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 교/이규왕목사

너무 너무 고통스러울 때/(시 22:1-5)

미션(cmc) 2014. 2. 3. 15:39

너무 너무 고통스러울 때
(시 22:1-5)


(시 22:1) “[다윗의 시, 인도자를 따라 아얠렛샤할(사슴이란 곡조)에 맞춘 노래]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 나를 멀리 하여 돕지 아니하시오며 내 신음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 (시 22:2) “내 하나님이여 내가 낮에도 부르짖고 밤에도 잠잠하지 아니하오나 응답하지 아니하시나이다” (시 22:3) “이스라엘의 찬송 중에 계시는 주여 주는 거룩하시니이다” (시 22:4) “우리 조상들이 주께 의뢰하고 의뢰하였으므로 그들을 건지셨나이다” (시 22:5) “그들이 주께 부르짖어 구원을 얻고 주께 의뢰하여 수치를 당하지 아니하였나이다”


  지난날의 사건을 기록한 것을 역사라고 한다면, 아직 오지 아니한 미래의 일에 대해 미리 알리는 것을 예언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성경을 가리켜 하나님의 말씀 또는 예언의 말씀이라고도 하는 까닭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는 지난날의 수많은 역사와 더불어 미래에 대한 예언이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알고 있는 미래에 대한 예언을 기록한 성경이라고 하면 아마도 다니엘과 같은 구약의 예언서나 신약의 요한 계시록 정도로만 알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을 유심히 관찰하게 되면 하나님은 이미 지난 과거의 역사나 인물을 통해서 아직 오지 아니한 미래에 대한 예언의 말씀으로 사용하심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성경은 단순한 지난날의 역사가 아니라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은 이스라엘의 지난 날 역사를 통해서 오늘날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은 사람들의 신앙 공동체인 교회와 성도들을 하나님께서 어떻게 사랑하시는가? 에 대해서 깨우쳐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주일마다 살펴보는 시편 기자 다윗도 동일한 맥락으로 오늘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다윗이 어떤 믿음으로 살았는가? 에 대해 더 주목하고 나도 그와 같은 믿음으로 살아야 하겠다고 다짐하고 결단하는 시간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1. 시편 기자의 기도
 지금까지 시편 기자가 우리에게 본보여준 긍정적인 모습은 고난을 당할 때마다 그처럼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며 부르짖었던 대표적인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시 6:9) “여호와께서 내 간구를 들으셨음이여 여호와께서 내 기도를 받으시리로다”
 시편 기자가 기도의 응답을 체험할 수 있었던 것은 그와 같이 하나님이 분명히 들어 주실 것이라고 확신하는 믿음의 기도를 드렸기 때문입니다.
(시 17:6) “하나님이여 내게 응답하시겠으므로 내가 불렀사오니 내게 귀를 기울여 내 말을 들으소서”
 예수께서도 기도에 대해 말씀하시면서 무엇보다 강조하신 것은 무엇을 구하든지 필히 믿음으로 기도해야 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막 11:24)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어제나 오늘이나 동일하신 하나님은 오늘 우리가 시편 기자와 같은 믿음으로 기도하면 응답해 주시는 어제나 오늘도 변함이 없으신 동일하신 하나님이심을 믿어야 합니다.
(히 13:8)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
시편 기자가 그처럼 믿음이 확고한 사람으로 우리가 알고 있는데 오늘 성경을 보면 그와는 전혀 다른 기도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시 22:1)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 나를 멀리 하여 돕지 아니하시오며 내 신음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
 여기서 ‘버리셨나이까’ 라는 말(bz"[;(5800, 아자브) )은  ‘떠나다, 남기다, 저버리다’라는 뜻의 완료형으로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고, ‘멀리하여’라는 말(q/jr;(7350, 라호크) )은 ‘멀리 떨어진, 간격’을 뜻하며, ‘신음’ 이라는 말(hg;a;v](7581, 셰아가) 은 마치 짐승이 울부짖는 것처럼 ‘표호’하는 것을 뜻하는 말입니다.
 시편 기자가 얼마나 어려운 상황에 처하였으며, 얼마나 그 마음이 다급한 상태에 처해 있는가? 하는 것을 확연하게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시편 기자가 마치 굶주린 짐승처럼 울부짖어 구하는데도 무엇 때문에 하나님은 시편 기자를 저버리시고, 멀리하시고, 밤낮을 잠잠하지 않고 부르짖는 기도에 대해서 응답하지 않으시는 것일까요?
(시 22:2) “내 하나님이여 내가 낮에도 부르짖고 밤에도 잠잠하지 아니하오나 응답하지 아니하시나이다”
이와 같은 시편 기자의 처지는 지금까지 믿음으로 구했을 때 어떤 위기 상황에서도 반드시 응답해 주신 것과는 전혀 다른 처지임을 알 수 있습니다.
 과연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시편 기자가 하나님에 대한 믿음에 문제가 생긴 것일까요? 아니면 시편 기자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에 문제가 있는 것일까요?

