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 교/이규왕목사

오직 하나님께만/(계 19:9-10)

미션(cmc) 2017. 1. 15. 07:23

오직 하나님께만
(계 19:9-10)


(계 19:9) “천사가 내게 말하기를 기록하라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청함을 받은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하고 또 내게 말하되 이것은 하나님의 참되신 말씀이라 하기로” (계 19:10) “내가 그 발 앞에 엎드려 경배하려 하니 그가 나에게 말하기를 나는 너와 및 예수의 증언을 받은 네 형제들과 같이 된 종이니 삼가 그리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 경배하라 예수의 증언은 예언의 영이라 하더라”


우리가 신앙 생활하는 가운데 ‘예배, 성경교육, 전도, 선교, 봉사, 구제, 친교 등 여러 가지를 하게 되는데 그 중에 가장 중요한 일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아마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예배’라고 답할 정도로 예배의 중요성에 대해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예배 외에 다른 일들은 본인의 선택에 의해 참석하기도 하고 안 하기도 하지만, 예배만은 예수를 믿는 사람들의 책임과 의무이며 필수적인 것이기 때문에 예배에 빠져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와 같은 의무감만으로 평생토록 성실한 예배자가 될 수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시간이 흐르게 되면 그와 같은 의무감도, 건강이나 시간이나 경제나 주변  환경에 따라 점점 미약해지기 쉽기 때문에 다수의 사람들이 처음에는 예배에 잘 참석하다가 점점 멀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왕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교회를 다닐 바에야 어떻게 하면 자원하는 마음과 즐겁고 기쁘게 신앙생활을 하며 은혜가 넘치는 예배가 되게 할 수 있을까요?

1. 예배는 언제 시작되었을까?

하나님이 지으신 피조물 가운데 유일하게 인간만 종교를 가지고 있는데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인간을 동물과 같은 육체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모양과 형상을 닮은 영적인 존재로 지으셨기 때문입니다.
그와 같은 인간이 언제부터 눈에 보이지 않으시는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가 되었는가 하는 것이 궁금할 것입니다. 그 예배의 기원은 구약으로 거슬러 올라가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데서 시작되었습니다.
구약 성경에서 인간이 하나님을 예배하는 장면이 최초로 기록된 것은 창 4장 가인과 아벨의 제사입니다.
(창 4:3) 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창 4:4)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여기서 제물을 여호와께 ‘드렸고’ 라는 말(a/B, 보))은 공간적으로 이 장소에서 저 장소로 이동하는 것을 뜻하는 말의 와우 계속법 미완료 동사입니다.
다시 말해서 가인이나 아벨이 하나님께 제물을 드린 것은 본래 가인과 아벨이 수고하여 얻은 것이지만 그 소유권을 하나님의 것으로 올려 드렸다는 뜻이며, 그것도 한 두 번이 아니라 지금까지 계속해서 그렇게 해 왔고 또 앞으로도 계속해서 제물을 드리는 일을 계속하는 자연스러운 일이었음을 함축하는 말입니다.

1) 가인이나 아벨은 그 제사를 누구에게 배웠을까요? 동물의 세계를 보아도 알 수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성경에는 자세한 언급이 없을지라도 그들의 부모인 아담과 하와에게서 제사 드리는 것을 보고 배웠을 것입니다.

2) 최초의 인간 아담과 하와는 누구에게서 배웠을까요? 두 말 할 것도 없이 마치 갓 태어난 어린 아기가 누구에게 배우지도 않은 젖꼭지를 찾아 빠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모양과 형상으로 지으신 인간에게 계시하여 주셨기 때문에 누가 가르쳐 주지 않아도 제사드릴 줄 알았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가장 이상적인 예배의 훈련은 믿음이 좋은 부모에게서 보고 배움으로 예배를 드려야 할지 말지 갈등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예배를 드릴 수 있는 예배자가 되게 합니다.

2. 예배는 어떻게 준비되어야 하나?

