열려진 틈으로 드러난 찬란한 신성이라는 빛을 보게 되면 하나님의 영광과 은혜와 진리가 충만한 분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복음서 여러 곳에서 예수께서 공생애 기간 동안 사역을 통해 나타내 보여주신 놀랍고 신비한 기적과 은혜와 진리가 충만한 가르치심들입니다.
(요 2:11) 예수께서 이 첫 표적을 갈릴리 가나에서 행하여 그의 영광을 나타내시매 제자들이 그를 믿으니라
사람들은 겉보기에는 자기들과 조금도 다름이 없는 나사렛 예수로만 알았으나 “하나님의 영광과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신 주님의 가르침에 놀랄 수밖에 없었습니다.
(눅 4:22) 그들이 다 그를 증언하고 그 입으로 나오는 바 은혜로운 말을 놀랍게 여겨 이르되 이 사람이 요셉의 아들이 아니냐
여기서 ‘놀랍게’라는 말(qaumavzw)은 경이로운 모습에 놀라는 것을 묘사하는 미완료 동사로 사람들이 계속해서 놀라고 있는 모습입니다.
그것만이 아닙니다. 예수께서 배를 삼킬 것처럼 몰려오는 바람과 파도를 잔잔하게 하시는 모습에 제자들이 심히 놀라 두려워하였습니다.
(막 4:41) 저희가 심히 두려워하여 서로 말하되 저가 뉘기에 바람과 바다라도 순종하는고 하였더라
또 심히 ’두려워’라는 말(fobevw)은 ‘무서워하다, 놀라다, 공경하다’라는 뜻으로 사람들이 예수님에 대해서 새롭게 인식하게 되었음을 뜻하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그와 같은 지혜와 능력을 가지신 분이 무엇 때문에 인간들이 아귀다툼하는 죄악된 세상에 친히 오실 이유가 없지 않는가? 하는 것입니다.
만약에 꼭 하실 일이 있으시다면 하늘나라의 군대와 천사를 동원하시거나 사람들을 통해서 얼마든지 일을 하실 수 있지 않습니까?
더구나 어두움에 속한 인생들이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유일한 독생자이심을 알지 못하고, 영접하지도 않고, 오히려 배척함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마다하지 않으시고 구태여 인간의 육신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신 궁극적인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 하는 것입니다. 그 답이 바로 오늘 성경 본문의 말씀입니다.
(요 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이 말씀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밀씀은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라는 말입니다. 여기서 ‘우리 가운데’ 라는 말(ejn)은
1) 공간적으로는 ‘우리 안에, 우리의 곁에, 우리 위에, 우리와 함께’라는 뜻이지만, 2) 시간적으로는 ‘-하는 동안, -하는 때에’ 라는 뜻으로
본래 만물을 지으신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 인간과 같은 육신을 입고 세상에 오신 것은 언제, 어디서나 항상 우리와 함께 하시기 위함이라는 뜻입니다.
또 ‘거하시매’라는 말(skhnovw)은 ‘장막을 치다, 거주하다’라는 뜻으로 머물러 함께 사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것이 왜 그렇게 중요한 일인가? 하는 것을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구약 시대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해방되어 홍해를 건너 먹을 것과 마실 것과 입을 것이 없는 광야에서 사십 년 동안 연단을 받게 되었을 때 어떻게 그것을 극복할 수 있었는가? 하는 것을 생각하게 되면 금방 이해가 될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삭막한 광야에서 사십년 동안 견딜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명하여 만들게 하신 여호와의 장막인 성막에 하나님이 임재하셔서 주야로 함께 하셨기 때문입니다.
(출 13:21) 여호와께서 그들 앞에서 가시며 낮에는 구름 기둥으로 그들의 길을 인도하시고 밤에는 불 기둥을 그들에게 비추사 낮이나 밤이나 진행하게 하시니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비록 광야였지만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이 염려한 것보다 더 좋은 만나와 생수와 메추라기로 배부르게 먹고 마시게 하셨으며, 길쌈을 하지 않아도 옷이 해어지지 않게 하셨습니다.
(느 9:21) 사십 년 동안 들에서 기르시되 부족함이 없게 하시므로 그 옷이 해어지지 아니하였고 발이 부르트지 아니하였사오며
사실 예나 지금이나 인생들의 가장 큰 염려와 근심과 걱정이 무엇입니까? 알고 보면 무엇을 먹고 마시고 입을까? 하는 염려입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실 당시 특별히 더 가난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먹고 마시고 입는 문제는 매우 심각한 문제였습니다.
그것만이 아닙니다. 사람이 사는 것은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말씀으로 사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당시 종교적인 상황은 사람들이 영적으로 매우 빈핍한 상태였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세상에 오신 예수님은 그러한 인생들을 멀찍이 구경만 하시거나 잠시 시찰만 하고 가시는 분이 아니라 그들과 함께 동고동락하여 그들의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해 주시기 위해 세상에 오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산상보훈을 통해서 사람들에게 이 문제에 대해서 너무나 유명한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마 6:31)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마 6:32)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마 6:33)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마 6:34)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니라
예수님은 말만 하시는 분이 아니었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의 가르치심에 푹 빠져 집에 돌아가는 것을 까맣게 잊은 채 사흘을 들판에서 보냈을 때 예수님은 그들의 허기진 배를 보시고 오병이어와 기적으로 통해서 오천 명이 배불리 먹고도 열두 광주리나 남는 기적을 베풀어 입증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죄와 죽음으로 고통당하는 인생의 근본 문제가 해결될 수 없음을 아시고, 그것을 해결해 주시기 위해서 당신의 몸을 십자가에 못 박아 살을 찢고 피를 흘려 생명의 떡과 생명수가 되어 그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그같은 구원의 역사를 이루시기 위해서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기 위해 삼십 삼년을 머무시다가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장사된 지 사흘 만에 부활하여 다시 하늘나라로 복귀하신 것입니다.
