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께서 쌓아두신 은혜
(시 31:19-24)
(시 31:19) “주를 두려워하는 자를 위하여 쌓아 두신 은혜 곧 주께 피하는 자를 위하여 인생 앞에 베푸신 은혜가 어찌 그리 큰지요” (시 31:20) “주께서 그들을 주의 은밀한 곳에 숨기사 사람의 꾀에서 벗어나게 하시고 비밀히 장막에 감추사 말 다툼에서 면하게 하시리이다” (시 31:21) “여호와를 찬송할지어다 견고한 성에서 그의 놀라운 사랑을 내게 보이셨음이로다” (시 31:22) “내가 놀라서 말하기를 주의 목전에서 끊어졌다 하였사오나 내가 주께 부르짖을 때에 주께서 나의 간구하는 소리를 들으셨나이다” (시 31:23) “너희 모든 성도들아 여호와를 사랑하라 여호와께서 진실한 자를 보호하시고 교만하게 행하는 자에게 엄중히 갚으시느니라” (시 31:24) “여호와를 바라는 너희들아 강하고 담대하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월 첫 주를 맞이했습니다. 늘 행복하기만 원하고 국가적으로 가정적으로 개인적으로 어려운 일이 없기를 바라지만 바람 잘 날이 없습니다. 설령 인생살이가 아무리 힘들거나 정반대로 인생살이가 아무리 즐거워도 항상 잊지 말아야 한 가지가 있다면 과연 무엇일까요?
외줄을 타는 광대를 보면 외줄을 타서 양반다리를 하고 앉기도 하고, 제자리에서 한 바퀴 돌기도하고, 춤을 추기도하고, 별짓거리를 다 하지만 어릿광대는 한 순간에도 잊지 않는 것은 몸의 균형을 유지하는 일입니다.
만약에 군중들의 박수소리에 넋을 잃고 한눈을 팔다가 균형을 잃는 순간 광대의 몸은 외줄에서 벗어나 땅에 떨어지게 되고 박수치던 군중들의 야유와 더불어 온 몸을 크게 다치게 되고 말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주님의 재림과 천국을 대망하던 옛 선배들의 신앙과 달리 오로지 현세에서 잘 먹고 잘사는 것이 구원의 궁극적인 소망이 되게 되면 반드시 언젠가는 낙심하고 좌절하는 시험에 빠지게 됩니다.
만일 그렇게 되면 사후의 천국은 물론 내일에 대한 소망마저 희박해져서 내가 처한 현실 여하에 따라 믿음도 좌지우지 되는 것입니다. 사단과 이단은 바로 이러한 약점을 노리고 어려움에 처한 교회와 성도들을 공략해 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의 삶이 힘들든지 아니면 즐겁든지, 언제 어디서 무엇을 하든지 우리가 잊지 말고 외줄을 타는 광대처럼 잊지 말고 주목해야 할 한 가지가 있다면 과연 그것이 무엇인지 오늘 시편 기자에게거 배워야 하겠습니다.
1. 시편 기자의 처지
오늘 시편에 보면 시편 기자가 여러 가지 어려움 속에서 많은 고통을 겪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1) 근심으로 온 몸이 쇠약해져 있습니다.
(시 31:9) “여호와여 내가 고통 중에 있사오니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내가 근심 때문에 눈과 영혼과 몸이 쇠하였나이다”
여기서 ‘근심’이라는 말(s['K, 카아스)는 ‘속상함, 분노, 슬픔, 원통함’을 뜻하는 말이고, ‘쇠하여’라는 말()은 ‘야위고, 말라 빠지다’라는 뜻으로 재기하기 어려운 완료상태입니다.
2) 하루 이틀이 아니라 일생을 슬픔과 탄식으로 보내고 있습니다.
(시 31:10) “내 일생을 슬픔으로 보내며 나의 연수를 탄식으로 보냄이여 내 기력이 나의 죄악 때문에 약하여지며 나의 뼈가 쇠하도소이다”
여기서 ‘슬픔’이라는 말(@/gy: 야곤)은 ‘큰 슬픔, 비탄, 고통, 괴로움’으로 한 평생을 마치고 있다는 뜻으로 평생을 슬픔과 탄식으로 보내는데 그 원인은 누구도 아닌 자신의 죄악 때문에 자신이 그렇게 쇠약해진 것이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3) 외부적으로는 모든 대적과 이웃에게 욕을 당하고 있습니다.