평소 우리가 예배를 드리면서 갈등하는 몇 가지는 꼭 예배당에 와서 예배를 드려야만 하나? 하나님도 인간들처럼 돈을 좋아하시는 분인가? 왜 꼭 헌금을 드려야만 하나? 왜 주일날에 교회에 나와 예배를 드려야 하나? 등등일 것입니다.
가인과 아벨은 우리들처럼 십일조를 꼭 드려야 하나? 헌금은 왜 하는 것일까? 라는 의문이 없이 자연스럽게 하나님께 소중한 곡식과 양을 제물로 기꺼이 드렸습니다.
하지만 그 가운데 가인은 이마에 땀을 흘려서 수고함으로 얻은 곡식을 하나님께 제물로 드렸지만 하나님께서 가인과 가인의 제물을 받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창 4:5)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말씀은 ‘가인과 그의 제물’이라는 말씀처럼 하나님은 제물만을 요구하시는 분이 아니라, 제물을 드리는 사람의 마음과 삶까지 제물로 받으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가인의 제물을 받지 않으신 것은 가인의 삶에 문제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창 4:6)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찌 됨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찌 됨이냐 (창 4:7)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그것은 마치 해외로 여행하는 사람이 공항을 통과할 때 물건에는 이상이 없지만 마치 지명 수배자나 출국 정지된 사람인 경우에는 그 사람만이 아니라 그 사람의 물건까지 통관되지 않는 것과 같다고 비유할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의 시작의 책인 창세기 서두에 이와 같은 가인과 아벨의 제사를 기록하게 하신 이유는 이후로 예배를 드릴 때 어떤 자세로 드려야 하는지를 교훈하시기 위한 말씀인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에서 예배는 일부가 아니라 전부요 지체가 아니라 심장과도 같은 것이기 때문에 예배가 문제가 생기면 삶에 문제가 생길 뿐 아니라 삶에 문제가 생기면 예배에도 문제가 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서 예배자는 가정생활이나 직장 생활에서 부부나 이웃과의 관계에서 바른 관계를 맺지 않으면 하나님께 시간 물질 수고 등 그 무엇을 드린다고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소유권 이전에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딤전 2:8) 그러므로 각처에서 남자들이 분노와 다툼이 없이 거룩한 손을 들어 기도하기를 원하노라
(벧전 3:7) 남편들아 이와 같이 지식을 따라 너희 아내와 동거하고 그를 더 연약한 그릇이요 또 생명의 은혜를 함께 이어받을 자로 알아 귀히 여기라 이는 너희 기도가 막히지 아니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므로 우리의 예배는 주일날 교회만 잘 나오면 되는 것이 아니라 가정과 직장과 사회에서 인간관계가 모두 다 예배와 직결되어 있기 때문에 선한 마음과 거짓되지 않은 삶으로 한 주간을 살아가는 것이 도덕적인 이유 때문만이 아니라 바람직한 예배자의 준비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흔히 말하기를 예배가 삶의 중심이 된 사람은 가정이나 직장이나 사회에서 바람직한 삶을 살지 않을 수 없기 때문에 예배의 성공이 인생인 것입니다.
우리가 그러한 세상에서 살아감에도 불구하고 순간마다 나는 예배자라는 사실을 잊지 않을 때 조심하게 되고, 멀리하게 되고, 돌이켜 회개하게 되고, 넘어졌다가 다시 일어설 수 있는 힘과 능력을 예배를 통해서 공급받을 수 있는 기회가 곧 예배입니다.
가인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가인의 제사는 받지 않으시고 아벨의 제사만을 받으시는 것을 시기한 나머지 동생 아벨을 돌로 쳐 죽인 가인에게 친히 찾아오셔서 동일한 맥락의 질문을 하셨습니다.
(창 4:9)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담도 가인도 그 기회를 회개하고 돌이키는 기회가 아니라 변명하고 책임 전가하는 기회로 잘못 사용하였기 때문에 사죄함을 받을 기회를 박차버리고 말았습니다.

3. 어떻게 살고, 어떻게 예배를 드려야 하나?

물론 우리 중에 어느 누구도 그와 같은 약점과 허물에서 예외가 되고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그 이유는 아담의 자손인 우리 안에도 가인과 같은 비교의식, 시기심, 분노가 암세포처럼 내재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게 믿음이 좋은 사람조차도 때로 연약하기도 하고 실망스러운 모습을 보이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엿새 동안 죄악 된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고 주님 앞에 나아와서 어떻게 예배를 드려야 할까요?

