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 교/이규왕목사

기쁨의 아침이 오리로다/(시 30:5-12)

미션(cmc) 2014. 5. 21. 06:19

기쁨의 아침이 오리로다

(시 30:5-12)


(시 30:5) “그의 노염은 잠깐이요 그의 은총은 평생이로다 저녁에는 울음이 깃들일지라도 아침에는 기쁨이 오리로다” (시 30:6) “내가 형통할 때에 말하기를 영원히 흔들리지 아니하리라 하였도다”  (시 30:7) “여호와여 주의 은혜로 나를 산 같이 굳게 세우셨더니 주의 얼굴을 가리시매 내가 근심하였나이다” (시 30:8) “여호와여 내가 주께 부르짖고 여호와께 간구하기를” (시 30:9) “내가 무덤에 내려갈 때에 나의 피가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진토가 어떻게 주를 찬송하며 주의 진리를 선포하리이까” (시 30:10) “여호와여 들으시고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여호와여 나를 돕는 자가 되소서 하였나이다” (시 30:11) “주께서 나의 슬픔이 변하여 내게 춤이 되게 하시며 나의 베옷을 벗기고 기쁨으로 띠 띠우셨나이다” (시 30:12) “이는 잠잠하지 아니하고 내 영광으로 주를 찬송하게 하심이니 여호와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께 영원히 감사하리이다”


  우리가 매일 자고 깨면 아침을 맞이하게 되는데 그 하루는 아침으로 시작하여 저녁으로 끝나게 됩니다.

 그러나 창조주 하나님께서 엿새 동안 천지와 만물을 지으실 때 하루에 시작은 우리와 정반대로 캄캄한 저녁으로 시작하여 밝은 아침이 올 때를 하루라고 매일 말씀하셨습니다.

(창 1:5) “하나님이 빛을 낮이라 부르시고 어둠을 밤이라 부르시니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창 1:8, 13, 19, 23, 31)

  시편 기자는 인생의 한평생을 잠간 자는 것과 같고, 아침에 피었다가 저녁에 시들어 버리는 한 포기 풀과 같고, 밤의 한 순간과 같다고 하였습니다.

(시 90:4) “주의 목전에는 천 년이 지나간 어제 같으며 밤의 한 경점 같을 뿐임이니이다” (시 90:5) “주께서 그들을 홍수처럼 쓸어가시나이다 그들은 잠깐 자는 것 같으며 아침에 돋는 풀 같으니이다”

 인간의 한 평생을 하나님의 영원하신 세계에 비하면 지극히 짧은 한 순간에 불과함에도 불구하고 어느 때는 밝은 아침으로 시작하여 캄캄한 밤으로 끝날 때가 있는가 하면, 어느 때는 캄캄한 밤으로 시작하여 밝은 아침으로 끝날 때도 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여러분은 아침과 같이 밝고 형통한 삶을 살고 있습니까? 아니면 캄캄한 밤과 같이 곤고한 삶을 살고 있습니까?

  오늘 우리는 시편 기자를 통해서 형통할 때는 어떤 믿음의 자세로, 곤고한 때를  맞이했을 때는 어떤 믿음의 자세로 살아가야 하는지를 배워야 하겠습니다.


 1.  형통할 때 

 아담의 타락한 본성을 가진 인간은 누구를 막론하고 자신의 의지로 극복하기 어려운 몇 가지의 시험과 유혹이 있다면 그 중에 하나가 명예심과 교만함입니다. 

 사단이 인류의 조상 첫 아담이나 둘 째 아담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던진 유혹의 주사위가 명예심을 부추기는 것이었습니다.


 1) 사단이 첫 아담에게 하나님이 금하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따먹으라고 유혹을 할 때 던진 미끼는 ‘(창 3:5)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고 한  것처럼 하나님과 같이 된다는 유혹이었습니다.

 첫 아담은 그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결국 하나님이 금하신 선악을 알게 하는 열매를 따먹는 죄를 범하여 인생의 캄캄한 밤을 맞이하고 말았습니다.


 2) 사단이 둘째 아담이신 예수님에게 던진 미끼는 (마 4:8) “마귀가 또 그를 데리고 지극히 높은 산으로 가서 천하 만국과 그 영광을 보여” (마 4:9) “이르되 만일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는 유혹이었습니다.

