낮에도 밤에도
(출 13:17-22)
(17) 바로가 백성을 보낸 후에 블레셋 사람의 땅의 길은 가까울지라도 하나님이 그들을 그 길로 인도하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이 백성이 전쟁을 보면 뉘우쳐 애굽으로 돌아갈까 하셨음이라 (18) 그러므로 하나님이 홍해의 광야 길로 돌려 백성을 인도하시매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 땅에서 항오를 지어 나올 때에 (19) 모세가 요셉의 해골을 취하였으니 이는 요셉이 이스라엘 자손으로 단단히 맹세케 하여 이르기를 하나님이 필연 너희를 권고하시리니 너희는 나의 해골을 여기서 가지고 나가라 하였음이었더라 (20) 그들이 숙곳에서 발행하여 광야 끝 에담에 장막을 치니 (21) 여호와께서 그들 앞에 행하사 낮에는 구름 기둥으로 그들의 길을 인도하시고 밤에는 불 기둥으로 그들에게 비취사 주야로 진행하게 하시니 (22) 낮에는 구름 기둥, 밤에는 불기둥이 백성 앞에서 떠나지 아니하니라
우리가 하나님을 눈으로 볼 수 없지만 하나님이 지으신 피조물을 믿음의 눈으로 자세히 살피게 되면 그 피조물 안에 창조주 하나님이 얼마나 지혜와 권능이 많으신 분인가 하는 것을 잘 계시하여 주고 있습니다.
(롬 1:20)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
그래서 자연을 지으신 창조주를 찬양하는 시와 노래와 그림들이 만들어 지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피조물 가운데 만물의 영장이라고 일컫는 인간의 탐욕스러운 모습들을 바라보게 되면 창조주 하나님이 인간을 왜 그렇게 만드셨는지 잘 이해가 되지 않고 실망 스럽기만 할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인간이 어떻게 존재하게 되었으며 인간이 왜 그토록 실망스러운 존재가 되었으며 그 인간에게 희망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계시하여 주신 말씀이기 때문에 인간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알기 원하는 사람에게 정답을 주는 책은 성경 외에 세상에 다른 책이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출애굽기를 자세히 살피게 되면 1)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어떻게 구원하셨는지를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를 어떻게 구원하셨는지에 대해서 알 수 있게 되고, 2) 이스라엘을 어떻게 인도하셨는지를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를 지금도 어떻게 인도하시는지를 깨닫게 되고, 3) 이제부터라도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의 바람직한 삶인가를 깨우쳐 주는 진리의 말씀인 것입니다.
1. 나그네의 삶
믿음의 조상이라고 일컫는 아브라함은 조상 대대로 살아온 나라와 고향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하여 고향과 친척과 아비 집을 떠나 낯선 가나안 땅으로 이주하여 죽을 때까지 나그네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그 땅을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기업으로 주시겠다는 약속과 더불어, 언젠가는 떠나게 될 이 세상과 달리 영원히 살게 될 새로운 본향인 하늘나라를 확신하였기 때문에 낯선 땅에서 나그네로 사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히 11:13)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임을 증언하였으니’
아브라함만이 그와 같은 나그네의 삶을 산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자손인 이삭과 야곱과 야곱의 열두 아들의 자손인 이스라엘 백성들도 낯선 애굽 땅에서 사백 삼십년간 애굽 사람들에게 멸시와 천대를 받는 나그네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마침내 때가 되어 그 땅을 떠난 것이 출애굽이며, 그 후에 돌아간 땅이 하나님께서 그들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약속하신 가나안 땅이었습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사십년이라는 긴 세월을 광야에서 나그네처럼 이리 저리 떠돌다가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서 새로운 이스라엘 나라를 세운 후에는 나그네가 아니었습니다.
이스라엘은 그 땅의 원주민을 쫓아내고 주인으로 그 땅을 분배받고, 집을 짓고, 그 농사를 지으며 자손 대대로 기업이 되게 하셨습니다.
