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 상/하나님이 그들과 만났을때

바나라의 흥망은 백성의 믿음이 결정 [29 바아사 왕]

미션(cmc) 2009. 1. 18. 21:41

       나라의 흥망은 백성의 믿음이 결정

 

[29 바아사 왕]

칼로써 제사장 나라를 뒤집고 새 왕조를 열었더라도 제사장 나라를 칼로써 지킬 수는 없었다. 제사장의 나라는 백성들의 믿음으로 지켜야 옳았다.

그러므로 칼로 일어서서, 칼로 지켜내려던 바아사의 이스라엘은 더 이상 제사장 나라가 아니었다.

기원전 930년경 솔로몬의 이스라엘 제국은 남과 북으로 쪼개져 북쪽에는 요셉 지파의 에브라임 왕조가 자리 잡고, 남쪽에는 솔로몬의 후계자 르호보암 왕이 다윗 왕조를 이어가고 있었다.

그런데 북쪽 이스라엘 왕국에서 여로보암의 에브라임 왕조가 그 아들 나답의 대에서 어이없이 망하고, 이스라엘 역사상 유례없는 잇사갈 왕조가(왕상 15:27) 등장하게 된다.

잇사갈 정권은 전쟁과 정변 속에서 여러 번 정권 담당자가 바뀌었음에도 기원전 722년 북조 이스라엘 왕국이 망할 때까지 존속하게 된다.
잇사갈 왕조가 나타난 이유는 무엇일까?

그리고 반쪽짜리였지만 그래도 제사장 나라의 명분을 지니고 있던 이스라엘 왕국이 왜 잇사갈 왕조의 이름 아래 종말을 고하고 있는가?

그 이유를 잇사갈 왕조의 문을 연 바아사 왕에게서 찾아볼 수 있다.

# 바아사를 통하여 터져나온 잇사갈의 복수

바아사의 조상 잇사갈(창 30:18)은 유다의 바로 아래 친동생이다.

야곱의 첫째 부인 레아의 다섯 번째 아들이므로 그 역시 정통성을 가진 적자였으나, 포용력 있고 똑똑한 형님 유다의 그늘에 가려서 빛을 보지 못하고 있었다.

이스라엘 제국이 분열될 때 잇사갈 지파는 유다 지파 다윗 왕조의 그늘을 떠났다.

그들 나름으로 독자적인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 것이다.

다윗-솔로몬-르호보암으로 이어지는 다윗 왕조의 유다 지파는 멀리 북쪽 갈릴리 호수에 자리 잡고 살고 있는 친동생 집안 잇사갈이나 스불론에게 오랜 세월 무심했다.

수도 예루살렘에서 귀족생활을 하는 유다 지파에게 가까이 살고 있는 베냐민 지파나 제사장 집안인 레위 지파는 친동기간처럼 느껴졌지만, 먼 변방 먼 친척이 되어 버린 잇사갈이나 스불론에게는 아쉬움이나 애정이 남아 있지 않았던 것이다.

이제 남은 것은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관계, 이익 집단간의 이권 다툼뿐이었다. 무시당한 유다의 바로 아래동생 잇사갈의 복수가 그 후로 바아사의 권력욕을 빌려서 터져나오고 있었다.

그런 때에 잇사갈 족속 바아사에게 정권을 잡을 기회가 다가오고 있었다.

전쟁터에서 무능함을 보인 에브라임 왕조 여로보암 부자가 그 빌미를 제공했다.

여로보암 왕은 르호보암의 아들 아비야 왕의 군대에 쫓겨 80만 대군 중 50만 명이 섬멸당하고, 벧엘 지역마저 빼앗겨 버렸다(대하 13:3,17-20).

그 아들 나답 왕이 복수에 나섰지만 예루살렘에 다가가지도 못하고 블레셋 땅 깁브돈 성에서 발목이 잡혀버렸다(왕상 15:25-27).

대군을 가지고도 작은 성 하나 점령하지 못한 무능한 세겜 출신 왕에게 변방 갈릴리 족속들이 반기를 들고 나섰다. 그

 중심에 에브라임 다음으로 정통성을 자랑하는 잇사갈 족속의 바아사 장군이 버티고 있었다.

그는 서슴없이 진중 모반을 일으켜 나답 왕을 암살해 버리고 왕도를 세겜 성에서 북쪽 디르사로 옮긴 뒤, 새 왕조 곧 잇사갈 왕조의 성립을 전격적으로 선포했다(왕상 15:27-33).

   

# 칼로써 제사장 나라를 세운 왕조가 주는 교훈

칼로써 제사장 나라를 뒤집고 새 왕조를 열었다면 그 결과는 어떻게 될 것인가? 바아사의 잇사갈 왕조는 다음과 같은 역사적인 교훈을 주고 있다.

첫째, 정통성이 약했기에 국내외적으로 끊임없는 전쟁과 정변에 휩쓸렸다.

정통성 있는 다윗 왕조의 유다가 ‘이스라엘 통일’이라는 명분을 내세워 계속 쳐들어 왔다.

바아사 왕은 24년 재위 기간 내내 전쟁에 시달려야 했다(왕상 15:32-33).

정변은 같은 잇사갈 족속 내에서 일어났다.

왕성 수비대장 시므리가 바아사의 후계자 엘라 왕을 죽이고 왕이 되었으나(왕상 16:8-10), 즉시 전방 깁브돈에서 회군한 군대 장관 오므리에 의하여 그 세력이 꺾이고 말았다(왕상 16:15-22). 반대파를 제거하고 무력으로 왕이 된 오므리는 6년 후 수도를 디르사에서 사마리아로 옮기고 다시 6년을 더 통치하다가 자신보다 더 악한 왕인 아들 아합에게 잇사갈 정권의 바통을 넘기게 된다(왕상 16:23-34).

둘째, 제사장 나라는 칼로써 지켜질 수가 없었다.

하나님을 왕으로 섬기는 백성들의 믿음 생활로 지켜지는 나라가 제사장 나라라고 볼 때 바아사의 칼로써 지켜지는 이스라엘 왕국은 더 이상 제사장 나라가 아니었다.

여호와 보시기에 악한 왕 바아사는 여로보암의 길로 행했다(왕상 15:34).

그래서 제사장 나라를 회복해 가고 있던 유다의 아사 왕(왕상 15:11-16)을 시기하여 일생 동안 전쟁을 벌이고(왕상 15:16) 민간 교류마저 완전히 차단시켜 버리고 말았다(왕상 15:17).

라마에 군사 분계선을 설치한 것이다(마 2:18).

그 결과 북조 이스라엘에는 무늬만 선지자 또는 사이비 선지자(왕상 13:18)들이 나타나고, 백성들은 우상 숭배에 빠져들게 되었던 것이다(왕상 14:9-10, 16: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