 둘째 아담 예수님은 사단에게 (마 4:10) “이에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사탄아 물러가라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 고 단연코 거절하심으로 승리하심으로 찬란한 빛으로 공생애를 시작하셨습니다.


 오늘 시편 기자의 생애는 마치 우물에서 두레박으로 깊은 샘 바닥에 고인 물을 땅위로 끌어 올리는 것처럼 천한 목동의 자리에서 이스라엘의 왕이라는 더 없이 높은 자리로 끌어 올려 주신 사람입니다. 

 물론 시편 기자의 가문은 왕가가 아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와 같이 하시지 않으셨다면 일평생 목동의 신세를 면할 수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만일 시편 기자가 그 사실을 깨달았다면 왕이 된 후에 더욱 겸손히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성경에 기록된 수많은 사람들 가운데 시편 기자만한 믿음을 가진 사람을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임에도 불구하고 시편 기자 역시 인간의 부패한 본성을 뿌리치지 못했음을 시편 기자의 생애에서 찾아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저를 포함하여 우리 모두가 범하기 쉬운 겸손을 가장한 위선과 교만이라는 죄입니다. 그러한 죄에 빠지게 되면 자신의 교만을 깨닫지 못하고 오히려 자신은 가장 겸손한 사람인 줄 착각하는 과오를 범하게 됩니다.

 오늘 시편 기자를 보십시오. 하나님이 끌어 올려 주신 은혜로 잘나갈 때 무엇이라고 큰 소리를 쳤는지 찾아볼까요?

(시 30:6) “내가 형통할 때에 말하기를 영원히 흔들리지 아니하리라 하였도다”

  여기서 ‘형통’이라는 말(wl,v, 셸레우)은 ‘평안, 번영’을 뜻하는 것이고 ‘흔들리지’라는 말(f/m 모트)은 ‘비틀거리다, 미끄러지다’ 라는 뜻의 미완료 동사로 시편 기자가 번영의 번영이 영원할 것이라고 큰 소리를 쳤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것이 자신의 힘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께서 자신을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가 아니라 굳건하게 서 있는 산처럼 하나님이 자신을 세워 주셨기 때문이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권세와 위치는 누구도 흔들지 못할 것처럼 생각하고 은연중에 교만한 마음이 문틈으로 스며드는 담배 연기처럼 시편 기자의 마음을 비집고 들어왔습니다.

 다윗의 주변에는 다윗이 명령만 내리면 목숨을 불사하고 순종할 충성스런 결사대가 삼십 명이 다윗의 주변을 에워싸고 지키고 있었습니다. 다윗은 이스라엘이 번영해지자 은근히 교만한 마음이 생기기 시작하였습니다.

 다윗이 단지 마음만 그렇게 먹었을 뿐인데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진노하셨고 사단은 다윗의 마음을 부추겨서 인구조사를 해야 하겠다는 생각을 구체화시키게 하였습니다.

(삼하 24:1) “여호와께서 다시 이스라엘을 향하여 진노하사 그들을 치시려고 다윗을 격동시키사 가서 이스라엘과 유다의 인구를 조사하라 하신지라”

 물론 다윗의 잘 못된 영웅심을 눈치 챈 충성스런 부하 요압이 그것을 알아차리고 다윗을 만류하였습니다.

(삼하 24:3) “요압이 왕께 아뢰되 이 백성이 얼마든지 왕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백 배나 더하게 하사 내 주 왕의 눈으로 보게 하시기를 원하나이다 그런데 내 주 왕은 어찌하여 이런 일을 기뻐하시나이까 하되”

 여기서 요압이 왕께 ‘이르되’라는 말(rm'a: 아마르)은  와우 계속법 미완료로 계속 간청하는 것을 뜻하는 반면에, ‘기뻐하시나이까’ 라는 말($pej, 하페츠)은 다윗이 그것을 ‘즐겼다’는 뜻의 완료형으로 이미 마음을 굳힌 상태를 뜻합니다.

