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 교/이규왕목사

그날의 영광과 형벌/(살후 1:6-12)

미션(cmc) 2013. 5. 21. 06:53

그날의 영광과 형벌
(살후 1:6-12)

(살후 1:6) “너희로 환난을 받게 하는 자들에게는 환난으로 갚으시고”(살후 1:7) “환난을 받는 너희에게는 우리와 함께 안식으로 갚으시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시니 주 예수께서 자기의 능력의 천사들과 함께 하늘로부터 불꽃 가운데에 나타나실 때에”(살후 1:8)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과 우리 주 예수의 복음에 복종하 지 않는 자들에게 형벌을 내리시리니”(살후 1:9) “이런 자들은 주의 얼굴과 그의 힘의 영광을 떠나 영원한 멸망의 형벌을 받으리로다” (살후 1:10) “그 날에 그가 강림하사 그의 성도들에게서 영광을 받으시고 모든 믿는 자들에게서 놀랍게 여김을 얻으시리니 이는 (우리의 증거가 너희에게 믿어졌음이라)”(살후 1:11) “이러므로 우리도 항상 너희를 위하여 기도함은 우리 하나님이 너희를 그 부르심에 합당한 자로 여기시고 모든 선을 기뻐함과 믿음의 역사를 능력으로 이루게 하시고”(살후 1:12) “우리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대로 우리 주 예수의 이름이 너희 가운데서 영광을 받으시고 너희도 그 안에서 영광을 받게 하려 함이라”

예나 지금이나 인간이 살아가는 세상은 어디를 막론하고 선하고 진실된 사람들만 모여 행복하게 사는 나라나 지방은 단 한 곳도 없습니다.
인간이 살아가는 모든 곳에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과 믿지 않는 사람, 남을 돕는 사람과 남에게 피해를 주는 사람, 선한 사람과 악한 사람, 핍박을 받는 사람과 핍박하는 사람이 공존합니다.
더구나 그 비율이 긍정적인 선한 쪽보다는 부정적인 악한 쪽이 득세를 하기 때문에 선한 사람을 장려하는 상급을 주고, 악한 사람을 형벌하는 법들을 제정하고 그 법을 어기는 자에게는 형벌을 주어 사람들에게 경고를 하기도 합니다.
또한 인간이 어려서는 비록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지를 알지 못하지만 점점 자라가면서 점점 배워가면서, 세상을 경험하면서, 나이가 들어가면서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 선악을 분별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사람은 나이를 먹어갈수록 점점 선해져야 하고 세월이 흘러갈수록 세상은 점점 더 좋아져 가야만 합니다. 그러나 참으로 이상한 것은 갈수록 세상이 악해져만 갑니다. 과연 그 이유가 무엇이며, 그에 대한 대안이 무엇일까요?
사람들은 그 대안을 교육과 종교라고 말합니다. 물론 지금까지 교육과 종교가 한 역할은 지대합니다., 만일 그 두 가지가 없었다면 세상은 지금보다 훨씬 더 악해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교육과 종교도 궁극적인 헤결책이 되지 못함은 지능범은 많이 배운 사람이고, 다수의 종교인이나 종교 지도자들조차 온갖 범법행위를 저지르고 있기 때문에 세인들로부터 지탄을 받고 사람들이 점점 종교의 필요성이나 역할에 대해서 회의와 불신이 더해져만 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에 대한 해결책이 인간에게는 없다는 결론이며 가고 오는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이 이 세상을 구원해 주시지 않으면 답이 없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며 이 사실을 믿는 자는 점점 더 악해지는 세상을 보면서 실망이나 회의를 느끼는 사람이 아니라 사랑과 정의로 세상을 통치하시는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며 부르짖어 기도하는 사람입니다.
왜 그렇게 하는 것만이 이 시대의 유일한 대안인지 오늘 성경 말씀을 통해서 그 답을 찾아야 하겠습니다.

