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 교/이규왕목사

하나님 우리 아버지/(살후 1:1-5)

미션(cmc) 2013. 5. 21. 06:52

하나님 우리 아버지
(살후 1:1-5)

(살후 1:1) “바울과 실루아노와 디모데는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데살로니가인의 교회에 편지하노니”(살후 1:2)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살후 1:3) “형제들아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항상 하나님께 감사할지니 이것이 당연함은 너희의 믿음이 더욱 자라고 너희가 다 각기 서로 사랑함이 풍성함이니”(살후 1:4) “그러므로 너희가 견디고 있는 모든 박해와 환난 중에서 너희 인내와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여러 교회에서 우리가 친히 자랑하노라”(살후 1:5) “이는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의 표요 너희로 하여금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한 자로 여김을 받게 하려 함이니 그 나라를 위하여 너희가 또한 고난을 받느니라”

세상에는 아버지가 하나뿐인 사람과 아버지가 둘인 사람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아버지가 한 분입니까? 두 분입니까? 저에게는 아버지가 두 분입니다. 먼저 저를 낳아준 육신의 아버지가 있습니다. 후회 중에 돌이킬 수 없는 후회는 부모에게 불효한 죄입니다. 일찍 공부하지 못한 것에 대한 후회는 나중에 늦게라도 공부하면 됩니다. 일하지 못한 것에 대한 후회도 나중에 열심히 일하면 됩니다. 하지만 부모에게 불효한 것에 대한 후회는 후회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부모에게 불효했다는 것을 깨달은 다음에는 이미 늦습니다. 다시 부모에게 효도할 길이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또 한분의 아버지가 계십니다.

(살후 1:1) “바울과 실루아노와 디모데는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데살로니가인의 교회에 편지하노니”

본문에서 하나님을 ‘우리 아버지’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1. 바울 사도의 문안
사도 바울은 이미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에게 데살로니가 전서를 보낼 때에도 이렇게 문안을 하였습니다.
(살전 1:1) “바울과 실루아노와 디모데는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데살로니가인의 교회에 편지하노니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그렇다면 데살로니가 전서 1장 1절과 데살로니가 후서 1장 1절과 무엇이 달라졌을까요? 예수께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신 것처럼 바울 사도는 오늘 성경에서 하나님을 가리켜 거듭해서 아버지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더욱이 놀라운 말씀은 그 하나님 아버지를 가리켜 ‘나의 아버지’라고 말하지 않고 저와 여러분을 포함하여 ‘우리 아버지’라고 호칭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살후 1:1) “바울과 실루아노와 디모데는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데살로니가인의 교회에 편지하노니”
여기서 우리는 누구입니까? 오늘 이 말씀을 읽고 있는 저와 여러분입니다. 하나님이 저와 여러분의 아버지가 되십니다.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자녀는 어떤 사람입니까? 세상 자녀들 중에는 부모가 부자여서 많은 유산을 물려받아 일평생 일하지 않고 편안히 살 수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정반대로 부모가 연로하셔서 병들어 고생하는 자녀들도 많이 있습니다. 여러분 누가 행복한 사람입니까?
우리가 부모로부터 유산을 한 푼 받지 못했더라도 또 한 분의 아버지를 잘 만나면 출세하고 성공할 수 있습니다. 그분이 누구입니까? 하나님 우리 아버지이십니다. 육신의 부모는 자녀를 낳아 먹이고 가르쳐주고 유산을 물려주는 것으로 끝납니다. 나이가 어느 정도 많아지면 오히려 자식으로부터 도움을 받아야 됩니다.