첫째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그리스도 예수를 본받는 삶입니다.
(롬 12:2)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여기서 ‘본받지’라는 말(suschmativzw 쉬스케마티조)은 ‘무엇 -과 같은 모양이 되다, 무엇에 순응하다’라는 뜻의 현재 진행형입니다.
이 세대는 물론 믿음이 없고, 패역하고 음란한 세상일입니다. 그러나 그 세상을 탓하거나 핑계대지 말고 시편 1 편의 복있는 사람처럼 “악인들의 꾀, 죄인들의 길, 오만한 자들이 자리” 에 함께 하지 않아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 모두는 하나님 아버지께 아벨보다 더 나은 영적 예배를 드려야 할 책임과 의무가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롬 12:1)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그렇다고 해서 세상을 떠나 살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럴지라도 물을 거슬러 올라가는 산 물기처럼, 파도를 가르는 쾌속선처럼 세상 속에 살지만 그것을 거슬러 올라가는 삶입니다. 그것이 말씀과 기도를 놓지 않는 거룩한 삶인 것입니다.
그렇게 할 때 우리 속에 꿈틀거리는 그릇된 욕심과 절제하지 못하고 분노하는 마음을 다스리게 되고, 때로 그렇게 살지 못한 것을 회개하는 가운데 점진적으로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내적인 변화가 일어나게 됩니다.