 그래서 다윗은 요압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도리어 요압에게 명령하고 재촉을 하였기 때문에 요압도 어쩔 수 없이 다윗의 명령에 순종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삼하 24:4) “왕의 명령이 요압과 군대 사령관들을 재촉한지라 요압과 사령관들이 이스라엘 인구를 조사하려고 왕 앞에서 물러나”

 여기서 ‘재촉한지라“ 라는 말(qz"j 하자크)은 ’강화하다‘라는 뜻의 와우계속법 미완료로 강하게 밀어 부치는 것을 뜻합니다.

 요압이 다윗의 명령에 따라 요단을 건너 전국을 두루 돌아서 아홉달 스무날 만에 예루살렘에 이르러 총인구를 집계하여 다윗에게 보고하였습니다. 그 결과 전쟁에 나갈 수 있는 장정이 팔십만 명이나 되었고 유다의 총인구는 오심만명이나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물론 (출 30:14) “계수 중에 드는 모든 자 곧 스무 살 이상 된 자가 여호와께 드리되”라는 말씀처럼 과거 이스라엘 백성들이 스무살 이상 성전세를 내게 하기 위해 인구 조사를 한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다윗이 인구조사를 한 것은 자신의 힘을 과시하고 싶은 사단의 유혹을 이기지 못한 것 때문에 시작을 한 것입니다. 그 만큼 다윗은 여호와 하나님을 의지하는 대신 군대의 힘을 더 의지하게 되기 때문에 하나님이 이를 기뻐하시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형통한 날에 조심해야 합니다.


 2 곤고 할 때 

 사람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은 아무리 힘이 들어도 그 결과는 마음에 기쁨이 오지만 정반대로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은 일은 아무리 즐거웠을 지라도 반드시 후회가 따르는 법입니다.

 시편 기자 다윗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는 인구조사를 마치고 난 후에 다윗에게 찾아 온 것은 기쁨이 아니라 자책감과 더불어 깊은 후회였습니다.

(삼하 24:10) “다윗이 백성을 조사한 후에 그의 마음에 자책하고 다윗이 여호와께 아뢰되 내가 이 일을 행함으로 큰 죄를 범하였나이다 여호와여 이제 간구하옵나니 종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내가 심히 미련하게 행하였나이다 하니라”

여기서 ‘자책’하며 라는 말(hk;n: 나카))은 자기 자신을 ‘치고, 때리고, 죽이는 것’과 같은 마음에 사로 잡혀있는 상태를 뜻하는 와우 계속법 미완료 형입니다. 그 이유는 자신이 인구조사를 한 일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한 일이 아니라 자기를 과시하기 위한 잘못된 죄악이었음을 깨달았기 때문에 여호와 하나님께 큰 죄를 범하였다고 회개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다윗의 회개를 받지 않으시고 선지자 갓을 보내어 세 가지 징벌 중에 하나를 택하라고 회초리를 드셨습니다.

 (삼하 24:13) “갓이 다윗에게 이르러 아뢰어 이르되 왕의 땅에 칠 년 기근이 있을 것이니이까 혹은 왕이 왕의 원수에게 쫓겨 석 달 동안 그들 앞에서 도망하실 것이니이까 혹은 왕의 땅에 사흘 동안 전염병이 있을 것이니이까 왕은 생각하여 보고 나를 보내신 이에게 무엇을 대답하게 하소서 하는지라”

 만일 칠년 기근을 택하면 온 국민이 다 고통을 당해야 하는 것이고, 석달 동안 원수들에게 쫓겨 도망을 다니는 일은 지금까지 사울에게 너무나 많은 고통을 겪었기 때문에 두 번 다시 생각조차 하기 싫은 고통이고, 부득불 가장 짧은 사흘 동안 전염병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깨달아야 할 것은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는 죄는 그것이 아무리 그럴듯한 명분으로 미화를 한다고 할지라도 누구보다 자신이 먼저 양심의 가책이 일어나게 되고, 주변 사람들의 협조보다 만류를 받게 되고, 그결과는 고통이라는 것입니다.

 설령 그 때문에 회개를 할지라도 다 용서되는 것이 아니라 마치 교통법규를 위반했을 때 즉시 운전면허가 취소되는 것이 아니지만 반드시 범칙금과 벌점이 따라오는 것처럼 잘못된 줄 알면서 범하는 죄에 대해서는 설령 회개를 할지라도 형벌이 따라 온다는 것입니다.