 1) 시편 기자의 영광돌림
 시편 기자의 믿음에는 하나도 문제가 없음은 시편 기자의 생각에는 하나님이 시편 기자를 저버리시고, 멀리하시고, 고통 중에 신음하는 소리를 듣지 않으시는 것 같은 부정적인 상황에서도 시편기자는 여전히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있습니다.
(시 22:3) “이스라엘의 찬송 중에 계시는 주여 주는 거룩하시니이다”
 뿐만 아니라 지금까지 조상들이 하나님을 의지하고 믿음으로 부르짖어 기도하였을 때 그 기도에 대해서 응답해 주신 사실을 변함없이 믿고 있었습니다.
(시 22:4) “우리 조상들이 주께 의뢰하고 의뢰하였으므로 그들을 건지셨나이다” (시 22:5) “그들이 주께 부르짖어 구원을 얻고 주께 의뢰하여 수치를 당하지 아니하였나이다”

2) 시편 기자의 우려
  시편 기자가 자기 자신을 부인하면서 겸손하게 절박한 처지인가를 여호와 하나님께 고백하기 때문에 긍휼히 한이 없으신 하나님께서 응답하실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시 22:6) “나는 벌레요 사람이 아니라 사람의 비방 거리요 백성의 조롱 거리니이다” (시 22:7) “나를 보는 자는 다 나를 비웃으며 입술을 비쭉거리고 머리를 흔들며 말하되”
 무엇보다도 시편 기자 염려하고 있는 것은 자신의 고통이 너무 큰 것 때문이 아니라 그와 같은 시편 기자를 원수들이 보고 하나님을 빗대어 가면서 조롱하는 것 때문에 더욱 괴로워하였습니다.
(시 22:8) “그가 여호와께 의탁하니 구원하실 걸, 그를 기뻐하시니 건지실 걸 하나이다”

 만일 오늘 우리가 시편 기자와 같은 처지를 당했다면 낙심이 되어 하나님을 원망하기 쉬웠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편 기자가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은 어려서부터 성인이 되도록 지금까지 한결같았습니다. 
(시 22:9) “오직 주께서 나를 모태에서 나오게 하시고 내 어머니의 젖을 먹을 때에 의지하게 하셨나이다” (시 22:10) “내가 날 때부터 주께 맡긴 바 되었고 모태에서 나올 때부터 주는 나의 하나님이 되셨나이다”
 설령 시편 기자에게 무슨 잘못된 문제가 있을지라도 그와 같은 시편 기자의 믿음으로 보시고 절박한 문제를 해결해 주실 것이라는 기대감을 갖게 하는 신실한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믿음이 있노라고 하지만 시편 기자와 같은 처지가 되었을 때 하나님께서 응답해 주시지 않는다고 생각되면 쉽게 좌절하고 낙심하기 쉽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그와 같은 시편 기자의 믿음의 기도에 대해서 어떻게 반응을 하셨을까요?