1. 핍박받는 자와 핍박하는 자
사도 바울이 소아시아와 마게도냐 지방을 두루 다니면서 여러 교회들을 세웠지만 그 가운데 바울이 더욱 더 사랑하는 교회가 있다면 단연 데살로니가 교회입니다.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회를 그렇게 사랑한 까닭은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이 단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다는 이유 때문에 많은 박해와 환난을 당하였지만 그에 굴하지 않고 끝까지 믿음을 지켜나갔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굳은 결심을 했다가도 너무 오랫동안 고난이 계속되면 마음이 약해지기 쉬운 법인데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은 핍박 중에서도 한결 같은 믿음으로 그것을 이겨나간다는 소문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러한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의 아름다운 믿음을 다른 여러 교회들에게 자랑하기를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살후 1:4) “그러므로 너희가 견디고 있는 모든 박해와 환난 중에서 너희 인내와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여러 교회에서 우리가 친히 자랑하노라”
여기서 ‘심한 박해’라는 말(pa'")은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이 겪고 있는 온갖 핍박을 뜻하고, '어려움 속에서도‘라는 말(qlivyi")은 ’억압으로 인해 육신적으로는 물론 심적으로는 매우 견디기 힘든 상태를 뜻하는 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은 마치 반석위에 세운 집이 비바람과 창수에도 무너지지 않는다는 예수님의 말씀처럼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의 믿음은 확고부동하였을 뿐 아니라 끝까지 인내로 믿음을 지켜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러한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의 믿음을 매우 기쁘게 여겼을 뿐 아니라 소식을 다른 여러 교회들 앞에 자랑거리로 삼았습니다.
그러나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이 그 모든 박해와 환난 중에서도 그처럼 믿음을 지켜나간 것은 그들의 인내심이 강했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이 부어주시는 은혜로 말미암은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은혜와 평강이라는 축복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런 의문이 생길 것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을 처음서부터 아무런 박해를 당하지 않도록 미리 다 막아주시고 신앙의 자유를 만끽하도록 하실 것이지 마치 병 주고 약주는 식으로 심한 박해와 환난을 당하도록 버려두신 후에 그것을 인내할 수 있는 은혜를 부어주시는 까닭이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도 성경 말씀대로 살아가는 경건한 성도들이 정반대로 벌을 받아 마땅한 사람들에게 핍박을 당하고 손해를 보게 될 때 하나님의 정의에 대해서 회의를 하기 쉽습니다. 그와 같은 의문에 대해서 성경은 무엇이라고 답을 하고 있습니까?

1) 그 것이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세상에 오셔서 본을 보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로 고통당하는 인생을 구원하시기 위해 세상에 오셔서 하신 일은 불의한 자들에게 형벌과 저주와 심판을 내리시는 일을 하신 것이 아니라 도리어 불의한 자들에게 비난과 조롱과 핍박과 죽음을 당하시는 일을 하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예수님은 그를 믿고 따르는 제자들에게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고 명하셨습니다.
(눅 14:27)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물론 그 당시에는 예수님이 패배자처럼 보인 반면 불의한 종교지도자들과 핍박자들이 승자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결과는 정반대였습니다.
그로 말미암아 예수님이 우리에게 세상의 불의를 이길 수 있는 강력한 진정한 힘, 진정한 정의는 사랑임을 보여 주셨습니다.

2) 하나님만이 가고 오는 역사를 주관하는 심판 주이심에도 불구하고 때로 경건하게 사는 자들이 악하고 불의한 자들에게 핍박당하는 모습을 보시면서 악한 자들을 징벌하시지 않고 경건한 자들이 핍박을 당하도록 한시적으로 용납하시는 것은 하나님이 정의를 포기하신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에 모든 생명은 고난 중에서 강해지는 것처럼 경건한 자들을 고난 중에서 훈련시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에 합당한 자라고 일컬음을 받을 수 있는 자격 조건을 갖추게 하는 훈련의 기간인 것입니다.
(살후 1:5) “이는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의 표요 너희로 하여금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한 자로 여김을 받게 하려 함이니 그 나라를 위하여 너희가 또한 고난을 받느니라”
여기서 ‘합당한 자’라는 말(kataxiovw)은 어떤 자격조건의 구비를 뜻하는 말이 아니라 ‘가치가 있다고 본다. 합당하다고 여긴다‘라는 뜻으로 마치 칭의라는 말과 같은 개념입니다.
그러므로 경건한 자들이 불의한 자들에게 억울한 핍박을 당할 때 불의한 방법으로 맞서지 않고 묵묵히 참고 인내하는 것은 바보 같은 짓이 아니라 오히려 심판장 되신 하나님으로부터 높은 점수를 따는 기회가 된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눈으로 볼 때 불경건한 자들에게 모진 핍박을 당하는 경건한 성도들이 약자처럼 보이는 반면에 핍박하는 불경건한 자들이 강자처럼 보일 것입니다.
구약 성경을 보면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택하셨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애굽 땅에서 바로 왕에게 핍박을 당하게 하시고, 척박한 광야에서 무려 사십년간 온갖 시련을 겪게 하신 것은 약속의 땅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새로운 나라를 건설하여 이방나라 백성들과 차별화된 삶을 살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하나님의 친 백성이 되게 하시려는 훈련 과정이었습니다.
오늘 성경에서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이 핍박당하는 것도 그와 같은 맥락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이라는 것입니다.