하나님 우리 아버지가 자녀에게 주시는 은혜는 육신의 부모가 주는 유산을 물려주는 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살후 1:2)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내가 부모로부터 유산을 물려받지 못했을지라도 하늘에 계신 하나님 우리 아버지로부터 ‘은혜’와 ‘평강’의 복을 받기만 하면 누구보다 행복한 자녀가 될 수 있습니다. 그 은혜는 어떤 은혜입니까? 하나님은 늙지도, 졸지도, 주무시지도 않습니다. 우리를 눈동자처럼 지키십니다. 때를 따로 좋은 은혜를 주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 지 우리를 위하여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셨습니다.
여기서 ‘은혜’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들을 위하여 십자가 위에서 대속의 사역을 감당하셨음을 믿는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자유로이 베푸시는 무조건적인 은총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아버지는 그 은혜를 지금도 여전히 베풀어주십니다. 그러면 이 은혜를 받으면 우리는 어떻게 됩니까? 왜 이 은혜를 받아야 됩니까?

2. 데살로니가 교회가 받은 복
데살로니가 교회가 짧은 신앙 연조와 큰 환난과 핍박이라는 악조건 속에서도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소망의 인내라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교회로 성장할 수 있게 된 것이 바로 그와 같은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의 축복 때문이었습니다.

1) 신앙 성장
데살로니가 성도들은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모범적인 교회로 성장했습니다. 데살로니가 후서는 데살로니가 교회가 하나님의 은혜로 점점 더 좋아지고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살후 1:3) “형제들아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항상 하나님께 감사할지니 이것이 당연함은 너희의 믿음이 더욱 자라고 너희가 다 각기 서로 사랑함이 풍성함이니”
‘더욱’이라는 말씀은 데살로니가 전서 1장에서 언급했던 그 믿음이 더욱 자랐다는 의미입니다. 육신의 성장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인간은 자랄수록 점점 성장속도가 느려지고 어느 시점에 가면 성장이 멈춥니다. 그리고 점점 나이가 들고 쇠퇴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믿음은 나이를 먹지 않습니다. 우리의 믿음은 늙지 않습니다. 우리의 믿음은 죽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믿는 것은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죽음을 이기신 생명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리므로 그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들은 믿음이 더욱 자라게 됩니다.
여기서 ‘더욱 자라고’라는 말(uJperauxavnw) ‘엄청나게 성장하다, 큰 능력을 얻다’는 뜻으로 어린아이가 몰라보게 자라듯이, 죽순이 쑥쑥 자라듯이 자라는 상태의 현재형으로 지속적으로 자라고 있음을 뜻하는 말입니다. 그 비결은 인간의 노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우리는 내 신앙이 어떤 상태인지 점검해야 합니다. 지금 성장하고 있는지, 정체인지, 퇴보인지 생각해봐야 합니다. 특히 나이 드신 어르신들은 육신이 약해지듯이 신앙도 퇴보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믿음은 그렇지 않습니다. 믿음은 나이에 상관없습니다. 오히려 날마다 새롭게 성장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햇볕과 같습니다. 은혜를 받기 위해서는 은혜의 자리로 나가야 합니다.
우리가 집안에서 화초를 키워보면 화초에 우리가 물을 줄 수 있지만 그것이 자라기 위해서 적당한 햇볕이 필요합니다. 만일 어두운 그늘에서 화초에다 계속 물을 준다면 어떻게 될까요? 상상이 갈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믿음이 자라기 위해서는 열심히 필요합니다. 그러나 햇볕과 같은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는 우리의 열심만으로는 우리의 믿음이 자랄 수 없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해야 합니다.