 2. 시편 기자의 고통
 시편 기자가 한결같은 믿음으로 하나님을 신뢰하고 부르짖어 기도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시편 기자의 처지는 조금 나아진 것이 아니고 기도하기 전보다 더 상황이 악화되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시 22:11) “나를 멀리 하지 마옵소서 환난이 가까우나 도울 자 없나이다”
 여기서 ‘멀리’라는 말(qj'r;(7368, 라하크)은 목적했던 것과는 정반대의 미완료 상태이고, ‘가까우나’라는 말(b/rq;(7138, 카로브)은 원치 않는 상태에 직면한 상태에 처해 있음에도 불구하고 시편 기자를 도울 자가 전혀 없는 현재 상태를 뜻합니다.

 1) 마음에 두려움
 시편 기자의 상황은 하나님이 도와주시지 않으면 시편 기자의 자력으로는 물리칠 수 없는 무자비한 원수들을 많은 황소와 개들로 비유하여 표현하고 있습니다.
(시 22:12) “많은 황소가 나를 에워싸며 바산의 힘센 소들이 나를 둘러쌌으며” (시 22:16) “개들이 나를 에워쌌으며 악한 무리가 나를 둘러 내 수족을 찔렀나이다”
 만일 오늘 우리에게 많은 황소가 아니라 단 한 마리의 힘센 황소가 뿔을 휘두르며 다가오고 있다면, 사나운 사냥개 한 마리가 날카로운 이빨을 내보이며 으르렁 거리면서 점점 다가오고 있다면 얼마나 두렵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편 기자는 한 마리가 아니라, 많은 황소, 힘센 황소들이 빙 둘러 싸고 점저 좁혀 오고, 마치 사자가 앞발로 먹이 감을 홱 낚아채듯이 원수들이 시편 기자를 공격하고 있다면 그 두려움이 얼마나 컸을까? 하는 것은 가히 짐작 될 것입니다.
 (시 22:15) “내 힘이 말라 질그릇 조각 같고 내 혀가 입천장에 붙었나이다 주께서 또 나를 죽음의 진토 속에 두셨나이다”

2) 육체적인 고통
  갈수록 시편 기자의 고통은 마음의 두려움으로 끝이 난 것이 아니라 육체적으로도 죽음 못지않은 고통을 겪고 있었습니다.
(시 22:17) “내가 내 모든 뼈를 셀 수 있나이다 그들이 나를 주목하여 보고”
 여기서 ‘뼈를 셀 수 있다’는 말(rp's;(5608, 사파르))은 ‘상세하게 말하다’라는 뜻으로 온몸에 젖어드는 고통 때문에 안 아픈 곳이 없고 어디가 아픈지를 구체적으로 헤아릴 수 있을 정도라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에서 시편 기자가 원수들에게 매를 맞고 찔리는 고통으로 인해 뼈들이 하나하나 느껴질 정도라는 것입니다.
 창조주 하나님께서 얼마나 사람을 정교하게 만드셨는지 신생아 때는 450개였던 것이 점차 성장하면서 뼈들이 합쳐저서 성인이 되면 총 206개가 된다고 합니다.
 그 중에 척추가 26개, 두개골은 22개, 갈비뼈와 가슴뼈는 25개, 팔뼈는 64개, 다리뼈는 62개, 심지어 귓속 뼈는 6개로 구성되어 있다고 합니다.
 우리가 젊었을 때 뼈가 살 속에 감추어져서 보이지 않기 때문에 별로 뼈를 의식하지 못하지만 사람이 나이가 들면 자주 통증을 느끼게 되는 부위들이 대부분 뼈 부분입니다.

3) 마음의 수치심
 그것만이 아닙니다. 중동지방의 사람들은 지금도 온 몸을 칭칭 감고 있을 정도로 몸을 드러내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상대방에게 수치심을 불러일으키는 방법이 살을 드러내게 하는 것으로 벌거벗기는 것을 가장 수치스럽게 생각합니다. 그래서 십자가 처형을 할 때 벌거벗겨서 나무에 매다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에 보면 원수들이 시편 기자를 벌거벗기고 겉옷과 속옷을 서로 나누기 위해서 제비를 뽑을 정도로 수치를 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시 22:18) “내 겉옷을 나누며 속옷을 제비 뽑나이다”
 이처럼 시편 기자는 마음과 육체가 모두 원수들에게 고통을 당하고 있기 때문에 더더욱 여호와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체적으로 요청하고 있습니다.
(시 22:20) “내 생명을 칼에서 건지시며 내 유일한 것을 개의 세력에서 구하소서” (시 22:21) “나를 사자의 입에서 구하소서 주께서 내게 응답하시고 들소의 뿔에서 구원하셨나이다”

