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 교/이규왕목사

아브라함의 자손이 된 그 사람 /(눅 19:1-10)

미션(cmc) 2017. 1. 29. 06:14

아브라함의 자손이 된 그 사람
(눅 19:1-10)


(눅 19:1) 예수께서 여리고로 들어가 지나가시더라 (눅 19:2) 삭개오라 이름하는 자가 있으니 세리장이요 또한 부자라 (눅 19:3) 그가 예수께서 어떠한 사람인가 하여 보고자 하되 키가 작고 사람이 많아 할 수 없어 (눅 19:4) 앞으로 달려가서 보기 위하여 돌무화과나무에 올라가니 이는 예수께서 그리로 지나가시게 됨이러라 (눅 19:5) 예수께서 그 곳에 이르사 쳐다 보시고 이르시되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하시니 (눅 19:6) 급히 내려와 즐거워하며 영접하거늘 (눅 19:7) 뭇 사람이 보고 수군거려 이르되 저가 죄인의 집에 유하러 들어갔도다 하더라 (눅 19:8) 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갑절이나 갚겠나이다 (눅 19:9)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눅 19:10)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여러 가지 운동경기 중에서 장애물 경주는 주력이 빠른 사람이 반드시 일등을 하는 것이 아니라 장애물에 걸려 넘어지지 않고 끝까지 잘 돌파하고 일등으로 골인하는 사람만이 우승을 할 수 있습니다.
신앙도 그와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듭니다. 조상 적부터, 태중에서, 유년 시절부터 교회를 출석했다고 해서 죽음이 다할 때까지 끝까지 믿음을 지킨다는 보장이 없습니다.
그래서인지 예수를 믿겠노라고 작정한 사람은 많으나 끝까지 교회를 출석하는 사람은 많지 못하고, 교회를 출석하는 사람이 많을지라도 주님의 뜻대로 사는 사람은 많지 못합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도 입으로 주여 주여만 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마 7:21)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오늘 성경은 예수님께서 여리고 라고 하는 도시에 가셨을 때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여리고는 예루살렘에서 북동쪽으로 대략 30 여 km 떨어 진 곳에 위치해 있는 성읍으로 값비싼 향유를 생산하여 수출하는 부유한 동네에 세금을 걷어 로마 정부에 바치는 삭개오라는 세리장이 있었습니다.
(눅 19:1) 예수께서 여리고로 들어가 지나가시더라 (눅 19:2) 삭개오라 이름하는 자가 있으니 세리장이요 또한 부자라
여기서 ‘삭개오’라는 이름은 ‘순전한, 의로운’이라는 뜻으로 혈통적으로는 이미 아브라함의 자손이었을 것입니다.
더구나 세리장이라는 직책은 얼마만큼의 세금을 로마 정부에 내겠다고 그 액수를 적어내어 가장 많은 액수로 입찰한 사람을 여리고 성의 세리로 임명하여, 세금을 거두는 '세율'을 정할 수 있는 권리까지 부여해 주었습니다.
그래서 세리장 삭개오는 부자가 될 수 밖에 없는 사람이었지만 주님을 알지 못하였고 주님과 아무런 관계가 없는 삶을 살아오던 사람이었습니다.
그와 같은 삭개오가 어느 날 예수님이 여리고에 들어오셨다는 소식을 알고는 예수님을 한번 보기를 간절히 원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삭개오에게는 예수님을 쉽사리 만날 수 없는 몇 가지 장애물이 있었으니 하나는 삭개오가 키가 작다는 것과, 또 하나는 예수님을 가로막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았다는 것입니다.
(눅 19:3) ‘그가 예수께서 어떠한 사람인가 하여 보고자 하되 키가 작고 사람이 많아 할 수 없어’
그럼에도 불구하고 삭개오는 그와 같은 장애물을 잘 극복하고 마침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큰 축복을 받았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그와 같은 삭개오에게 배울 것이 무엇일까요?

1. 장애물 극복
삭개오는 사람들이 흔히 문제 해결의 만능키처럼 생각하는  부와 권력을 둘 다 거머쥔 세리장이요 부자가 가난한 목수의 아들이라고 알려진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려고 고민할 이유가 하나도 없는 것입니다.
더구나 장애물까지 가로막고 있다면 아무 미련 없이 훌훌 털고 일어서면 되는데도 삭개오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장애물 앞에서 좌절하거나 뒤로 물러 선 것이 아니라 장애물을 뛰어 넘어 또 다른 길을 찾아 도전하였습니다.