(시 31:11) “내가 모든 대적들 때문에 욕을 당하고 내 이웃에게서는 심히 당하니 내 친구가 놀라고 길에서 보는 자가 나를 피하였나이다”
여기서 대적들 때문에 ‘욕을 당하고’ 라는 말(hP;r]j, 헤르파))은 ‘비난, 치욕, 조롱’을 당하고 있을 때 자기를 도와주어야 할 이웃이나 친구들이 시편 기자 때문에 불이익을 당할까 두려워서 자기를 피한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마음이 아플까요? 아마도 육체적인 고통보다 더 고통스러웠을 것입니다.
4)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무관심한 존재라는 것입니다.
(시 31:12) “내가 잊어버린 바 됨이 죽은 자를 마음에 두지 아니함 같고 깨진 그릇과 같으니이다”
아무리 사랑하는 가족도 살아 있을 때와 죽은 후와 다른 것은 시간이 흘러 갈수록 점차 마음에서 잊어버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고려 청자라고 할지라도 그것이 완벽하게 보존되었을 때 주인의 사랑을 받는 것이지 실수하여 박살이 났다면 그 쪼가리를 진열장에 놓고 감상하는 것은 골동품 뿐이지 집밖으로 버리게 됩니다.
과거에 자자하던 시편 기자의 명성이 지금은 죽은자와 같고 깨어진 그릇쪼가리와 같다는 것입니다.
현대인들이 직장에서 퇴직 당하는 것을 두려워하는 이유가 단순히 돈 때문이 아니며 주변 사람들로부터 소외당하는 외로움이라는 말과 크게 다를지 않을 것입니다.
5) 그나마 아는 사람들조차 비방과 어떻게 하든지 죽이려고 할 뿐입니다.
(시 31:13) “내가 무리의 비방을 들었으므로 사방이 두려움으로 감싸였나이다 그들이 나를 치려고 함께 의논할 때에 내 생명을 빼앗기로 꾀하였나이다”
아무리 인내심이 많은 사람도 견디기 어려운 것은 사실이 아닌 것을 사실처럼 말을 퍼뜨려 중상하고 작당을 하여 죽이려고 하기 때문에 마치 안개나 어둠에 둘러 싸인 것처럼 사방이 두려움에 둘러싸여 있다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무엇보다 견디기 힘든 고통은 사실이 아닌 것을 사실처럼 꾸며 사람들이 중상모략 할 때일 것입니다.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부패한 인간의 죄악은 돌고 도는가 봅니다. 오늘 시편 기자가 당하고 있는 고통을 지금 우리 시대에도 그대로 재현되고 있습니다. 요즘 사람들이 가장 견디기 힘들어 하는 것은 인터넷에 올린 악플 때문에 시달려 심지어 자살을 하는 일이 자주 일어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남을 비판하지 말라고 하신 것은 사실을 가리키는 것임에도 그렇게 말씀하셨는데 하물며 근거 없는 말로 남을 비방하고 험담하는 것을 주님이 얼마나 미워하시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은 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 교회 안에서도 그와 같은 비난과 비방과 악플들이 난무하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것은 그것이 십계명을 범하는 자살 행위라는 사실조차 염두에 두지 않은 채 전혀 양심의 가책조차 느끼지 못하는 것은 참으로 불행한 일입니다.
오늘 우리가 사는 시대가 시편 기자가 살던 시대와 별반 차이가 없기 때문에 시편기자의 경험이 전혀 남의 일처럼 생각되지 않는 사람들에게 오늘 성경은 큰 위로와 교훈을 주는 말씀일 것입니다.
2. 시편 기자의 믿음
사람이 얼마나 지식이 있는가? 하는 것은 졸업장만 보면 알 수 있지만 사람이 얼마나 지혜로운가? 하는 것은 그 사람이 위기에 처했을 때 어떻게 그것을 대처하는가? 하는 것을 보면 짐작할 수 있습니다.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사람이 얼마나 성경을 많이 하는가 하는 것은 성경에 대한 지식이 얼마나 많은가? 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지만, 그 사람이 얼마나 믿음이 좋은가? 하는 것은 그 사람이 위기에 처했을 때 어떻게 그것을 믿음으로 이겨나가는가? 하는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네덜란드에 가면 헷 어래스투이스 라는 호텔이 있는데 본래 그 호텔은 악명 높은 감옥이었다고 합니다. 105 명의 마약범들을 수감하였던 감옥을 최고급 호텔로 개조를 하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더욱 호기심을 갖고 이 호텔을 찾는다고 합니다.
