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연수과/백향목

기독교 민족주의 이야기

미션(cmc) 2016. 12. 24. 18:31
 
 

기독교 민족주의 이야기 


1919년 3월 1일 오후 2시 종로의 파고다 공원에는 4000여 군중이 입추의 여지없이 모인 가운데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저들이 기다린 사람들은 민족대표들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민족대표들은 오지 않고 있었다.

그러자 열혈청년 한명이 팔각정 단상에 올랐다. 그리고 독립선언서를 낭독하였다.“오등은 자에아 조선은 독립국임과 조선인의 자유인임을 선언하노라” 그리고 곧장 만세를 부르짖는 함성이 종로거리를 뒤덮었다.

당시 파고다 공원에서 독립선언식을 주관하기로 한 민족 대표들은 오전부터 파고다 공원이 아닌 태화관으로 모이고 있었다. 이들은 육당 최남선이 기초한 ‘독립선언서’와 한용운이 작성한 ‘공약삼장’을 낭독한 후, 종로 경찰서에 압송되면서 3.1운동의 막이 오른 것이었다.

1910년 일본제국주의의 국권침탈이후 식민지 조선에서 민중들의 삶은 황폐화되고 있었다. 일제의 강압적 통치 아래 식민지 조선민중의 투쟁은 계속 된다. 채응언 부대의 의병투쟁이 1915년까지 지속되었고 대한광복회나 조선국민회와 같은 비밀결사들이 조직됐다. 이러한 상황에서 1914년 발발한 제1차 세계대전은 종래 약육강식으로 대표되는 사회진화론적 세계관과 그에 입각해 정당화되던 제국주의 열강의 식민지 침탈에 근본적 문제를 제기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러한 가운데 1919년 1월 21일 고종황제가 급서했다. 고종의 갑작스러운 죽음과 그의 서거를 둘러싼 독살설은 일제의 압제아래 출구를 찾지 못하던 조선민중들에게는 뇌관과 같은 것이었다.

고종의 서거에 가장 발빠르게 대응한 것은 일본에 유학하던 조선 청년들이었다. 1919년 2월 8일 조선청년독립단은 도쿄의 YMCA 회관에 모여 ‘일본에 대한 영원한 혈전’을 선언한다. 2.8 독립선언은 국내에 자극을 주었고 다양한 채널로 준비되던 만세시위는 단일 지도부 구성에 합의하면서 빠르게 진전 되었다. 바로 이 중심에 남강 이승훈 선생이 계셨다.

이 만세시위로 4만 6000명이 검거되었고 2만 3000명의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3.1운동은 이념과 차이를 초월해 전개된 민주적 항일운동이었다. 바로 이러한 3.1정신의 중심에 한국기독교가 있었다. 한국기독교는 ‘기독교 민족주의’라는 용어를 해산시키면서 일제로부터의 민족해방이야말로 하나님으로 부여 받은 거룩한 임무로 인식되면서 한국근대사의 근간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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