 (눅 19:4) ‘앞으로 달려가서 보기 위하여 돌무화과나무에 올라가니 이는 예수께서 그리로 지나가시게 됨이러라’
여기서 ‘달려가서’ 라는 말(protrevcw 프로트레코)은 ‘달리다, 앞지르다’라는 뜻으로 유달리 키 작은 삭개오가 예수님 일행보다 앞질러 달려가는 모습이 상상이 될 것입니다.
그 이유는 오직 하나 나무 아래로 지나가실 예수 그리스도를 단 한번 만나 보기 위해서였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힘 있는 사람들이 제일 두려워하는 것이 바로 체면손상입니다. 물론 삭개오도 예외가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삭개오가 개의치 않고 앞질러 뛰어가고 나무위로 기어 올라가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은 것은 그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 아니까요?
그것은 지금까지 돈과 권력에 최고의 가치를 부여하는 삶을 살아오던 삭개오가 그 보다 더 가치 있게 생각한 것이 바로 단 한번 만이라도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일이라고 생각되었기 때문입니다.
흔히 기독교는 하나부터 백 가지가 모두 다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이기 때문에 인간이 힘쓰고 노력할 필요가 없다고 말합니다. 과연 그렇게 말하는 것이 성경적일까요?
그것은 성경을 오해한 것입니다. 천국은 지금까지 침노하는 자가 빼앗는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마 11:12)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
물론 인간이 힘쓰고 애써야만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가르치지는 않으나 값없이 구원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는 불신자보다 더 힘쓰고 애써야 할 것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자유 의지를 주셨고 성경 여러 곳에 힘쓰고 애써야 할 것을 명령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벧후 1:10) ‘그러므로 형제들아 더욱 힘써 너희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 너희가 이것을 행한즉 언제든지 실족하지 아니하리라’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불신 가정에서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며, 직장과 사업을 제쳐 놓고 주일 성수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며, 추운 겨울 새벽 어두움을 가르고 주 앞에 나와 기도하는 일도 쉬운 일이 아닙니다.
문제는 그와 같은 장애물을 수고로 말미암아 잘 극복하였다고 해서 받은 은혜가 무엇이며, 무슨 체험을 했으며, 얼마나 축복을 받았으며, 또 어떤 변화가 일어났는가? 하는 것입니다.

2. 헛되지 않은 수고
오늘 성경에서 삭개오가 세리장이라는 체면을 마다하고 예수님을 보기 위해 예수님의 일행보다 앞질러 달려가서 나무위에 기어 올라가기까지 수고한 삭개오를 지나치지 않으시고 예수님도 마치 삭개오를 보시기 원하셨던 것처럼 먼저 삭개오의 이름을 먼저 부르시면서, 빨리 나무에서 내려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것만이 아닙니다. 놀랍게도 예수님은 삭개오의 집에 함께 가셔서 유하시겠다는 것입니다.
(눅 19:5) 예수께서 그 곳에 이르사 쳐다 보시고 이르시되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하시니
여기서 ‘쳐다 보시고’라는 말(ajnablevpw, 아나블레포)은 ‘올려다 보시고’라는 뜻으로 예수님이 일부러 삭개오를 처다 보셨음을 뜻하며, 속히 내려오라고 재촉하신 것은 삭개오의 집에 가셔서 하루를 유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물론 이를 위해 삭개오가 예수님에게 요청하거나 간청한 일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도대체 예수님이 무엇 때문에 그렇게 자청하셨을까요?
심지어 동네 사람들의 비난과 오해를 사가면서 개의치 않으시고 예수님이 그렇게 자청하신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요?
(눅 19:7) 뭇 사람이 보고 수군거려 이르되 저가 죄인의 집에 유하러 들어갔도다 하더라
물론 그처럼 비판적이지 않은 사람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삭개오의 집에 가시겠다고 자청하신 것은 무슨 심오한 진리를 선포하시거나 아니면 희한한 기적이라도 행하시기 위함이라는 기대도 걸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삭개오의 집에 들어가신 예수님은 아무말씀이나, 다른 아무 기적도 행하시지 않으시고 묵묵히 삭개오를 지켜보시기만 하셨습니다.
만일 예수님이 삭개오의 집에서 그렇게 하루를 보내시고 떠나신다면 구태여 사람들의 비난과 오해를 사시면서 까지 삭개오의 집에 유하시겠다고 자청하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셨을 때 삭개오가 먼저 입을 열어 폭탄적인 선언을 하였습니다.