2. 핍박을 받는 자가 받게 될 영광
우리가 흔히 심판이라고 하면 무엇이 선한 것이고 무엇이 악한 것인지를 확실히 가려서 악한 자는 벌하고 선한 자는 상을 주는 행위를 뜻합니다.
그렇다면 왜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이 불의한 자들에게 모진 박해를 당하고 있는데도 하나님께서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고 가만히 계시는데 어떻게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이라고 할 수 있는가? 하는 의문을 갖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오늘 성경에서 그와 같은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에게 왜 그것이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인지를
(살후 1:7) “그러므로 고난을 당하고 있는 여러분에게 말합니다. 주 예수께서 능력 있는 천사들을 거느리고 하늘로부터 불꽃 가운데서 나타나실 때 하나님께서는 여러분과 우리에게 안식을 주실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핍박을 받는 경건한 자들에게 안식을 주시는 날이 어느 날일까요?
이 세상을 살아가는 인간은 누구를 막론하고 세 시대에 걸쳐 존재합니다. 첫째는 모태에서 열 달 동안의 시간입니다. 둘째는 지상에서 칠팔십년의 세월입니다. 셋째는 사후의 영원한 세상입니다.
그 중에서 지상에서의 70, 80년은 모태에서 열 달과 비교하면 무척이나 긴 시간입니다. 그러나 지상에서의 한 평생 아무리 오래 살지라도 지라도 사후의 영원한 세계와 비교하면 모태에서 열 달 보다도 더 짧은 순간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관심을 두어야 할 시간은 사후의 영원한 세계가 아닙니까? 아무리 열달 동안 모태에서 건강하고 평안하게 자랐을 지라도 아이의 행복은 지상에서의 한평생에 좌우됩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인생의 진정한 행복은 지상에서의 칠팔십년 보다 사후에서 영생을 누리게 되는 영원한 미래입니다. 그 영원한 영광의 날을 여는 열쇠가 바로 예수님의 재림하시는 날인 것입니다.
(살후 1:10) “그 날에 그가 강림하사 그의 성도들에게서 영광을 받으시고 모든 믿는 자들에게서 놀랍게 여김을 얻으시리니 이는 (우리의 증거가 너희에게 믿어졌음이라)”