 시편 기자 다윗이 사흘 동안의 전염병을 선택하였을 때 백성들에게만 전염병이 찾아 온 것이 아니라 시편 기자 자신도 병에 걸려 죽을 고생을 하였음을 오늘 성경에서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시 30:2) “여호와 내 하나님이여 내가 주께 부르짖으매 나를 고치셨나이다”

  여기서 ‘부르짖으매’라는 말([w"v; 샤와 )은 도우심을 요청하며 부르짖는 것을 뜻하며, ‘고치셨나이다’ 라는 말은 ‘치료하다, 고치다, 건강하게 되다’라는 뜻의 와우 계속법 미완료 형으로 단번에 고침을 받은 것이 아니라 점진적으로 치료가 된 것을 뜻합니다. 그 고통이 얼마나 컸으면 무덤으로 내려가는 것 같다고 하였습니다.

(시 30:3) “여호와여 주께서 내 영혼을 스올에서 끌어내어 나를 살리사 무덤으로 내려가지 아니하게 하셨나이다”

 시편 기자가 한 순간 헛된 공명심에 사로 잡혀 하나님의 도우심을 망각하고, 자만하며, 하나님을 의뢰하기보다 자신의 권력을 자랑하려던 교만을 꺾으시기 위해 치신 하나님의 손은 매를 들어 때리기만 하는 손이 아니라, 아픈 곳을 싸매시고 병든 것을 고치시는 치료의 손이기도 합니다.

(욥 5:18) “하나님은 아프게 하시다가 싸매시며 상하게 하시다가 그의 손으로 고치시나니”

 그러므로 우리가 걸리지 말아야 할 병은 전염병이 아니라 불신앙이라는 병이요 자만과 교만이라는 병이며 그 병은 반드시 그에 상응하는 고통을 가져다준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대부분 다윗과 같은 위치에 되면 세월호 참사처럼 책임전가하기에 급급하지만 다윗은 자기의 죄를 솔직히 시인하고 아무에게도 그 책임을 전가시키지 않고 그에 따르는 징계의 형벌을 순순히 받아드린 그 자세가 바로 하나님이 다윗을 버리지 않으시고 끝까지 들어 쓰신 좋은 점이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시편 기자에게서 인간이기 때문에 설령 죄를 범하고 그 때문에 시편 기자처럼 곤고하게 되었을 때 우리가 어떻게 하는 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모습인지를 배워야 하겠습니다.


 3. 찬송하며, 기억하며, 감사하라

 시편 기자의 교만을 꺾으시기 위해 징계의 채찍을 들으셨던 하나님이 사흘 후에  약속하신대로 질병을 거두시고 치료하여 주셨을 때 시편 기자는 제일 먼저 한 일은 여호와 하나님을 높이는 일이었습니다. 

 그 이유는 시편 기자가 하나님이 내리신 형벌로 인해 전염병에 걸려 죽어갈 때 제일 기뻐한 사람들은 시편 기자의 원수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께서 시편 기자의 회개의 기도를 들으시고 무덤에 내려가지 않게 하심으로 원수들이 기뻐하지 못하게 하신 것을 생각하니 그동안 고통이 아무리 컸을지라도 자신을 죽이지 않으시고 고통 중에서 치료하여 주신 여호와 하나님을 높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시 30:1) “여호와여 내가 주를 높일 것은 주께서 나를 끌어내사 내 원수로 하여금 나로 말미암아 기뻐하지 못하게 하심이니이다”

(시 30:3) “여호와여 주께서 내 영혼을 스올에서 끌어내어 나를 살리사 무덤으로 내려가지 아니하게 하셨나이다”