성경에 그와 같은 이스라엘의 역사를 기록해 놓으시고 그 이야기를 세계 만국에 흩어져 살고 있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고, 읽고, 듣고, 묵상하게 하신 것은 무엇 때문일까요? 우리도 나그네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에는 ‘나그네’라는 말이 50 여회 나오는데 이 땅에서 태어나 조상대대로 살고 있는 우리들임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들을 가리켜 나그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벧전 1:17) ‘외모로 보시지 않고 각 사람의 행위대로 심판하시는 이를 너희가 아버지라 부른즉 너희가 나그네로 있을 때를 두려움으로 지내라’
그 이유는 우리가 아무리 이 땅에서 조상 대대로 살지라도 앞서 간 앞서 살다가 간 조상들처럼 우리도 언젠가 때가 되면 반드시 이 땅을 떠나야만 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나그네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것을 깨닫고 나그네로 있을 동안 믿음으로 산다는 것이 어떻게 사는 것인지 본보여 준 믿음의 사람들이 바로 아브라함을 비롯한 히 11장과 교회사와 우리 신앙의 선진들인 것입니다.
(히 11:13)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임을 증언하였으니’
이 세상에서 나그네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이 그들을 믿음을 본받아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이 어떻게 살아가는 것인지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벧전 2:11) ‘사랑하는 자들아 거류민과 나그네 같은 너희를 권하노니 영혼을 거슬러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
여기서 ‘싸우는’ 이라는 말(strateuvw 스트라튜오마이))은 한 나라의 운명이 좌우되는 국가 간의 전쟁을 뜻하는 말로 반드시 이겨야만 하는 싸움입니다.
또 육체의 ’정욕’이라는 말(ejpiqumiva 에피뒤미아)은 단지 이성에 대한 욕망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서 부귀권세를 탐하는 과도한 모든 욕망을 뜻합니다.
또 ‘제어하라’는 말(ajpevcw, 아페코)은 ‘멀리하다, 억제하다, 삼가다’라는 뜻으로 인간의 힘으로는 완전히 제거될 수 없는 강력한 욕망들을 할 수 있는대로 멀리하는 것이 최선이라는 뜻입니다.
왜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면서 가까운 길처럼 생각되는 불의한 방법으로 자신이 원하는 욕망들을 다 채우려고 하는 것이 마치 낡은 부대에 새 포도주를 담는 것과 같이 파멸과 자멸의 길일까요? 그것이 결국 나를 망하게 하고 나의 후손들을 부끄럽게 하는 파멸의 길임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생생한 사건들이 바로 지금 우리 주변에서 벌어지고 있는 국정 농단에 연루된 정치인, 지식인, 기업가, 공직자들의 군색한 모습들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나그네 삶을 살아가는 우리가 육신의 가지고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좀더 멀게 보일 지라도 광야 같은 세상에서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는 믿음의 삶을 살아야 할 이유와 그 방법에 대해서 성경은 무엇이라고 가르쳐주고 있을까요?
2. 가장 바른 길
애굽에서 사백 삼심 년의 기나긴 세월 동안 바로 왕의 학정 아래 노예 생활을 하던 아브라함의 자손들이 칼과 창도 없이 애굽 제국의 바로 왕의 손아귀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막대한 희생은 고사하고 단 한 사람도 희생되지 않고, 피 한 방울도 흘리지 않고서도 은금 패물까지 손에 거머쥐고 등 떠밀리듯이 출애굽을 하였다는 것은 전능하신 하나님의 도우심이 아니고는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그와 같이 출애굽 시키신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무슨 공로가 있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들의 조상 아브라함과 언약하신 약속을 지키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창 15:18) ‘그 날에 여호와께서 아브람과 더불어 언약을 세워 이르시되 내가 이 땅을 애굽 강에서부터 그 큰 강 유브라데까지 네 자손에게 주노니’
그러므로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약속의 땅 가나안이라는 분명한 목적지가 있었고 또한 그 곳으로 향하는 길이 준비되어 있었습니다. 그 길은 애굽 제국의 열 왕들이 세력을 북방으로 확장하기 위한 진출로로 블레셋의 해안 도시 가사를 지나 지중해 해안을 따라 사오일이면 가나안에 다다를 수 있는 가까운 길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출애굽 시키신 이스라엘 백성들을 그 가까운 길로 인도하지 않으시고 다른 길이 아니라 전혀 길이 없는 광야로 인도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공간적으로는 그 길이 가까운 것처럼 생각되지만 영적으로는 그 길이 마치 끊어진 다리처럼 오도 가도 못하는 막힌 길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장정만 육십만이 넘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길을 가는 도중에 블레셋이나 다른 이방 백성들과의 충돌하여 전쟁이 발생할 경우 이스라엘 백성들이 마음이 약해져서 출애굽을 후회할 가능성이 많음을 하나님이 잘 아시기 때문입니다.