 3. 고난의 특별한 섭리
 시편 기자가 무엇보다 가장 고통스럽게 생각하는 것은 그와 같은 육체적인 고통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께 아무리 부르짖어도 하나님이 묵묵히 침묵만 하시는 것이  시편 기자를 ‘너무 너무 고통스럽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이 정말 살아 계시다면, 하나님이 정말 시편 기자를 사랑하신다면, 시핀 기자가 그처럼 믿음으로 하나님께 기도할 대 하나님은 더 이상 외면하지 마시고 어떤 모양으로든지 응답하시고 구원하여 주실 것이라는 희미한 신호를 보여 주시기만 해도 그렇게 고통스럽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문제는 때로 하나님이 시편 기자에게 침묵하신 것처럼 오늘 우리들의 기도에 대해서도 침묵하실 때가 있다는 것을 오늘 성경이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1) 보다 더 철저한 회개를 위해서
 이사야 선지자는 '여호와의 손이 짧아 구원치 못하심도 아니요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심도 아니라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차이를 내었고 너희 죄가 그 얼굴을 가리워서 너희를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시 59:1-2)‘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때로 침묵하시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보다 더 철저한 회개를 하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2) 보다 더 성숙한 믿음을 위해서
 인간의 연약한 육체는 부단한 훈련을 통해서 강인해제는 것처럼 연약한 우리의 믿음은 고난중에 연단을 받음으로 보다 더 성숙한 믿음으로 자라게 됩니다.
동방의 의인 욥에게 닥친 시련과 환난은 그를 원숙한 신앙의 경지에 도달하게 하였습니다.
(욥42:5)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삽더니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욥이 극심한 고난을 당하게 될 때에도 하나님은 철저하게 침묵으로 일관하셨습니다. 그러한 하나님의 침묵 때문에 그는 친구들로부터 조롱을 받았고 그의 아내에게서조차 버림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와 같은 하나님의 침묵은 욥을 영적으로 새로 태어나게 했으며 그를 보다 성숙한 하나님 사람으로 변화시켰습니다.

 3) 그리스도를 예표하기 위해서
 하나님은 시편 기자 다윗을 통해 범죄한 아담에게 약속하신 여인의 후손과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복의 근원이신 메시아를 그의 가게를 통해서 세상에 오시기로 작정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그와 같은 시편 기자 다윗을 여러 가지 점에 장차 오실 메시아의 예표로 삼으셔서 메시아가 당하게 될 고난을 미리 경험하게 하심으로 장차 다윗의 자손으로 오실 메시아가 어떻게 고난을 받고 어떻게 죽으시게 될 것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예언적인 삶을 살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시편 기자 다윗은 성령의 감동을 받아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을 예언한 것이며 그 뒤로 일천년이 지난 후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셔서 시편 기자가 부르짖었던 기도를 그대로 다 이루심으로 예수님이 바로 다윗의 자손으로 이 땅에 오신 메시아이심을 입증하신 것입니다.
(요 19:23) “군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은 뒤에, 그의 옷을 네 조각으로 나누었습니다. 그리고는 저마다 한 조각씩 나누어 가졌습니다. 그들은 속옷도 가져갔는데, 그 옷은 위로부터 아래까지 완전히 통으로 짠 것이었습니다.”
(요 19:24) “그래서 군인들은 “이것은 찢지 말고 제비를 뽑아 누가 가질지 정하자”라고 말하였습니다. 이런 일이 일어난 것은 그렇게 되리라고 말한 성경 말씀을 이루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들이 자기들끼리 내 옷을 나누고 내 옷을 가지려고 제비 뽑나이다.”
 뿐만 아니라 후일에 세상에 오신 예수님을 가리켜 사람들이 다윗의 자손 예수여! 라고 부르게 되었고, 예수님께서도 십자가에 달려 죽으실 때 오늘 시편 기자가 부르짖은 것처럼 그대로 부르짖으신 것입니다.
(마 27:46) “제구시쯤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질러 이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예수님은 영광스런 하나님의 독생자이셨음에도 불구하고 천한 인간의 육신을 입고 세상에 오셔서 하나님이 계획해 놓으신 구원의 계획을 이루시는 과정이 너무 너무 고통스러우셨기 때문에 하나님께 부르짖었으나 하나님은 시편 기자에게처럼 침묵하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버리거나 떠나시기 위한 고통이 아니라 인류를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사랑과 인류의 죄에 대한 형벌이라는 공의를 둘다 충족시키시기 위한 하나님의 계획이며 지혜이기 때문에 침묵하신 것입니다.
(롬 5: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난은 마침내 인류의 구원을 성취하였으며, 하나님은 사랑하는 독생자가 십자가에 달려 너무너무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다 목격하시면서 끝까지 참으셔야 하는 하나님의 아버지의 아픈 마음도 십자가에 함께 못 박혀 고난에 동참하신 것입니다.