오늘 성경의 주인공 시편기자가 마치 헷 어래스투이스 감옥과 같이 헤쳐 나올수 없는 고통 중에서도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고 끝까지 럭셔리한 믿음으로 승화시키고 있는 모습을 오늘 성경에서 찾아 볼 수 있습니다.
1) 고통 중에서 오직 주께 피하였습니다.
(시 31:1) “[다윗의 시, 인도자를 따라 부르는 노래] 여호와여 내가 주께 피하오니 나를 영원히 부끄럽게 하지 마시고 주의 공의로 나를 건지소서”
구라파를 여행하게 되면 도로 주변 높은 산악 지대에 간간히 높은 산성과 요새를 볼 수 있습니다. 그 이유는 산 아래에서 공격하는 모습이 다 노출이 되기 때문에 그 성벽을 쉽게 오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시편 기자는 사방에서 좁혀오지만 한 순간도 잊지 않은 것은 여호와 하나님을 바라보고 여호와 하나님께 피하는 일이었습니다. 그 이유는 세상에서 최상의 피난처는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이 난공불락의 산성과 요새가 된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시 31:2) “내게 귀를 기울여 속히 건지시고 내게 견고한 바위와 구원하는 산성이 되소서” (시 31:3) “주는 나의 반석과 산성이시니 그러므로 주의 이름을 생각하셔서 나를 인도하시고 지도하소서” (시 31:4) “그들이 나를 위하여 비밀히 친 그물에서 빼내소서 주는 나의 산성이시니이다”
산성에 올라 피하여 있는 사람은 아무리 산 아래 성밖에서 원수들이 공격해 온다고 할지라도 두려워하지 않는 것처럼 사방에서 대적들로부터 공격을 당한다고 할지라도 두려워하거나 낙심하지 않을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님만이 최선의 산성이 됨을 믿기 때문입니다.
시편 기자가 그렇게 주께 피한 이유는 생명의 위협에서 건짐을 받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세상의 죄악을 멀리하는 길이 오직 주께 피하는 길임을 믿기 때문입니다.
(시 31:6) “내가 허탄한 거짓을 숭상하는 자들을 미워하고 여호와를 의지하나이다”
그렇습니다. 죄악된 세상에서 나를 지킬 수 있는 최선의 비결은 연약한 내 양심을 믿는 것이 아니라 산성처럼 견고하신 여호와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2) 자신의 생명까지 주께 맡겼습니다.
(시 31:5) “내가 나의 영을 주의 손에 부탁하나이다 진리의 하나님 여호와여 나를 속량하셨나이다”
세상 어느 곳에도 맡길 수 없는 것이 인간이 마지막 세상을 떠나게 될 때 그 영혼입니다. 우리 주변에 보면 죽은 사람이 가는 공원묘지나 납골당은 있지만 죽은 사람의 영혼을 맡길 수 있는 곳은 아무데도 없습니다.
그러나 시편 기자는 자신의 영혼을 주의 손에 부탁한다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부탁’ 이라는 말(jf'B 바타흐)은 ‘ 믿다, 신뢰하다, 의지하다, 안심하다, 안전하다’ 라는 뜻의 완료형으로 맡기기만 하면 편안하고 안심이 되는 피난처라는 것입니다.
인간은 반드시 언젠가는 한 번 세상을 떠나야만 하는데 그 때 안심하고 맡길 수 있는 영혼의 보관소는 유일하게 하나님 한 분 뿐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실 때 마지막 남기신 일곱 마디 말씀 중에 하나님 아버지께 ‘내 영혼을 부탁하나이다(눅 23:46)라고 하셨습니다.
또한 스데반 집사도 복음을 전하다가 돌에 맞아 마지막 순교할 때 동일하게 내 영혼을 부탁한다고 하였습니다(행 7:59)
(눅 23:46) “예수께서 큰 소리로 불러 이르시되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하고 이 말씀을 하신 후 숨지시니라” (행 7:59) “그들이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이르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이는 오늘 우리도 언젠가는 시편 기자처럼 우리의 영혼을 하나님께 맡겨야만 하는 사람들임을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3) 그러하여도 오직 주만 의지하고, 주만 내 하나님이라고 하였습니다.