모태에서 열달 동안 자란 아이가 출산을 어떻게 하는가에 따라 일생의 건강이 좌우됩니다. 영적으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일생은 이 세상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보다 영원한 영광의 미래를 여는 열쇠가 이 지상에서의 믿음에 의해 좌우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지상에서 행복만을 추구하는 자가 되지 말고 영원한 미래의 영광을 여는 믿음이 열쇠와 그 나라에 넉넉히 들어갈 자격 조건을 갖추는 일에 보다 더 전념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고후 5:10)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타나게 되어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
그동안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이 하나님과 사도 바울로부터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소망의 인내가 있는 교회라고 칭찬을 받은 것은 핍박 중에서도 인내한 믿음의 아름다운 열매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러한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을 위해 꾸준히 기도한 것은 핍박의 기간이 길어갈수록 더욱더 믿음이 자라고 소망이 풍성하며 인내하는 믿음으로 환난과 핍박을 잘 극복해 나갈 때 주님 오시는 재림의 날에 영원한 영광과 영생의 복을 받는 승리의 교회가 되기를 기도한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그와 같은 인내가 필요함은 그것이 구원의 절대조건이 아니라 이미 구원을 받은 우리가 장차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에 합당한 자로 일컬음을 받기 위함인 것입니다.
그 때 앞서 고난의 본을 보이신 예수님이 영광을 받으시는 것처럼 불의한 자들에게 고난을 받으면서도 인내하는 믿음으로 승리한 성도들도 예수님처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주님과 더불어 영광에 참여하는 복을 받게 될 것입니다.
(빌 2:9)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빌 2:10)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빌 2:11)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3. 핍박하는 자가 받게 될 형벌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천지와 만물을 만드신 전능하신 하나님이실 뿐 아니라 불의를 용납하지 않으시는 지극히 거룩하고 정의로우신 하나님이십니다.
만일 그 하나님이 역사를 심판하시는 주권자라면 불의자들에게 심판과 형벌을 내리셔야 합니다. 그래야만 세상에 불의가 없어지고 야 하고 공평하고 정의로워야만 합니다. 따라서 의롭게 사는 사람이 승리하고 불의한 사람이 벌을 받고 망하는 세상이어야 합니다.
그러나 데살로니가 교회의 현실은 정반대입니다.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믿음으로 사랑으로 인내함으로 정결하고 거룩하게 살아가려고 힘쓸 수고 있는데 오히려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그리스도의 구주되심을 부인하는 자들이 득세하고 폭력을 휘두르고 온갖 거짓을 동원하여 핍박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이 믿고 있는 하나님은 그들에게 아무런 형벌이나 진노를 내리시지 않기 때문에 점점 더 기세등등하기만 합니다.
그런 경우 경건한 성도들조차 낙심하거나 하나님의 살아계심에 대한 믿음이 흔들릴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성경에는 하나님이 그러한 자들을 내버려두시는 것을 가리켜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살후 1:5) “이는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의 표요 너희로 하여금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한 자로 여김을 받게 하려 함이니 그 나라를 위하여 너희가 또한 고난을 받느니라”
지금까지 우리가 생각해 온 하나님의 심판은 악한 자들에게 고통의 형벌을 받는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런 곳이 바로 지옥이기도 하구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실은 정반대입니다. 고통을 당하는 사람들은 경건한 믿음의 사람들이고, 반대로 고통을 당해야 할 악한 자들이 도리어 득세하여 온갖 권력과 부를 누리고 평안히 살고 있다면 그것이 어떻게 하나님의 정의로우신 심판일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역사의 주권자가 되시는 하나님께서 왜 세상에 악한 자들을 멸하지 않으시고 용납하시며 때로 경건한 자들이 그들에게 고통을 당하는 것을 다 보시면서 용납하시는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요?

첫째 그 이유는 이미 지난날에도 그렇게 모순처럼 생각되는 세상이 오랜 세월 동안 하나님의 백성들을 괴롭혔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조급하게 심판하지 않으시고 그로 인해 하나님의 백성들을 연단 훈련하시는 기회로 삼으시고 그 가운데 종자가 될 만한 남은 자를 택하시고 그들을 통해서 역사의 맥을 이어가게 하시고 새로운 시대가 도래할 때까지 악인의 심판을 유예하고 기다리셨더 때가 많이 있었습니다.
그 세력들이 이스라엘 민족을 괴롭혀 왔던 애굽과 블레셋과 앗수르과 바벨론 세력과 페르시아와 헬라와 로마 제국들입니다.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에 하나님의 정의를 대적하는 어떤 나라, 어떤 정권, 어떤 이데오르기, 어떤 사람이 아무리 득세하고 그 권세를 천년만년 누릴 것처럼 보여도 때가 오면 지난 날 제국처럼 하나님을 대적하는 불의한 세력들이 이 땅위에서 멸망하는 날을 하나님께서 준비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다만 아직 그 날이 잠시 남아 있을 뿐입니다.