두 번째, 오직 하나님께만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예배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심을 받은 인간이 자기를 지으신 하나님과의 만남과 교제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그러한 인간이 범죄로 말미암아 우상을 숭배하는 죄인으로 전락되었습니다.
그것을 불쌍히 여기는 하나님께서 주도권을 가지시고 인간과의 관계를 회복시키시고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화목주로 세상에 오신 보내주신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예배가 하나님께 상달되어지게 하는 유일한 중보자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하나님 앞에 당당히 나아가 예배를 드릴 수 있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히 4:16)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하나님과 관계가 회복된 그리스도인은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과 소통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반드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야만 합니다. 그래서 기도할 때에 반드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와 같으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셔서 우리에게 본 보여주시고 가르치신 여러 가지 중에 주목해야 할 한 가지는 예수 그리스도조차 항상 하나님만 주목하셨고 마지막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는 순간까지 오직 하나님만을 영화롭게 하시는 일에 최선을 다하셨다는 것입니다.
(요 17:1)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이르시되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
그것은 예수님의 희생만을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그 결과가 곧 예수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1) 그것은 지극히 영광스러운 독생자께서 지극히 비천한 인간의 육신을 입고 세상에 오신 일과 지극히 거룩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장 극악한 죄인을 사형시키는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일과 하늘 보좌를 버리시고 인간의 무덤에 묻히시기 까지 낮아지신 일입니다.
 2) 그러한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의 계획하신 하나님의 뜻을 다 이루심으로 말미암아 인간의 구원이 받게 된 것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신 일이었으며 그 결과 예수님도 영화롭게 되셨습니다.
(빌 2:9)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빌 2:10)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빌 2:11)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세상을 살아가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려고 분노를 절제하려고 하고, 기도하려고 하고, 말씀대로 살아가려고 양심을 지키려고 하는 일상적인 삶이 희생만 하는 삶이 아니라 결과적으로 나를 영화롭게 하는 삶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드리는 예배도 그와 원리라는 사실을 우리가 깨닫게 될 때 우리가 드리는 모든 예배 요소 하나가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리는 예배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창세기는 완벽한 하나님의 첫 창조를 인간의 죄로 파괴시켜 놓은 사건을 기록하고 있다면 요한 계시록은 그 파괴된 것을 하나님께서 어떻게 완벽하게 회복해 놓으셨는지를 계시해 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밧모 섬에 유배 중인 사도 요한을 하늘나라로 끌어 올려 천국을 관람시키시고 그것을 기록하게 하신 성경이 바로 요한 계시록입니다.
(계 4:1)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하늘에 열린 문이 있는데 내가 들은 바 처음에 내게 말하던 나팔 소리 같은 그 음성이 이르되 이리로 올라오라 이 후에 마땅히 일어날 일들을 내가 네게 보이리라 하시더라
그 가운데 오늘 성경은 창세기에서 시작된 불완전한 예배가  66권의 맨 마지막 책인 요한 계시록의 말미에서 어떻게 완벽한 예배로 회복되었는가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사도 요한이 천국의 환상을 보게 되었을 때 그의 마음에 감격이 극에 달하게 되었습니다.
(계 19:4) “또 이십사 장로와 네 생물이 엎드려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께 경배하여 이르되 아멘 할렐루야 하니” (계 19:5) “보좌에서 음성이 나서 이르시되 하나님의 종들 곧 그를 경외하는 너희들아 작은 자나 큰 자나 다 우리 하나님께 찬송하라 하더라” (계 19:6) “또 내가 들으니 허다한 무리의 음성과도 같고 많은 물 소리와도 같고 큰 우렛소리와도 같은 소리로 이르되 할렐루야 주 우리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가 통치하시도다” (계 19:7) “우리가 즐거워하고 크게 기뻐하며 그에게 영광을 돌리세 어린 양의 혼인 기약이 이르렀고 그의 아내가 자신을 준비하였으므로” (계 19:8) “그에게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도록 허락하셨으니 이 세마포 옷은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 하더라”
이 성경을 가리켜서 흔히 어린양의 혼인잔치 즉 가장 즐겁고 복된 천국 잔치를 뜻합니다. 이를 보고 있는 사도요한에 천사가 곁에서 어서 기록하라고 명령하였습니다.
(계 19:9) “천사가 내게 말하기를 기록하라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청함을 받은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하고 또 내게 말하되 이것은 하나님의 참되신 말씀이라 하기로”
그 소리를 듣자 마사 사도 요한은 당황이 되어서 엉겁결에 천사의 발 앞에 넙죽 엎드려 경배하려고 하자 천사가 극구 만류한 것이 오늘 성경 말씀입니다.
(계 19:10) “내가 그 발 앞에 엎드려 경배하려 하니 그가 나에게 말하기를 나는 너와 및 예수의 증언을 받은 네 형제들과 같이 된 종이니 삼가 그리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 경배하라 예수의 증언은 예언의 영이라 하더라”
이는 오직 경배의 대상은 성인도 천사도 마리아도 아닌 오직 하나님뿐이시라는 말입니다.
이는 오늘 우리가 드려지는 예배의 중심이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이 돌려지는 시간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배 시간에 기도를 드리거나 찬양을 드리거나 심지어 설교를 하는 것조차도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려야 한다는 원칙아래서 이루어져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예배자를 살피신다는 것을 믿을 때 준비 없는 기도나 억지의 헌금이나 사람을 설득하려는 설교를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결   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누구나 하루 24 시간, 한정된 경제를 가지고 제한된 삶을 살아가는 우리는 나름대로 하고 싶은 일들이 많이 있지만 그 모든 것을 다 할 수 없기 때문에 일의 우선  순위에 따라 어떤 것은 반드시, 어떤 것은 여유가 있으면 어떤 것은 아무리 여유가 있어도 하거나 하지 않는 일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저와 여러분에게 예배는 삶의 우선순위 중에 몇 번째에 해당됩니까?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한정된 삶을 사는 우리들에게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고 삶의 우선순위를 정해주셨습니다.
(마 6:33)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여기서 ‘더하시리라’는 말(prostivqhmi, 프로스티데미)은 필요한 것만이 아니라 추가해 주시겠다는 미래의 확실한 약속입니다.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그의 나라와 그의 의는 바로 지상에서 영원한 천국까지 영원토록 계속되어질 예배뿐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일상 생활을 포기하거나 희생하는 것이 아니라 결과적으로 복되고 풍성하게 하는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아벨처럼 예물만이 아니라 예물을 드리는 예배자로 엿새 동안 준비된 삶을 살며, 예배를 드릴 때에 오직 하나님께만 집중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께 소유권 이전될 수 있는 기도와 찬양과 예물을 드리되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리는 예배입니다.
1) 하나님 한 분만 경배하라는 말입니다.
2) 하나님께 경배할 때 신령과 진정으로 경배하라는 말입니다.
3) 항상 하나님께 초점을 맞추어 모든 삶을 살라는 말입니다.
아름다운 예배당과 최고의 영상과 음향 시설을 갖추고 세련된 찬양대와 오케스트라가 준비되었다고 할지라도 자칫하면 우리가 하나님보다 그러한 시설이나 준비에 마음을 더 빼앗길 수가 있습니다.
우리의 예배의 대상은 사람이나 일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 아버지이십니다. 하나님은 한순간도 빠짐없이 과 진리로 예배하는 자를 찾으십니다.
(요 4:23)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요 4:24)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2017 년 새해를 맞이한 우리가 엿새 동안 예배자로서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며 예배를 준비하는 삶을 살다가 주님 앞에 나아와 아벨처럼 하나님이 기뻐 받으실 만한 기도와 찬양과 헌금을 아울러 드릴 때 하나님이 흡족해 하시는 구한 것만이 아니라 구하지 않은 것 까지도 더하여 주시는 축복까지 받게 되는 2017 년이 되도록 예배를 가장 소중하게 여기시고 최선을 다하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