(시 31:14) “여호와여 그러하여도 나는 주께 의지하고 말하기를 주는 내 하나님이시라 하였나이다”
여기서 ‘의지’한다는 말(jf'B 바타흐)은 ‘확고 부동함이나 견고함을 뜻하는 말로 신뢰할 만한 사물이나 사람을 뜻하는 것으로 그 결과는 행복감과 안도감이 따른다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조건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무슨 거래를 하거나 무슨 일을 할 때 제일 먼저 따지는 것이 조건에 맞는가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살아오는 것이 익숙해진 사람이 하나님을 믿을 때에도 조건이 맞지 않으면 좀처럼 마음을 열지 않거나 끝까지 신뢰하지 못하게 됩니다.
그래서 신앙에는 두 종류가 있습니다. 하나는 무엇-하면, 무엇하니까 믿는 사람과 무엇- 할지라도, 무엇-하여도 믿는 사람입니다. 또 하나는 무엇-할지다도 믿음을 포기하지 않은 사람이 다니엘과 그 세친구들과 같은 사람입니다.
(단 3:18)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이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
오늘 시편 기자도 그에 못지않았습니다. 다른 사람 같으면 그처럼 열심히 하나님을 의지하였는데도 고난이 그치지 않을 때 얼마든지 낙심할 수 있습니다. 만일 교회에 출석한 모든 사람이 낙심하지 않고 끝까지 예수를 믿는다면 벌써 복음화가 이루어졌을 것입니다.
4) 자신의 미래와 원수 갚는 일을 몽땅 다 하나님께 다 맡겼습니다.
(시 31:15) “나의 앞날이 주의 손에 있사오니 내 원수들과 나를 핍박하는 자들의 손에서 나를 건져 주소서” (시 31:18) “교만하고 완악한 말로 무례히 의인을 치는 거짓 입술이 말 못하는 자 되게 하소서”
사실 어느 누구를 막론하고 자신의 미래를 장담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유한한 인간이 가지고 있는 최대의 약점은 미래를 아는 지식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마치 자신의 미래를 자기의 손으로 좌지 우지 할 수 있는 것처럼 착각합니다. 그러나 알고보면 그것은 월권입니다. 미래에 대해서 좌지우지 할 수 있는 권한은 오로지 영원하신 하나님 뿐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이 자신의 미래를 좌우할 수 있는 것처럼 착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만일 그것이 인간의 힘으로 가능하다면 오늘을 불행하게 사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오늘은 지나간 어제의 내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불행을 어제 이미 알았다면 그것을 다 피해갔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은 어제 오늘을 모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내일은 내 마음대로 좌지우지할 수 있는 날이 아니라 오로지 하나님의 통치영역임을 깨닫고 시편 기자처럼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5) 오늘이 힘들지라도 하나님이 준비해 놓으신 내일의 축복을 믿었습니다.
(시 31:19) “주를 두려워하는 자를 위하여 쌓아 두신 은혜 곧 주께 피하는 자를 위하여 인생 앞에 베푸신 은혜가 어찌 그리 큰지요”
여기서 ‘주를 두려워하는 자’라는 말(arey:, 야레)을 다른 번역에서는 ‘주를 경외하는 자’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것이 무슨 뜻임을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시편 기자는 사방으로 어려움을 당함에도 불구하고 변함없이 여호와 하나님만을 바라보고, 의지하고, 두려워하는 까닭은 광신도였기 때문이 아니라 남다른 믿음과 소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비록 현재 어려움이 사방에서 밀려들지라도 변함없이 여호와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를 결코 버려두시지 않는 다는 사실을 믿었습니다.
(시 31:20) “주께서 그들을 주의 은밀한 곳에 숨기사 사람의 꾀에서 벗어나게 하시고 비밀히 장막에 감추사 말 다툼에서 면하게 하시리이다”
3. 시편 기자의 노래
나무뿌리가 건강해야만 거기서 싹이 돋고 줄기가 자라고 가지가 뻗어 꽃과 열매를 맺게 됩니다. 그러나 뿌리가 견실하지 못하면 꽃은 지고 잎이 시들고 가지는 말라 결국 나무까지 죽게 됩니다.