2) 사랑이 풍성해짐
데살로니가 교회가 하나님 우리 아버지로부터 은혜를 받고 믿음만 자란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어떤 식물은 자라서 꽃을 피우고, 어떤 식물은 열매를 맺습니다. 꽃을 피워야 할 나무가 꽃을 피우지 않거나, 열매를 맺어야 할 나무가 열매를 맺지 못하면 주인은 그 나무를 베어버립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우리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그 열매는 사랑의 열매입니다.
(살후 1:3) “형제들아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항상 하나님께 감사할지니 이것이 당연함은 너희의 믿음이 더욱 자라고 너희가 다 각기 서로 사랑함이 풍성함이니”
여기서 ‘풍성함이니’라는 말(pleonavzw)은 ‘많다, 증가하다, 성장하다’ 라는 뜻으로 양적으로 수적으로 대단히 많아지는 것을 뜻하는 말로 마치 강물이 범람하는 것처럼 충만해진 것을 뜻하는 현재형입니다.
데살로니가 교인들의 믿음이 성장한다는 것을 바울은 어떻게 알았습니까? 믿음은 내면적인 것이기 때문에 믿음이 자라는지 그렇지 않은지 믿음을 보고 판단하기 어렵습니다. 그런데 그 믿음은 뿌리와 같아서 그 믿음이 건강하게 자라면 자라고 꽃이 피고 열매를 맺습니다. 그 꽃과 열매를 보고 그 믿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인들의 믿음이 자란다고 평가한 이유는 ‘다 각기 사랑함이 풍성’했기 때문입니다.
데살로니가 전서에서 바울은 데살로니가 성도들의 사랑의 수고가 있었다고 했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랑의 수고가 헛되지 않고 열매를 맺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으면 믿음이 자라고, 믿음이 자라면 사랑의 꽃이 피고, 사랑의 꽃이 피면 사랑의 열매를 맺습니다. 이 일을 위해서 하나님이 우리를 택하시고 구원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사랑의 열매는 믿음으로 맺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믿음은 하나님의 은혜로 자랍니다.

3) 인내하는 믿음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이 믿음이 성장하고 사랑의 열매를 맺게 된 비결은 신앙의 온갖 어려움을 잘 이겨냈기 때문입니다.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어려움을 당할 때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고 하나님의 깊으신 뜻이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 아버지를 변함없이 사랑했습니다.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은 하나님 아버지를 영적으로 잘 순종하고 복종하는 믿음의 효자, 효녀들이었습니다.
(살후 1:4) “그러므로 너희가 견디고 있는 모든 박해와 환난 중에서 너희 인내와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여러 교회에서 우리가 친히 자랑하노라”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은 환난과 박해 중에서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살후 1:5) “이는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의 표요 너희로 하여금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한 자로 여김을 받게 하려 함이니 그 나라를 위하여 너희가 또한 고난을 받느니라”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은 환난과 고난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에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자격조건을 구비하기 위한 훈련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이십니다. 그 하나님 아버지는 우리에게 평강을 주십니다. 우리에게 은혜를 주십니다. 그러나 그 은혜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형통의 은혜와 더불어 고난의 은혜를 주십니다.

3. 예수 그리스도의 모범
예수 그리스도는 세상에 오시기 전에 이미 천지를 창조하신 여호와 하나님의 독생자로 하나님을 가리켜 아버지라고 하셨습니다.
그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실 때 성령으로 마리아의 몸에 무죄한 몸을 출생하셨기 때문에 육신의 부모가 있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공경해야 할 부모는 하늘에 계신 여호와 하나님과 땅에 있는 마리아와 요셉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십계명의 본질을 망각한 당시 종교지도자들을 책망하시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네 부모를 공경하라고 가르치셨다면 예수님은 얼마나 부모를 잘 공경하셨을까요?
예수님의 생애에 대해서 비교적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는 누가 복음에 보면 예수님이 아주 어려서부터 부모를 잘 공경하셨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눅 2:51) “예수께서 함께 내려가사 나사렛에 이르러 순종하여 받드시더라 그 어머니는 이 모든 말을 마음에 두니라”
여기서 ‘순종하여’라는 말(uJpotavssw)은 ‘무엇 무엇 아래에 순서 있게 정렬하다, 배열하다’는 뜻으로 부모의 권위아래에 복종하는 것을 뜻하는 동분사 현재형으로 항상 그렇게 하셨음을 뜻하는 말입니다. 이어서 이를 뒷받침하는 ‘받드시더라’라는 말(hn)도 미완료 형입니다.
그와 같은 예수님이 본격적으로 공생애를 시작하시면 나사렛을 떠나 생활하시다가 마지막 십자가에 달려 죽으실 때까지 부모를 공경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실 때 가장 가슴 아파하신 분이 육신의 어머니 마리아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고통의 순간에서도 어머니 마리아를 보시고 걱정이 되어서 사랑하는 제자 요한에게 어머니를 부탁하셨습니다.
(요 19:27) “또 그 제자에게 이르시되 보라 네 어머니라 하신대 그 때부터 그 제자가 자기 집에 모시니라”
예수님은 부모를 모실 수 없다고 핑계하지 않으시고 마지막 순간까지 최선을 다해 부모를 모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시면서도 육신의 부모를 공경하시는 일에도 최선을 다했던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에 대해서는 어떤 자세를 보이셨을까요?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시기 직전 그 고통이 얼마나 큰지 아시고 매일 매일 기도하시면서 마지막 기도를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눅 22:42) “이르시되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니”
예수님의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은 얼마나 아프셨을까요? 그러나 하나님은 침묵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다시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그러나 내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기도하는 효자였습니다. 그것만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실 때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라고 간구하셨음에도 하나님 아버지께서 외면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를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마지막 운명하실 때에도 아버지 하나님께 그 영혼을 부탁하실 정도로 전 생애를 하나님 아버지께 의탁하는 삶을 사셨습니다.
(눅 23:46) “예수께서 큰 소리로 불러 이르시되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하고 이 말씀을 하신 후 숨지시니라”
예수님은 매일 기도하면서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찾았고, 매일 그 뜻을 이루시는 일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십자가에 죽으실 때도 아버지의 뜻대로 죽으셨고 마지막 순간도 하나님께 맡기셨습니다.