둘째 하나님이 악인의 세력을 아직 멸하지 않고 때가 올 때까지 미루고 계시기 때문에 악인의 세력도 얼마동안은 강자로 군림을 하게 될 것이고 경건한 자들을 핍박하기도 할 것이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말과 글을 멋대로 지껄여도 아무런 해를 받지 않는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세 등등하여 기독교를 폄하하고 하나님을 대적하고 교회를 탄압하고 불의로 득세하기도 할 것입니다. 그러나 오랜 세월이 흐른 후에는 그들의 모든 행위는 낱낱이 다 기록되어 하나님의 정의가 세상을 심판하시는 그 날에 마치 겨울땔감을 준비하는 산골 농부처럼 자기를 형벌하고 불사를 땔감이 될 것입니다.
(롬 2:5) 다만 네 고집과 회개하지 아니한 마음을 따라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심판이 나타나는 그 날에 임할 진노를 네게 쌓는도다
악인들이 마음 놓고 저지른 모든 악행은 자기를 찌르는 형벌의 도구가 되게 할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제멋대로 말하고 행동하는 것은 자유가 아니라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인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성경은 이렇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1) 하나님께서 경건한 자들에게 고통을 주는 자들에게 내리시는 심판과 벌이 무엇이라고 하였습니까?
(살후 1:6) “동시에 여러분에게 고통을 주는 자들에게는 그 대가로 심판과 벌을 내리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2) 물론 지옥이라는 말이 없습니다. 영원한 고통을 받게 된다는 말이 없습니다. 핍박자들이 전율을 느낄 만큼 끔찍한 형벌을 받게 될 것이라고 좀더 구체적인 설명을 해주셨으면 좋겠는데 그런 말이 없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심판이라는 말을 별로 두려워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살후 1:8) “그러나 하나님을 알려고도 하지 않으며 하나님께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구원하시리라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는 자들에게는 심판을 내리실 것입니다. (시79:6,사66:15,렘10:25)”
다만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세상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드리지 않는 불신앙의 사람들에게 주님이 다시 오시는 재림의 날에 내리실 영원한 멸망과 심판과 형벌은 불의한 자는 주님 앞에서 추방되는 것이고, 경건한 자는 주님이 준비하신 놀라운 영광을 다시는 보지 못하게 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살후 1:9) “그들은 영원한 멸망의 심판과 형벌을 받고 주님 앞에서 멀리 추방되어 주님의 놀라운 영광을 다시는 보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사2:10,19,21)”
여기서 주님 앞에서 멀리 추방되는 곳이 지옥이고, 주님의 놀라운 영광을 보게 되는 곳이 바로 천국인 것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그와 같은 지옥과 천국을 믿는 경건한 사람은 핍박을 받으면서도 핍박하는 자를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그날에 핍박자가 받게 될 형벌을 내다보면서 불쌍히 여기게 될 것입니다.
그것을 알고 믿는 사람은 하나님이 자신에게 주신 기회를 결코 불신과 불순종과 악행하는 일에 하나님이 주신 시간과 물질을 허비하는 헛된 삶을 살지 않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와 같은 심판의 날을 전혀 의식하지 않고 하나님을 부인하고, 경건한 자들을 핍박하는 일에 열심 내는 사람들이 얼마나 어리석은 사람인가? 하는 것을 잊지 말고 어서 회개하고 돌이켜야 합니다.

결 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인간적으로 보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큰 복을 받은 사람처럼 보이면 더욱 좋겠는데 현실은 정반대로 고난을 당하기 쉽습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하시는 이유는 부패한 육신을 가진 우리는 배부르고 등따실 때 부패하고 타락할 위험성이 많기 때문에 하나님이 때로 우리가 원치 않는 고난을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딤후 3:12)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박해를 받으리라
설령 그럴지라도 우리 성도들이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처럼 끝까지 참아야 할 이유는,
1) 하나님께서 살아계시어 그 모든 것을 다 지켜보시기 때문이고,
2) 물론 환난이 고통스러운 것이지만 하나님이 주실 상급에 비하면 가벼운 것이기 때문이고,
3) 비록 일시적으로 악인이 의인을 핍박하지만 결국 하나님이 이기고 진리가 승리하기 때문이고,
4) 그 같은 고난이 장차 주님이 재림하시는 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본인 자신도 영광을 받게 될 상급이 되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가 불합리하게 생각되는 세상에서 믿음으로 살기 때문에 고난을 당하게 될 때 무엇보다 내가 하나님의 부르심에 합당한 자가 되도록 고난 중에 점점 더욱 성장하고, 성도들 간의 사랑이 풍성하며, 믿음으로 끝까지 승리하는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