(출 13:17) ‘바로가 백성을 보낸 후에 블레셋 사람의 땅의 길은 가까울지라도 하나님이 그들을 그 길로 인도하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이 백성이 전쟁을 하게 되면 마음을 돌이켜 애굽으로 돌아갈까 하셨음이라’
여기서 ‘가까울지라도’라는 말(b/rq 카로브)은 ‘공간적으로나 시간적으로’ 가깝다는 뜻이고, 마음을 ‘돌이켜’라는 말(!j'n:, 나함)은 ‘후회하다’라는 뜻의 미완료이고, 애굽으로 ‘돌아갈까“라는 말(bWv, 슈브)은 ’되돌아가다‘라는 뜻의 와우 계속법 완료형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언젠가는 반드시 출애굽을 후회하고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보채게 될 것을 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보시기에 그 길은 가나안에 이르는 가까운 길이 아니라 그 길은 출애굽을 헛되게 만드는 파멸에 이르게 하는 죽음의 길이기에, 하나님은 생존조차 불가능해 보이는 광야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인도하신 것입니다.
(출 13:20) ‘그들이 숙곳을 떠나서 광야 끝 에담에 장막을 치니’
여기서 ‘광야’라는 말(rB;d]mi, 미드바르)은 마실 물도, 먹을 양식도, 농사 지을 옥토도 없고 고작해야 키 작은 관목들과 날카로운 가시가 돋친 이파리를 가진 작은 식물들과 뱀과 전갈이 설치는, 메마른 땅과 크고 작은 돌과 모래뿐인 황무지를 뜻합니다.
그와 같은 광야는 지금까지 사람들이 간적이 없고 또 가려고도 하지 않는 길이 없는 곳일 뿐 아니라, 낮에는 뜨거운 더위와 밤에는 추운 일교차로 머물러 있기조차 쉽지 않은 곳이요, 방향 감각을 잃고 길을 찾아 헤매다가 죽을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곳으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인도하시고 그곳에서 자그만 치 사십년동안 생존하였다는 것은 하나님의 특별한 보호와 인도하심이 아니고는 불가능한 곳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같은 광야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소처럼 몰고 가신 것이 아니라 마치 목자가 양보다 앞서 가듯이, 이스라엘 백성보다 앞서 가시면서 낮에는 구름 기둥과 밤에는 불기둥으로 인도하셨다는 것입니다.
(출 13:21) ‘여호와께서 그들 앞에서 가시며 낮에는 구름 기둥으로 그들의 길을 인도하시고 밤에는 불 기둥을 그들에게 비추사 낮이나 밤이나 진행하게 하시니’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말씀 세 가지가 있는데 첫째는 앞에서 가시며, 둘째는 길을 인도하시고, 셋째는 진행하게 하시니 라는 말씀입니다.
1) 그들 ‘앞에서 가시며,
여기서 ‘앞’이라는 말(!ynIP 파님)은 ‘얼굴’이라는 뜻으로 아주 가까이 하심을 뜻합니다.
2) 길을 ‘인도하시고’,
여기서 ‘인도하시며’ 라는 말(hj;n, 나하)은 앞서서 ‘이끌다, 안내하다’라는 뜻입니다.
3) 낮이나 밤이나 ‘진행하게 하시니’
여기서 ‘진행하게’라는 말(&l'y:, 얄라크)은 ‘가다, 걷다’라는 뜻으로 약속의 땅을 향해 한 걸음씩 한 걸음씩 전진하게 하셨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그 광야는 길을 잃지 않고 동방박사들이 별을 보고 아기 예수께 나아온 것처럼 이스라엘 백성들은 구름기둥과 불기둥을 보고 약속의 땅 가나안을 향에 나아갈 수 있었습니다.