결 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시내산에서 십계명을 주셨습니다. 그 중에 다섯 번째 계명이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계명이었습니다. 왜 하나님이 십계명을 주셨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430년 동안 산 애굽 땅에는 다신론과 부도덕한 삶이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그 애굽에서의 삶과 구별된 삶을 살도록 십계명을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십계명을 지키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에서 430년 동안 살았지만 애굽화 되지 않았습니다. 이제 광야 40년 동안 살다가 죽고 새로운 후손이 태어났습니다. 모세는 죽기 전에 새로운 60만명을 불러 모으고 신명기 5장의 십계명을 다시 주셨습니다.
그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면 거기는 우상숭배와 비도덕적인 삶을 사는 민족들이 가나안 땅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에 그 민족들과 차별화된 종교, 차별화된 삶을 살게 하기 위하여 십계명을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서 하나님의 십계명을 지키며 부모를 공경할 때 비록 땅의 주소는 가나안 땅이지만 그들의 영적인 주소는 하늘나라에 있었습니다.
그 하나님이 저와 여러분에게 십계명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에베소서 6장에 네 부모를 공경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엡 6:1) 자녀들아 주 안에서 너희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엡 6:2)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은 약속이 있는 첫 계명이니
디모데후서 3장에 말세에는 부모를 거역하고 사람들이 돈만 아는 시대가 올 것이라고 경고하였습니다.
(딤후 3:2)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랑하며 교만하며 비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하지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성도들은 이러한 시대에 살면서 세상에 물들지 않고 부모를 공경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무신론의 세상, 비윤리적인 세상에서 누가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자녀들인지 부모를 공경하는 것으로 알 수 있습니다. 성도들이 부모를 공경한다는 것은 5월 8일 어버이날을 지키는 것과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형식이 아니라 영으로는 하나님 아버지를 섬기고 육신으로는 이 땅의 부모를 공경해야 합니다.
무신론이 팽배하고, 우상숭배하는 세상에서, 비도덕적이고 비윤리적인 세상에서 성도들은 하나님 아버지를 경외하고, 육신의 부모를 공경하는 성도들을 통해 구별된 삶, 거룩한 삶을 보여줘야 합니다.
섬겨야 할 부모가 없으면 섬겨야 할 하나님 아버지가 있음을 깨닫고 육신의 부모 이상으로 하나님을 잘 공경하고, 섬겨야 할 부모님이 계시다면 다른 사람에게 미루지 말고 생전에 공경하는 일에 본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땅에서 잘되고 장수하리라는 약속이 있다는 것을 기억하고 육신의 부모를 잘 모셔서 자손만대 잘되는 복을 받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