결  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인생살이와 신앙생활이 너무너무 고통스러울 때가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부르짖어 구해도 하나님이 응답하시지 않고 침묵하실 때가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기도가 헛수고인 것처럼 느껴져서 낙심이 될 때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럴지라도 우리가 신앙을 버리거나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회의와 절망에 빠지지 말아야 할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시편 기자 다윗이 장차 오실 메시아의 예표로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한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을 받고 제자가 된 우리는 십자가의 복음을 증거 해야 하는 제자는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마 10:38)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막 8:34) “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그러면 우리는 하나님의 침묵 앞에서 어떠한 신앙적 자세를 지녀야 하겠습니까? 그것은 내가 시편 기자처럼 너무너무 고통스러워서 부르짖어 구해도 하나님이  응답하시지 않고 침묵하신다고 생각되어질 때 바로 오늘 시편 기자를 기억하고 예수님의 십자가를 생각하자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하나님과의 관계를 생각하면 어떤 난관도 극복할 수 있습니다. 실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아주 특별한 존재들이기 때문입니다.
(엡 1:4,5)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1) 나의 기도에 대해 침묵하시는 하나님은 여전히 '나의 하나님'이심을 의심하지 말고 믿어야 합니다.  진실한 믿음의 성도는 절망 속에서 좌절치 아니하고 실패 가운데 포기치 아니합니다. 왜냐하면 인생의 절망과 실패의 순간은 하나님께서 구원의 팔을 펼치시는 절호의 기회가 되기 때문입니다.
 2) 설령 침묵하시는 것 같고 버리신 것 같고 떠나신 것 같은 생각이 들지라도 시편 기자처럼 주야로 기도하고 부르짖어야 합니다.
 특히 신앙 때문에 고난을 당할 때 부르짖어도 응답이 없다고 낙심하지 말고, 예수께서 십자가를 앞에 놓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밤을 지새우며 부르짖어 기도하시고 십자가를 지신 주님을 기억해야 합니다.
 3) 물론 세상 역사도 나름대로 주는 여러 가지 교훈이 있지만 예언의 말씀인 성경은 단순한 역사적 교훈을 뛰어 넘어 미래에 하나님께서 이루실 비밀스런 계획들을 기록하게 하신 말씀으로 당장은 이해가 되지 않을지라도 먼 미래에 항상 하나님이 옳으셨다는 것을 깨닫는 날이 올 것입니다.
 오늘 주님의 제자로 십자가의 증인으로 택함을 받은 그리스도인들이 당하는 너무너무 큰 고통은 알고 보면 큰 축복으로 가는 지름길입니다. 그 고난을 통해 성결해지고 성숙해지고 십자가의 증인의 삶을 살게 하는 축복의 기회임을 믿어야 합니다.
 (롬8:17-18) “자녀 이면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설교 말씀을 기억하고 가사를 생각하면서 찬송가 487장을 함께 부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