 시편 기자는 그와 같은 하나님의 징계를 통해서 무엇보다 크게 깨닫게 된 것은 하나님의 본심이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자신의 죄에 대해서 징계하시는 것은 마땅한 일이지만 어떤 부모처럼 아이의 잘못을 깨우치기 위해 매를 들었다가 자신의 감정을 추수 리지 못해서 징계의 매가 아니라 무자비한 아동 폭력으로 발전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합니다.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께서 죄에 대해서 내리시는 노여움은 잠깐이고 회개하고 부르짖을 때에 응답하시고 치료해 주시고 구원해주시는 은총은 영원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시편 기자가 곤고한 중에 깨달은 것은 인간이라는 존재는 형통할 때 교만하기 쉽고 배은망덕하기 쉽다는 것과 더불어 여호와 하나님의 본심은 죄는 미워하시지만 그 죄로 인해서 징계를 당하는 죄인에 대한 사랑은 변함이 없으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죄에 대해서 내리시는 하나님의 노여움은 잠깐이지만 그 회개한 죄인에게 베푸시는 은총은 일평생 동안 계속되어짐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럼으로 설령 오늘 내가 당하는 고통이 하루 중에 어두운 밤과 같이 낮동안에는 다 나은 것 같았던 감기 몸살이 해가 떨어지게 되면 더 심해지는 것처럼 설령 하나님이 나를 고통의 밤 가운데 몰아 넣으시는 것 같지만 그 밤 동안에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회개하고 부르짖으면 하나님은 그 사람을 위해 찬란한 아침을 준비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시 30:5) “그의 노염은 잠깐이요 그의 은총은 평생이로다 저녁에는 울음이 깃들일지라도 아침에는 기쁨이 오리로다”

 여기서 ‘잠깐’ 이라는 말([g'r,, 레가)은 ‘순간, 찰라’라는 아주 빠른 시간을 뜻하고, ‘평생’이라는 말(hy:j)은 ‘생존하는 동안, 일평생’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마치 하나님을 폭군처럼 오해하고 있는 성도들을 향해 하나님을 찬송하고. 기억하고 감사하자고 격려하기까지 하였습니다.

(시 30:4) “주의 성도들아 여호와를 찬송하며 그의 거룩함을 기억하며 감사하라”


 결  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경에 기록된 수많은 사람들의 행적은 우리의 거울이 되는 사람들입니다. 그 중에 가장 확실한 거울이라고 할 수 있는 오늘 성경의 시편 기자는 한평생을 살아가는 동안 수많은 밤과 낮을 경험한 사람입니다. 형통과 곤고함을 맛본 사람입니다.

 물론 여호와 하나님은 전능하시기 때문에 우리의 한평생을 곤고한 밤이 없는 형통한 낮만을 주실 수 있는 분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하시지 않는 까닭은 아니 전능하시지만 그렇게 하실 수 없는 까닭은 우리의 부패한 본성 때문입니다.

 만사가 다 하나님의 은혜로 잘되어지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럴 때면 영락없이 교만 마귀가 들어가서 자만하고, 거만하고, 고집스러워지고, 기도하기를 중단하고, 마치 자신의 힘으로 된 것처럼 자기를 높이고, 자기를 자랑하다가 결국 자멸하게 되기 때문에 항상 밝은 낮만을 주실 수 없다는 것입니다.  

 만일 여호와 하나님께서 시편 기자에게 하신 것처럼 형통하다고 자만할 때 하나님께서 그 얼굴을 가리시는 순간 우리는 파멸에 이르게 되고 만다는 것을 깨닫고 무엇보다 겸손해야 합니다. 

 배은망덕한 교만은 파멸로 신속히 달려가는 비탈길이지만 겸손은 찬란한 아침을 가져다주는 지름길입니다. 그래서 성경 여러 곳에 겸손하라고 신신 당부를 하시는 것입니다.

(사 57:15) “지극히 존귀하며 영원히 거하시며 거룩하다 이름하는 이가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내가 높고 거룩한 곳에 있으며 또한 통회하고 마음이 겸손한 자와 함께 있나니 이는 겸손한 자의 영을 소생시키며 통회하는 자의 마음을 소생시키려 함이라”

 설령 캄캄한 밤을 맞이한 것처럼 곤고한 날을 맞이하였을지라도 절망하지 말고 시편 기자처럼 자신의 죄와 허물을 깨닫고 하나님께 회개하고 부르짖어 도우심을 구하기만 하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입히셨던 베옷을 벗기시고 기쁨으로 띠를 띠우실 것입니다. 

 그동안의 슬픔은 슬퍼했던 날만큼 기쁨의 날로 환전하여 주시며 춤을 추게 하실 것이라는 시편 기자의 믿음을 가지고 형통할 때나 곤고할 때나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며 감사하기를 중단하지 않는 삶을 살기로 굳게 다짐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시 30:12) “이는 잠잠하지 아니하고 내 영광으로 주를 찬송하게 하심이니 여호와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께 영원히 감사하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