오늘 시편 기자의 믿음은 마치 건강한 나무처럼 시련의 겨울을 이겨내고 때가 되니 거기서 싱그러운 새움이 돋고 아름다운 꽃을 피워내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시편 기자가 여러 가지 시련과 질병과 고통을 겪으면서도 절망과 탄식과 한숨만이 흘러넘칠 수밖에 없는 처지에서도 낙심하지 않고 1) 주께 피하고 2) 주를 반석과 산성으로 삼고 3) 죽음의 공포 속에서도 영혼까지 맡기고 4)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거짓을 미워하고 5) 자신을 위해 하나님이 마련해 놓으신 내일의 축복을 믿고 하나님의 사랑을 노래하고 또 다른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권고하였습니다.
이같은 시편 기자의 모습은 구원받은 성도가 비록 세상에서 고난을 당한다고 할지라도 그 때 희망의 끈을 놓치지 말고 반드시 해야 할 일이 무엇이어야 하는가?를 잘 나타내 보여주는 모습입니다.
1) 하나님의 사랑을 노래하라.
시편 기자가 너무나 많은 고난을 겪고 있는 모습만 바라보면 하나님이 정말 시편 기자를 사랑하고 계시는가 하는 것이 의문이 들 정도입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시편 기자를 징계하시거나 버리신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그렇다면 그 고통을 겪는 시편 기자의 심정은 더 힘들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시편 기자도 한 때 “근심 중에 있었을 때, 나는 “하나님은 나를 보실 수 없어! 내가 이제 주님의 눈 밖에 났구나!” 라고 생각하고 주께서 나를 멸하시는 줄 알고 무서워 벌벌 떨며 살려달라고 울부짖은 때도 있었지만 하나님께서 시편 기자의 기도를 들으셨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시 31:22) “내가 놀라서 말하기를 주의 목전에서 끊어졌다 하였사오나 내가 주께 부르짖을 때에 주께서 나의 간구하는 소리를 들으셨나이다”
시편 기자는 고난의 과정을 통해서 오히려 믿음이 견고해졌으며, 무엇보다 크게 깨달은 것 한 가지는 하나님은 결코 나를 버리시는 분이 아니라 한결같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깨닫고 그 하나님의 사랑을 노래하였습니다.
(시 31:21) “여호와를 찬송할지어다 견고한 성에서 그의 놀라운 사랑을 내게 보이셨음이로다”
그렇습니다. 아무리 믿음이 좋은 사람도 너무 고난이 오래가고 견디기 어려울 정도로 고통이 심해지면 마음이 약해서 흔들릴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성경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때 만일 기도를 쉬거나 성경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않게 되면 마귀가 그 틈을 비집고 들어와 더욱 낙심하게 하고 원망하고 불평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흔히 ‘시험을 당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고전 10:13) “누구나 겪는 시험 이외에 여러분에게 닥칠 시험은 없습니다. 하나님은 신실한 분이셔서 여러분이 감당할 수 있는 능력 이상의 시험을 당하도록 내버려 두지 않으십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시험을 당할 때에 시험을 견디고 거기서 빠져 나올 수 있는 길을주십니다.”
2)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전하였습니다.
(시 31:23) “너희 모든 성도들아 여호와를 사랑하라 여호와께서 진실한 자를 보호하시고 교만하게 행하는 자에게 엄중히 갚으시느니라”
여기서 ‘성도들’ 이라는 말( dysij, 하시드)은 앞서 하나님이 마련해 놓으신 복을 받게 될 ‘경건한 자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자들,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을 뜻합니다.
(시 31:19) “주를 두려워하는 자를 위하여 쌓아 두신 은혜 곧 주께 피하는 자를 위하여 인생 앞에 베푸신 은혜가 어찌 그리 큰지요”
시편 기자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에게 이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하나님을 두려워하지만 말고 보다 더 적극적으로 하나님을 사랑하자고 권하고 있습니다.
흔히 남을 가르치거나, 남에게 복음을 전하는 경우에 두 가지 유형이 있습니다. 하나는 책임 때문에 그 방법론과 내용을 배워서 그것을 남에게 가르치고 전하는 경우, 또 하나는 내가 그것을 경험하면서 너무나 좋았기 때문에 내가 사랑하는 이웃에게 그 경험을 나누고 체험하게 하기 위해서 가르치고 전하는 경우입니다.