(눅 19:8) ‘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갑절이나 갚겠나이다’
여기서 ‘내 소유’라는 말(uJpavrconta, 휘파르콘타)은 현재 삭개오에게 속한 모든 소유물을 전체를 통 털어 하는 말로 전 재산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지금 당장 나누어 주겠다는 자선을 다짐하는 말입니다.
이같은 삭개오의 모습은 앞서 부자 청년이 예수님에게 나와서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을 수 있느냐? 고 물었을 때 모든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고 나를 따르라고 하셨을 때 돈이 많았던 부자 청년은 끝내 예수님을 따르지 못하고 근심하며 돌아간 사람과 너무나 대조가 되는 모습입니다.
(막 10:22) ‘그 사람은 재물이 많은 고로 이 말씀으로 인하여 슬픈 기색을 띠고 근심하며 가니라’
그것만이 아닙니다. 세리장 삭개오가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았다’는 말(sukofantevw, 쉬코판테오)은 권력을 이용하여  세금을 과하게 징수하여 편취하는 것을 뜻하는 말로 당시 세리들이 흔히 자행하는 악행을 뜻하는 말입니다.
구약 시대부터 그와 같은 죄에 대한 전통적인 보상은 불과 원금에 1/5을 더하여 갚기만 하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삭개오는 무려 사배나 더하여 같겠다는 것입니다.
(레 6:5) ‘그 거짓 맹세한 모든 물건을 돌려보내되 곧 그 본래 물건에 오분의 일을 더하여 돌려보낼 것이니 그 죄가 드러나는 날에 그 임자에게 줄 것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리장 삭개오가 사배나 더하여 보상하겠다고 결단을 내린 것은 예수님이 명령하셨기 때문이 아니라 스스로 결단을 내린 것입니다. 이같은 결단은 혼자서 몇날 며칠 고민하거나 아니면 어느 누구와 오래 의논하여 결정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와 같은 삭개오의 결단을 마치 기다리고 계셨다는 즉시 놀라운 축복을 그 즉시 선포하셨습니다.
(눅 19:9)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여기서 ‘구원’은 지금까지 삭개오가 가지고 있는 돈이나 권력으로도 사거나 빼앗을 수 없는 것임을 뜻하고, 구원이 ‘이르렀다’는 말은 지금까지 구원을 받지 못한 삭개오에게 구원이 일어났음을 뜻하는 말입니다.
그 결과 그와 같은 구원이 삭개오에게만 임하였다고 하지 많고 삭개오의 집에 이르렀고 삭개오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선포하셨습니다.
(갈 3:9) ‘그러므로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는 믿음이 있는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느니라’ (갈 3:14)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라’
이는 삭개오가 비록 혈통적으로는 이미 아브라함의 자손이었다고 할지라도 구원을 받지 못한 명목상의 아브라함의 자손이 이제는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아 믿음의 조상이 된 것처럼, 믿음이 전혀 없었던 삭개오가 예수님의 초청을 받고 예수님을 영접하므로 아브라함과 같은 믿음의 사람이 되어 오늘 우리들처럼 구원을 받게 되었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 의는 믿음으로 만이 아니 믿음의 결정체인 나눔과 드림의 헌금으로 말미암아 영원한 의가 된다고까지 말씀하고 있습니다.
(고후 9:9) ‘기록된 바 그가 흩어 가난한 자들에게 주었으니 그의 의가 영원토록 있느니라 함과 같으니라’ (시 112:9) ‘그가 재물을 흩어 빈궁한 자들에게 주었으니 그의 의가 영구히 있고 그의 뿔이 영광 중에 들리리로다’
그와 같은 삭개오가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는 아니 예수님을 영접하기 전에는 오로지 돈을 벌기 위해 불법을 자행하고 힘이 없는 사람을 억울하게 하는 일만 하며 살아온 죄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그것이 행운이요 축복인 것처럼 착각하는 삶을 살아왔지만 빛되신 예수님을 영접한 후에는 그 모든 것들이 잘못된 죄악임을 깨닫고 다시는 그런 죄를 범하지 않겠노라고 다짐하는 정도가 아니라 지난날의 죄를 사배나 더하여 속죄하겠다고 자원한 것은 믿음이 아니고는 그렇게 할 수 없는 아름다운 결단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지 낙타가 바늘귀를 통과하는 것보다 더 어렵다고 하신 것은 그 만큼 잘못된 물질생활을 청산하는 일이 어렵기 때문입니다.
