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 상/하나님이 그들과 만났을때

하나님 없는 제사장 나라의 CEO [<30> 오므리 왕]

미션(cmc) 2009. 1. 18. 21:43

하나님 없는 제사장 나라의 CEO

 

[<30> 오므리 왕]

제사장 임명권뿐 아니라 금송아지 우상을 섬기게 하였다.

그리고 자신의 왕권에 도전할 만한 종교적, 정치적 지도자감을 전혀 키우지 않으면서 백성들을 우민화하는 정책을 지속적으로 밀고나갔다.

그 결과 북조 이스라엘 왕국은 제사장 나라로서의 색깔을 거의 상실하기에 이르렀다.

   

오므리는 남조 유다 왕국과 대치하며 남방 전선을 총괄하고 있던 이스라엘 왕국의 군대장관이었다.

그는 바아사의 아들 엘라 왕 때 발생한 반란과 그 후의 내전을 평정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백성들의 추대를 받아 전체 이스라엘 왕국의 왕으로 즉위한 인물이다. 이 사실은 그가 뛰어난 군 지휘관이었을 뿐 아니라 백성들의 고단한 삶을 살필 줄 아는 지도자라는 점을 의미한다.

왕으로 등극한 군대장관

4년 동안 반란과 내전을 겪으면서 오므리 왕은 국가 통합을 강화하고 잇사갈 왕조를 반석 위에 올려놓을 수 있는 방안을 모색했다.

그는 재위 12년 동안 이러한 방향으로 정책을 추진해 나갔다.

그 내용을 살펴보면, 초대 왕 여로보암의 정책과 대동소이하다(왕상 16:25).

첫째로, 천도를 한 것이다. 여로보암 왕의 수도였던 세겜(왕상 12:25)이나 바아사 왕의 왕도였던 디르사(왕상 15:33)가 아니라, 전혀 새로운 신천지 사마리아에 성을 짓고 6년 만에 천도하였다.

교통의 요지이며 군사 이동이 원활한 사마리아는 일국의 수도로서 제격이었으며, 새 세상을 여는 왕도로서 모자람이 없었다(왕상 16:23-24).

그래서 오므리 왕가가 4대(오므리, 아합, 아하시아, 여호람) 44년 만에 망한 뒤에도 기원전 722년 앗수르에 의하여 북조 이스라엘 왕국이 완전히 멸망당할 때까지 사마리아는 계속 북왕국의 수도 역할을 담당하였으며, 북쪽 이스라엘 백성들은 속칭 사마리아인으로 불리게 되었다.

제사장국가의 정체성은 사라지고

둘째로, 강력한 왕권을 확립한 것이다.

그 방법으로 그는 여로보암의 정책을 계승하였다(왕상 16:25-27).

제사장 임명권뿐 아니라(왕상 13:33) 금송아지 우상을 섬기게 함으로써(왕상 12:28) 남조 유다 아사 왕의 여호와 하나님 숭배 사상과(왕상 14:2-5) 차별화를 시도했다.

그리고 자신의 왕권에 도전할 만한 종교적, 정치적 지도자감을 전혀 키우지 않으면서 백성들을 우민화하는 정책을 지속적으로 밀고나갔다.

그 결과 북조 이스라엘 왕국은 제사장 나라로서의 색깔을 거의 상실하기에 이르렀다.

결론적으로, 오므리 왕은 정권 유지에는 귀재였으나 하나님을 섬기는 데서는 반역자였다(왕상 16:25-26).

따라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은 어쩔 수 없이 북왕국을 떠나 아사 왕이 있는 남유다로 계속 은밀하게 이주할 수밖에 없었다(대하 15: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