오늘 시편 기자가 ‘너희 모든 성도들아 여호와를 사랑하라’고 외치는 것은 전자가 아니라 후자의 경우입니다.
자식을 사랑하는 부모가 때로 매를 든다고 해도 그것은 사랑 때문입니다. 때로 자식의 무리한 요구를 들어주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그것도 사랑 때문입니다. 하물며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은 부모 사랑보다 더 크고 영원하신 사랑인 것입니다.
3) 강하고 담대하라고 하였습니다.
오늘 시편 기자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향하여 ‘강하고 담대하라’고 촉구하고 있습니다. 과연 그 이유가 무엇 때문일까요?
(시 31:24) “여호와를 바라는 너희들아 강하고 담대하라”
여기서 ‘바라는’이라는 말(lj'y:, 야할)은 ‘희망을 가지고 기대하고 기다리고 바란다’는 현재 분사로 믿음이 과연 무엇인가?에 대한 가장 확실한 정의를 내리는 말입니다. 또한 ‘담대하라’는 말( $mea}y"w])은 미완료 동사입니다.
그렇습니다. 만일 성도들이 현실을 살아가면서 어떤 이유이든지 강하고 담대하지 못하다는 것은 하나님을 믿지 못한다는 증거입니다.
아무리 믿음이 좋다고 하는 사람도 하나님에 대한 신뢰가 무너질 때 두려움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그러나 끝까지 하나님을 신뢰하는 사람은 두려움에 사로잡힐 이유가 없습니다.
번지 점프를 하는 사람들을 보면 뛰어내리기 전에 비명을 지르기고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뛰어 내리는 것은 두 발목을 든든한 줄이 묶고 있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신앙은 세상에서 가장 견고한 하나님과 우리를 묶어주는 밧줄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끝까지 신뢰하는 사람은 일시적으로 염려할 수 있으나 곧 담대히 일어서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믿음은 바라고 기다리는 소망입니다. 물론 믿음의 사람이 현재 시편 기자처럼 어려움을 당할 때 낙심하지 않고 하나님을 바라는 자를 위해서 쌓아 놓으신 은혜를 바라본다면 낙심이 아니라 오히려 강하고 담대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결 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은 어제의 미래였던 것처럼 인생 여정이 끝나는 죽음 너머에는 반드시 영원한 사후의 세계가 있을 수밖에 없으며, 또한 성경 여러 곳에 내세의 천국과 영생에 대한 약속들이 많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어떤 일을 만날지라도 그것 때문에 희망을 잃지 말아야 하고 현실이 힘들고 어려울 수 록 그것을 이겨내는 최선의 방법은 내일에 대한 소망을 확고하게 붙잡는 삶입니다.
과연 내일에 대한 소망을 확고하게 붙잡는 것이 어떻게 사는 것인지 오늘 시편 기자에게서 배워 아무리 오늘이 고통스러울지라도 그 때문에 내일에 대한 소망까지 함몰당하지 않게 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설령 시편 기자처럼 힘들고 어렵다 할지라도 낙심하지 말고, 온갖 비방과 악한 꾀를 계획하며 나를 괴롭히는 인간들 때문에 하나님을 원망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부르짖는 자를 괴롭히는 원수들을 반드시 갚아주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세상에서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택하심을 받은 자를 위해 놀라운 은혜를 준비해 놓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어떤 경우에도 낙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파도를 잔잔케 하시고 온 세상의 어두움을 한 순간에 몰아내고 찬란한 빛으로 가득하게 하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창조주 하나님께서 엿새 동안 걸쳐 천지와 만물을 창조 하실 때마다 캄캄한 어둠이 사라지고 밝은 빛이 비치고, 무질서가 사라지고 질서정연하게 만들어지며, 공허함이 사라지고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세상으로 만들어졌습니다.
그 하나님은 변함없이 오늘 우리가 어둠에 처해 있을 때 밝은 빛을 쌓아 놓으셨다고 새아침에 아낌없이 빛을 쏟아 부어주시는 분입니다.
그 하나님은 그의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선하심’을 준비해 놓고 계시며 인생들 앞에서 그 은총을 베푸시는 분입니다.
(시 31:19) “주를 두려워하는 자를 위하여 쌓아 두신 은혜 곧 주께 피하는 자를 위하여 인생 앞에 베푸신 은혜가 어찌 그리 큰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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