그것만이 아닙니다. 먹을 것이 없는 광야에서 만나로 먹이시고 반석을 처서 생수로 메추라기를 몰아 배부르게 고기를 먹게 하셨습니다.
3. 시험에 합격하는 신앙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그렇게 인도하셨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만족해 하였나요? 모세는 아무 할 일이 없이 대접받고 존경받는 평탄한 길을 걸었나요?
그와 같은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기적을 날마다 체험하며 사십년간 광야에서 나그네 여정을 걸었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한 사람도 낙오됨이 없이 다 가나안 땅에 들어갔나요? 결코 아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 한 숫자는 장정만 육십만 삼천 오백 오십 명이었으나 그 중에 가나안 땅에 들어간 사람은 열두 정탐꾼 가운데 가나안 땅에 능히 들어갈 수 있다고 긍정적인 보고를 하였던 여호수아와 갈렙 두 사람과 광야에서 사십년 어간에 태어난 새로운 세대들만이 마침내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갔습니다.
그렇다면 왜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한 60만 명의 출애굽 세대가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광야에서 다 죽고 말았을까요?
애굽에서 사백년간 우상 숭배의 문화에 쪄들었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광야에서 사십년 동안 훈련시키시는 것은 바로 왕을 항복하게 하시고 홍해를 육지같이 건너게 하시고 메마른 광야 길에서 구름과 불기둥으로 인도하시고 만나와 생수와 메추라기로 배불리 먹게 하시면서 하나님이 정말 살아계시고, 그들과 함께 하시고 그들을 인도하시는 것을 날마다 경험하는 과정을 통해서 우상을 버리고 오직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 한 분만을 믿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하기 위한 훈련이었습니다.
(민 2:9) ‘유다 진영에 속한 군대로 계수된 군인의 총계는 십팔만 육천사백 명이라 그들은 제일대로 행진할지니라’
그래서 과거 출애굽을 할 때 가나안에 이르는 가까운 길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군대에서 가장 힘든 유격 훈련장과도 같은 광야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인도하신 것은 과거에 노예였던 그들을 최강의 하나님의 군대로 훈련시키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겸손과 순종의 훈련이었습니다.
(신 8:2)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 년 동안에 네게 광야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지키지 않는지 알려 하심이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출애굽 했던 육십만명이 다 탈락을 하고 오로지 여호수아와 갈렙만이 겨우 합격을 하여 가나안 땅에 들어간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사십년 전 출애굽 한 육십만 삼천 오백 오십 명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했나요? 그들은 광야 훈련에서 낙오병들이 되어 애굽에서 노예로 지냈던 구습을 완전히 벗어 버리지 못함으로 하나님의 군대가 갖추어야 할 준비를 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인도하신 광야 길은 애굽에서 가나안까지 직선으로 가로질러 가면 불과 200마일에 불과한 길이었고 그 길을 쉼 없이 걸어가면 40일이면 갈수 있는 길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십일이 사십년으로 늘어난 것은 광야에서 태어난 새로운 세대를 강인한 군대로 훈련시키시기 위한 기간이었기 때문에 40일이 무려 40년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어느 누가 말하기를 ‘애굽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몸뚱이를 빼어내는 데는 장자의 재앙을 내리신 단 하루밖에 걸리지 않았으나,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정신 속에 깊이 뿌리내린 애굽의 우상 숭배와 잘못된 사상들을 뽑아 내는 데는 사십년이 필요하였다’고 하였습니다.
그 결과 사십년이 지난 후 가나안에 들어간 이스라엘 군대의 숫자를 민수기에 각 지파별로 계산해 놓았는데, 열두 지파의 군대의 총 숫자가 과거 출애굽을 했던 장정의 숫자보다는 약간 적은 육십만 천 칠백 삽십 명이었다고 하였습니다.
(민 26:51) ‘이스라엘 자손의 계수된 자가 육십만 천칠백삼십 명이었더라’
결 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경은 우리를 가리켜 노예가 아니라 믿음의 선한 싸움에서 승리해야만 하는 하늘 군대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엡 6:12)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
물론 그 싸움은 우리의 지혜나 육신의 힘이나 인생 여정에서 쌓은 경험만으로는 이길 수 없기 때문에, 예나 지금이나 그렇게 공부를 많이 하고 출세하고 성공하고 거부가 되었어도 그 싸움에서 이긴 사람이 없습니다. 다 넘어집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와 똑같은 육신을 가지고 믿음의 길을 걸어간 사도 바울은 자신의 한 평생을 회고하면서 그 싸움에서 승리하였다고 고백하였습니다.