(눅 18:25)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시니’
그러나 세리장이요 부자였던 삭개오는 예수님을 만나 이 바늘귀를 믿음으로 단번에 통과하였기 때문에 예수님이 기탄없이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고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놀라운 축복을 선포하신 것은 삭개오가 드린 엄청난 돈 때문이 아니라 돈이 많은 부자일수록 극복하기 어려운 장애물을 극복하였기 때문입니다.
(눅 19:9)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물론 삭개오의 이름이 뜻하는 것처럼 삭개오는 육신적으로 이스라엘의 국적을 가진 사람이었지만 영적으로는 아브라함의 축복을 계승받을 수 없는 사람이었으나 이후로는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었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삭개오에게 어떻게 그렇게 급격한 변화가 일어날 수 있으며, 예수님께서 삭개오에게 그렇게 큰 축복을 내리신 것일까요?
사도 바울은 흉년을 만난 예루살렘 교회를 돕기 위해 교회들에게 구제 헌금을 하게 하였을 때 마게도니야 교회들은 너무나 가난하게 사는 중에서도 자기들이 예루살렘 교회를 돕게 된 것을 매우 기쁘게 여기면서 넘치도록 헌금을 하였습니다.
(고후 8:2) ‘환난의 많은 시련 가운데서 그들의 넘치는 기쁨과 극심한 가난이 그들의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 하게 하였느니라’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많은 시련, 넘치는 기쁨, 극심한 가난, 풍성한 연보, 넘치도록’ 이라는 수식어 들이 가난한 마게도니아 교회들이지만 힘대로 할 뿐 아니라 힘에 지나도록 자원하여 헌금하는 모습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헌금을 억지로 강요하지 않았다고 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헌금만은 억지로나 인색함으로 해서는 안 되고 오로지 간절함과 사랑과 진실함을 물질에 담아 증명하는 것이기 때문에 자원하는 마음과 기쁜 마음으로 드려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고후 8:8) ‘내가 명령으로 하는 말이 아니요 오직 다른 이들의 간절함을 가지고 너희의 사랑의 진실함을 증명하고자 함이로라’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헌금의 많고 적음이 아니라 진실된 마음, 참된 믿음을 증명하는 예물이면 아벨의 제물처럼 기쁘게 받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예물을 드린 사람에게 모든 일에 모든 것이 넉넉하여 부자가 되게 하시는 것이 아니라 착한 일을 넘치게 할 수 있도록 지속적으로 축복해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고후 9:8) ‘하나님이 능히 모든 은혜를 너희에게 넘치게 하시나니 이는 너희로 모든 일에 항상 모든 것이 넉넉하여 모든 착한 일을 넘치게 하게 하려 하심이라’
여기서 ‘넘치게’ 라는 말(perisseuvw, 페릿슈오)이 거듭 나오는데 이는 ‘과도하다, 초과하다, 풍성하다’라는 뜻의 현재 능동 가정법으로 이 다음에 가봐야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하면 그 때마다 넘치게 하시겠다는 확고한 약속의 말씀입니다.
더욱 중요한 말씀은 자원하는 마음, 즐거워하는 마음으로 헌금하는 것을 구약 시편 말씀을 인용하여 영원한 의가 된다고 말씀하였습니다.
(시 112:9) ‘그가 재물을 흩어 빈궁한 자들에게 주었으니 그의 의가 영구히 있고 그의 뿔이 영광 중에 들리리로다’
(고후 9:9) ‘기록된 바 그가 흩어 가난한 자들에게 주었으니 그의 의가 영원토록 있느니라 함과 같으니라’
삭개오가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는 아니 예수님을 영접하기 전에는 오로지 돈을 벌기 위해 불법을 자행하고 힘이 없는 사람을 억울하게 하는 일만 하며 살아온 죄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그것이 행운이요 축복인 것처럼 착각하는 삶을 살아왔지만 빛되신 예수님을 영접한 후에는 그 모든 것들이 잘못된 죄악임을 깨닫고 다시는 그런 죄를 범하지 않겠노라고 다짐하는 정도가 아니라 지난날의 죄를 사배나 더하여 속죄하겠다고 자원한 것은 믿음이 아니고는 그렇게 할 수 없는 아름다운 결단이었습니다.

