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 10단’ 국왕의 영적 무능
[하나님이 그들과 만났을 때 - 여로보암 왕]
여로보암 왕은 정치에는 유능했으나 영적으로는 무능했다.
세겜 성을 건축하고 벧엘 땅을 성지화시킴으로써 북쪽 백성들의 마음을 정치적으로 예루살렘에서 완전히 분리시킨 것은 성공적이었다.
그러나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어 여호와로 섬기며 왕이 함부로 제사장을 임명한 것 등은 치명적인 영적 잘못이었다.
유다 왕국의 전성기를 구가하던 솔로몬 시대에 내부 균열의 핵으로 떠오른 인물이 여로보암이다.
그는 반대 세력의 지도자가 될 수 있는 다음과 같은 호조건을 구비하고 있었다.
첫째, 그는 이스라엘 12지파 가운데 민족 지도자를 가장 많이 배출한 에브라임 지파였다.
12지파의 리더는 역사적으로 요셉과 유다의 가문에서 나타났다.
둘째, 그의 아비가 요셉 지파치고는 드물게 유다 왕조를 도운 인물이었다.
그래서 여로보암은 신원조회에 아무런 장애가 없었다.
셋째, 그는 소년 시절부터 용력이 출중하였다.
그래서 예루살렘 외곽 요새인 밀로성을 증축할 때(왕상 11:27) 부역 현장에서 솔로몬 왕의 눈에 띄어 일약 요셉 지파 전체의 공사 감독으로 출세하게 된다(왕상 11:28).
넷째, 예루살렘에서 관리를 지낸 그의 아비가 일찍 죽는 바람에 과부가 된 어미 스루아니가 에브라임 족속이 많이 살고 있는 시골 마을 스레다로 이사 와서 키운 자식이 여로보암이다.
세겜과 요단 강 사이에 위치한 스레다는 이웃한 실로와 함께 요셉 지파의 대권을 향한 꿈이 머물던 지역이다.
에브라임 지파는 요셉의 유골이 묻힌(수 24:32) 이곳 세겜 근방에서부터 그들의 힘을 결집했다.
바야흐로 여로보암의 시대가 열리고 있었다.
다윗 제국을 별 어려움 없이 물려받은 솔로몬은 고생을 모르고 자란 왕이라 머리는 좋았는지 몰라도 백성들의 고단한 삶을 이해하지 못했다.
사십 년 재위 기간 중 전반기 이십 년 동안에는 백성들의 불만이 없었다.
이십 년 동안 예루살렘 성전 신축 및 왕궁 증축 공사 등 대대적인 건축 공사를 벌였지만, 그 재원의 대부분을 해외 무역을 통해 얻은 엄청난 수익금으로 충당했기 때문이다(왕상 9:26-28, 10:15, 22-23, 인도까지 이르는 막강한 해상무역).
그러나 후반기 20년 동안에는 백성들에게 그 부담이 전가되었다.
왜냐하면 솔로몬이 욕심을 부려(전 2:4, 10) 전국적으로 호화스러운 관청을 짓고 신도시를 만들고 군사력을 강화했기 때문이다(왕상 9:17~24, 10:16~21).
무리한 공사로 재정에 압박이 오자 그 부담을 백성들에게 떠넘겼으며, 노예로 충당되지 않는 건설인력은 열두 지파가 순번제로 이를 담당하도록 강제하였다.
한마디로 솔로몬 왕의 집권 후반기는 백성들은 등골 빠지게 일하고도 세금에 시달리는 대신에 왕 자신은 절대 관료제와 막강한 군사력에 의지하여 호화, 사치, 향락에 푹 빠져 있던 시대인 것이다(왕상 11:1~13).
이런 시대였으므로 친위 세력인 유다, 레위, 베냐민 지파를 제외한 이스라엘 열 지파 장로들은 예루살렘에 대항할 수 있는 새로운 지도자감을 찾기 시작했다.
세겜을 중심으로 살피던 그들 눈에 여로보암이 출신 성분도 좋고 초대 왕 사울처럼 용력도 출중하여 능히 그들을 이끌고 솔로몬에게 대항할 수 있는 왕재라고 여겼다.
바로 그때 요셉 지파의 또 다른 성지 실로에서 선지자 아히야의 입을 통하여 하나님의 예언이 나왔다.
여로보암이 요셉 왕조를 열 것이라는 것이다(왕상 11:29-39).
이에 내부 균열을 직감한 솔로몬 왕은 여로보암을 살해하려고 했으나, 여로보암은 백성들의 도움을 받아 무사히 애굽으로 피신했다(왕상 11:40).
솔로몬 왕이 죽자 즉시 귀국한 여로보암은 이스라엘 백성을 선동하여 새로 즉위한 르호보암 왕 앞에 섰다(왕상 12:3).
그는 적자 재정을 물려받은 르호보암이 도저히 수용할 수 없는 요구 조건(세금 감면, 왕상 12:4)을 내걸었다.
에브라임 지파를 앞세운 이스라엘 열 지파의 분리 독립은 정해진 수순이었다. 마침내 여로보암은 세겜 땅에서 북조 이스라엘 왕국의 초대 왕이 되었다(왕상 12:20).
여로보암 왕은 정치에는 유능했으나 영적으로는 무능했다.
세겜 성을 건축하고(왕상 12:25) 벧엘 땅을 성지화시킴으로써(왕상 12:29) 북쪽 백성들의 마음을 정치적으로 예루살렘에서 완전히 분리시킨 것은 성공적이었다.
그러나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어 여호와로 섬기며 왕이 함부로 제사장을 임명한 것 등은 치명적인 영적 잘못이었다(왕상 12:28~33).
하나님은 여로보암의 영적 무지를 일깨워 주기 위해 금송아지 우상을 섬기는 벧엘의 제단을 뒤집어 버리고 그의 손을 마비시켜 버리기도 했으나, 소용이 없었다(왕상 13:1~5).
하나님의 사자에게 간구하여 손이 낫고(왕상 13:6) 왕비를 보내어 실로 선지자 아히야의 예언을 다시 들을 수만 있다면(왕상 14:1~18) 그것으로 만족하였다.
예언을 귀담아 듣고 회개하는 심정으로 종교적 개혁에 나서는 작업은 전무했던 것이다.
그 결과 22년 통치 후 그 아들 나답이 왕권을 승계하였지만, 그 다음해 바로 정권이 잇사갈 족속인 바아사에게 넘어가고 말았다(왕상 14:20, 15:2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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