(딤후 4:7)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미 믿음의 선한 싸움에서 승리를 경험한 사도 바울은 그것이 자신의 지혜나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머리에서 발끝까지 틈새를 보이지 말고 전신무장하는 것이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엡 6:11) ‘마귀의 간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입으라’
만일 그렇게 하지 않고 적당히 믿어 허점을 보이기만 하면 악한 마귀는 그 틈새를 공격하여 우리를 넘어지게 하기 때문에 머리에서 발끝까지 전신 무장을 해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엡 6:13, 개정)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취하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개인적으로 성경을 많이 읽고 기도를 많이 하여 전신갑주로 무장을 하였다고 할지라도 전쟁에 능하신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이 나의 대장이 되어 주셔야만 합니다.
그것이 바로 이스라엘 군대를 광야에서 이끼시던 여호와 하나님께서 낮에는 구름 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인도하실 때 그 기둥이 머물면 이스라엘 군대도 머물고 그 기둥이 움직이면 한 밤중에라도 장막을 거두어 싸서 그 기둥을 따라 끝까지 순종하였습니다.
그 결과 이스라엘을 뒤쫓던 애굽 군대와 가는 길을 막던 종족들과 가나안의 일곱 나라 군대와 홍해와 거친 광야와 흘러넘치는 요단강과 난공불락의 요새 여리고가 길을 막았지만 다 이기게 하셨습니다. 다 물리치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 하나님이 때로 우리 민족과 한국 교회와 우리 성도들의 가정을 광야와 같이 메마르고 험한 길로 인도하신다고 할지라도 두려워하거나 낙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 우리 민족과 교회와 성도들이 처한 현실이 마치 이스라엘 백성들을 광야로 인도하신 것과 같이 황량해 보이질 라도 우리가 낙심하거나 두려워하거나 염려하지 말아야 할 분명한 이유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들만 밤낮으로 인도하시고 보호하신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기까지 하신 예수님은 부활 승천하시기에 앞서 제자들에게 마지막으로 약속하신 말씀 때문입니다.
(마 28:20)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름 기둥과 불기둥으로 밤낮 보호하시고 인도하신 것처럼 하나님은 반만년 역사를 가진 우리 대한민국과 130여년의 선교 역사를 가진 한국 교회와 각종 악재에 시달리고 있는 성도들을 그냥 버려두시지 않으실 것입니다.
세상 끝날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하시겠다고 약속하신 주님께서 우리 앞서, 우리 곁에서 구름기둥과 같은 말씀과 불기둥과 같은 성령으로 언제 어디서나 항상 이 나라와 한국교회와 여러 성도들의 가정을 보호하시고 인도하실 것입니다.
문제는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사소한 어려움 앞에 믿음 없는 자들처럼 원망하고 불순종하는 죄를 범치 말고, 밤낮으로 우리와 함께하시고 우리를 보호하시고 인도하시는 주님 앞에 늘 겸손하고, 주님의 말씀을 사모하고 그 말씀을 끝까지 순종하는 영적 이스라엘이 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을 출애굽 시켜 결국 가나안 땅에 들어가 나라를 세우게 하셨던 하나님이 2017 년을 맞이한 우리 민족과 국가와 교회의 현실이 마치 광야처럼 생각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원망 불평하고 거역하고 불순종하지 말고 말씀과 성령으로 가라고 하실 때 가고 머무르라고 하실 때 겸손히 순종 한다면
우리 민족과 교회와 가정의 가는 길을 가로 막는 홍해와 같고 광야와 같고 요단강과 같고 여리고 같고 가나안 원주민과 같은 모든 대적들과 장애물을 무너뜨리시고, 건너게 하시고, 이기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마침내 약속의 땅에 이르게 하시는 복된 2017년이 되게 하실 것입니다.
(살전 2:12) ‘이는 너희를 부르사 자기 나라와 영광에 이르게 하시는 하나님께 합당히 행하게 하려 함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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