 결  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나 지금이나 많은 사람들이 성경도 기도도 예배도 봉사도 얼마든지 잘 할 수 있지만 많은 사람들이 마지막 장애물인 자원함과 기쁜 마음으로 드리는 헌금을 드리지 못함으로 묵묵히 지켜보시는 주님을 기쁘시게 못한 채 온전한 신앙생활을 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헌금은 예나 지금이나 모든 신자들이 반드시 극복해야 할 마지막 장애물입니다. 그러므로 근래에 와서 합리적인 신학적 논리를 가지고 십일조를 부인하고 헌금을 과소평가하여 성도들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은 귀한 물질을 선한 일을 위해 쓰지 않고  범죄하는 일에 허비하게 하는 사단의 유혹에 미혹되지 말아야 합니다.
인간은 누구나 다 죄인으로 태어나지만 어떤 사람을 가리켜 선하다고 하고, 어떤 사람을 가리켜 악하다고 하는 차이는 대부분 그 사람이 돈을 어떻게 벌고 돈을 어떻게 사용하는가에 따라 뒤바뀌어 지는 것입니다.
식게오만이 아니라 오늘 우리도 지난날에는 삭개오처럼 물질에 최고의 가치와 목적을 두는 삶을 살던 우리가 예수를 믿고 교회에 나와 믿음 생활을 시작하면서 예수를 믿으면 구원을 받고 예수를 잘 믿으면 축복을 받는다는 말을 자주 들어왔을 것입니다.
그러나 신앙의 철이 들수록, 성경을 읽고 들을수록 예수를 믿는 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며 얼마나 장애물이 많은지 경험하였을 것입니다.
마치 삭개오가 달음박질 하여 체면 불구하고 돌감람나무 위로 기어 올라간 것처럼 때로는 열심을 내기도 하고 주어진 직분에 충실하기도 한 때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것으로 나의 신앙이 다 된 것일까요?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우리의 믿음은 더 이상 자라지 않고 있으며, 아무리 기도를 해도 응답하시는 것 같지 않고, 남들은 주옥같은 말씀이라고 하지만 심지어 나는 무미건조하게 느껴지고 그렇게 감격하고 감사했던 하나님의 사랑이나 십자가의 은혜에 대한 설교 말씀을 들어도 아무런 감동이나 감격이 마음에 일어나지 않는 영적으로 냉랭한 상태가 지금 나의 모습이 아닌지 돌이켜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나를 예수 믿게 하시고 축복하신 이유가 나로 하여금 영광을 받으시기 위함이었다면 이제 남은 시간과 주신 물질을 삭개오처럼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영광을 받으시는 선한 삶을 위해 드리는 결단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마 5:16)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 삭개오는 인생의 목적이 오로지 돈이 전부였던 사람으로 그것을 얻고 지키고 더 많은 것을 구하기 위해 하나님의 법을 어기고 국가의 법을 어기고 양심을 어기고 부도덕한 삶을 살았다면 어서 회개하고 돌이켜 새사람이 되기를 기다리고 계시는 것입니다.
(롬 13:12)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둠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 (롬 13:13)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하거나 술 취하지 말며 음란하거나 호색하지 말며 다투거나 시기하지 말고’ (롬 13:14)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아무리 오래 예수를 믿고 교회를 다니고 목사 장로 집사라는 직분을 가지고 나름대로 열심히 봉사하고 충성한다고 할지라도, 마지막 반드시 극복해야 할 마지막 장애물인 바른 물질관과 자원하는 헌금정신의 실천과 지난 날의 죄에 대한 철저한 회개를 주님이 원하시는 것입니다.
이제부터라도 나의 존재이유, 나를 구원하신 이유, 나를 생존해 주시는 이유가 바로 삭개오와 같은 선행과 철저한 회개를 실천하는 삶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삭개오와 같은 선행과 철저한 회개를 실천하는 삶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이제부터 삭개오처럼 선행을 결단과 철저한 회개를 실천할 때 삭개오에게 (눅 19:9)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고 선포하신 것처럼 그와 같은 결단을 하는 우리를 가리켜 ”이 사람도 믿음의 자손’이라고 인정하시며, 이후로 우리가 모든 착한 일을 하기에 부족함이 없도록 넘치는 복을 주실 것입니다.
(고후 9:8) ‘하나님이 능히 모든 은혜를 너희에게 넘치게 하시나니 이는 너희로 모든 일에 항상 모든 것이 넉넉하여 모든 착한 일을 넘치게 하게 하려 하심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