듣는 이를 안타깝게 하는 실화가 바로 어제 (2012년 12월 15일(토) 오전 11:29) 있었습니다.
예 화
그것은 아내를 구하기 위해 불속에 뛰어들었던 50대 남성이 아내와 함께 숨져 안타까움을 더하고 있다. 15일 연합뉴스 보도에 따르면 세종시 소정면에서 발생한 주택 화재로 김(55)모씨 부부가 숨졌다. 사고 당시 집안에는 김씨 부부와 80대 노모, 김씨의 딸 2명이 함께 있었고 불이 나자 남편 김씨는 80대 노모, 고등학교 2학년과 중학교 3학년인 두 딸을 무사히 집 밖으로 피신시켰다. 그러나 김씨 아내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김씨는 집안에서 미처 빠져나오지 못한 아내를 구하려고 다시 집안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그것이 김씨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뒤이어 주민 신고를 받고 도착한 119 화재 진압대는 화재 발생 1시간여 만에 불길을 잡았다. 집안으로 들어간 소방관들은 각각 화장실과 안방에서 숨진 채 쓰러져 있는 김씨와 김씨의 아내를 발견했다. 한 소방관계자는 "집안으로 들어갔던 김씨가 화염과 많은 연기 때문에 아내를 찾지 못하고 화장실로 피신했다가 질식사한 것 같다"고 말했다. 마을 주민들은 평소 부부 금슬이 좋고 효심이 지극한 김씨 부부의 비보에 안타까움을 전했다. 80대 노모는 현재 충격을 받고 마을 회관에서 안정을 취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경찰과 소방당국은 "가스 폭발이 있었다"는 진술을 확보, 정확한 화재 원인을 조사하고 있다.
예수님도 그와 마찬가지로 죄악의 불길에 갇혀 있던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주하시기 위해 오신 날이 바로 성탄절인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기쁜 날이요 구원의 날이지만 예수님에게는 고난의 시작이요, 십자가 죽음을 향한 행진의 날이었습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하신 것은 오로지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천년 전에 이 세상에 오신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1) 연약한 자를 위로하기 위해 오셨습니다.
2) 영육 간에 주린 자의 배 불리러 오셨습니다.
3) 죄로 오염된 인간을 속죄하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4) 죽은 자를 살려 구원하시려고 오셨습니다.
5) 날마다 우리에게 새 힘을 주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히 4:15)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 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그 예수님의 별명이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뜻인 ‘임마누엘’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승천하시기 전 제자들과 마지막 약속도 ‘임마누엘’이었습니다.
(마 28:20)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예수님은 그 약속을 지키시기 위해 당신의 영인 성령을 우리에게 보내어 지금 그 성령이 우리 안에 내주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보내신 독생자를 영접하는 것이 하나님을 영접하는 것인 것처럼, 예수님이 보내신 보혜사 성령을 마음에 모시고 사는 것이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입니다.
금번 성탄절을 통해 우리는 예수님을 머리로만 아는 신자가 되지 말고 예수님을 내 마음에 주님으로 영접하여 주님이 언제 어디서나 나와 늘 동행하시는 복을 받아야 하겠습니다.
예 화
우리가 병에 걸렸을 때 나를 아는 주변 사람들은 몇 가지 유형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전화 한 마디도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전화만 합니다. 문병을 와서 한참 앉았다가 갑니다. 간병인이 되어서 곁을 떠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퇴원을 한 후에도 집에까지 따라와서 밤새도록 기침하는 소리에 잠을 못자면서도 불평 한마디 없이 묵묵히 간병을 하면 심지어 대소변까지 받아 줍니다. 그렇다면 이 중에 누가 나를 제일 사랑하는 사람입니까? 물론 나와 함께 병상을 떠나지 않고 나를 수발들어주는 나의 아내나 남편이 아닙니까?
하나님께서 육신을 입고 우리를 찾아오셨습니다. 태초부터 계시면서 천지를 창조하신 광대하고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찾아와 우리를 만나고 계십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그 분께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까요? 먼저는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동시에 그분을 더 알고 싶어 하는 간절한 소망을 가지고 주님 앞으로 다가가야 합니다. 그럴 때 성령을 통해 때를 따라 도우시는 은혜를 우리가 체험할 수 있습니다.
(요일 4:13) 그의 성령을 우리에게 주시므로 우리가 그 안에 거하고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아느니라
주님은 오늘도 변함없이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기 위해 세상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으로 믿고 구주로 영접하는 사람에게
1) 거듭나는 축복과
2)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축복과
3) 하나님의 영광을 보며
4) 성령 충만한 은혜를 받으며
5) 언제 어디서 무엇을 하든지 성령 하나님이 늘 함께 하시는 복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우리와 늘 함께 하시기 위해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세상에 오신 성탄절에 그와 같은 복을 받아야 할 이유는 아무런 소망이 보이지 않는 세상에서 그래야만 희망을 가지고 소망이 넘치는 행복한 삶을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의 복인 것입니다.
(롬 15:13) 소망의 하나님이 모든 기쁨과 평강을 믿음 안에서 너희에게 충만케 하사 성령의 능력으로 소망이 넘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