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상설교'종말론적인 삶 벧후 3:3-13 |
송영수 목사(평성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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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즈음 또다시 잘못된 시한부 종말론자들 때문에 우리 사회가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잘못된 종말론자들이 사회를 시끄럽게 한다고 해서 우리 교회들이 종말론에 대하여 무관심한다든지 기피한다면 이것 역시 잘못된 태도일 것입니다.
성경은 분명히 한 개인의 종말(죽음)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이루어질 우주적 종말(역사적 종말)에 관하여 말씀하면서 이 두 종말을 맞을 준비를 하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개인적 종말이나 우주적 종말은 다함께 확실히 임한다는 점과 그러나 그 날과 시는 알 수 없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서둘러서 철저히 이 두 종말을 준비하는 삶을 살아야 될 것입니다.
불신자들이 종말을 준비하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먼저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을 받아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준비부터 해야 될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 성도들은 어떻게 종말을 준비하는 삶을 살아야 할까요?
첫째로, 깨어있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성경은 종말에 관하여 경고와 교훈을 주면서 무엇보다도 『깨어 있으라』고 명령합니다(마 24:42-43, 막 13:33, 살전 5:6, 계 16:15 등). 종말이 언제 도적같이 임할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깨어있다』함은 종말에 대해 항상 각성하고 준비하고 있으라는 뜻일 것입니다. 주님의 재림이 가까워 오면 적그리스도, 거짓 선지자, 이단들이 더욱 발호하기 때문에 우리 성도들이 깨어 있지 않는다면 언제 미혹되어 끌려갈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얼마나 많은 이단들이 극성을 떠는지 정말 정신 바짝 차려야할 것입니다. 어떻게 깨어 있을 수 있을까요? 성경은 무엇보다도 먼저 『깨어 기도하라』(눅 21:36)고 가르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기도하고 있어야 우리 영혼이 깨어있게 됩니다. 기도하여야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고 시대를 분별하며, 마귀의 궤계를 간파하며, 시험에 들지 않으며, 마귀를 이기며(엡 6:18), 사명을 감당하면서 종말을 준비하는 삶을 잘 살 수가 있습니다.
또한 깨어 있으려면 하나님의 말씀으로 무장하여야 합니다. 마귀는 성도들에게서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빼앗아 가려하며, 혼잡하게 하고, 복음의 광채를 비취지 못하게 하며(고후 4:4), 잘못된 교훈 다른 복음을 가르쳐 우리를 미혹시킵니다(갈 1:7). 하나님의 말씀을 모르면 잘못된 종말론자들, 이단자들에게 끌려갈 수 밖에 없습니다.
에덴 동산에 아담과 하와를 찾아와 범죄하여 타락케한 마귀의 방법이 다름 아닌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시켜 믿음을 빼앗아간 방법이었습니다. 그 마귀는 오늘도 성경을 잘 모르는 자들에게 찾아와 시한부종말론과 비진리를 가르쳐 성도들의 바른 종말론적 삶을 방해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말씀과 기도로 무장하여 깨어 있어야 하겠습니다.
둘째로,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본문 11절에 「거룩한 행실과 경건」한 삶을 살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신랑되신 주님이 신부된 교회와 성도들에게 원하시고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이 세상에서 부귀 영화를 누리는 것일까요? 소위 번영신학(Prosperity Theology)에서 말하는 이 세상의 번영과 성공일까요? 아닙니다. 그와 같은 것들은 바른 성도의 삶을 사는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보너스로 주시는, 따라 오는 것입니다. 주님이 성도들에게 원하시는 것은 점도 흠도 없는 정결하고 거룩하고 경건된 삶인 것입니다(벧후 3:14, 살전 5:23). 『개같이 벌어 정승같이 쓰는』 생활태도는 불신세상 사람들이 가질 수 있는 삶의 모습일지 몰라도 성도들은 거룩하게 살아야 합니다. 『거룩』이란 뜻은 『구별』되었다는 의미입니다. 불신 세상사람들과 다르게 살아야 한다는 것이지요. 주님이 요한복음 17장에서 대제사장의 기도를 하실 때도 『저들을 거룩하게 하옵소서』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나라 성도들의 신앙 생활에 약점이 있다면 교회에서는 거룩한 것 같은데 교회 문밖에만 나가면 거룩한 모습이 사라진다는 소위 이원론적 삶의 태도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면전」(Coram Deo) 의식을 가지고 교회에서나 가정에서나 학교에서나 직장에서나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아야 합니다(롬 12:2). 타락한 문화를 따라가지 말고 이 세상을 기독교 문화로 바꾸어야 할 사명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신부가 어떻게 살던 돈만 많이 가지고 시집오기를 기다리는 신랑이 있다면 그는 신부를 사랑하지 않는 타락한 신랑일 것입니다.
다시 오실 우리 신랑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 성도들을 사랑하사, 거룩하고 정결한 삶을 살다가 만나서 혼인잔치를 베풀기를 원하십니다.
깨끗한 직업을 가지고 수고하고 땀흘려 번 돈으로 헌금하고 주의 일 할 때 주님은 기쁘게 받으십니다. 아벨과 같이 의롭고 거룩한 삶의 열매를 가지고 예배 드릴 때 주님은 우리 예배를 기쁘게 받으십니다. 참된 경건한 삶은 하나님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것이며,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것입니다(약 1:27).
우리 성도들은 이렇게 거룩한 삶을 살다가 주님을 만나야 하겠습니다.
셋째로, 충성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주님 앞에 갈날이 가까울수록, 또는 주님의 재림이 가까울수록 더욱 충성스럽게 열심히 살아야 하겠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의할 일은, 충성하는 삶을 산다하여 우리의 세상에서의 일상생활은 소홀히 하라는 것은 아닙니다. 이단들은 주의 재림이 가까웠으니, 또는 몇년 몇월 며칠에 오시니 세상에서의 일상의 삶을 정리하고 모이라고 합니다마는 성경은 그렇게 가르치지 않습니다. 세상에서의 우리의 삶도 열심히 살아야 합니다. 아브라함 카이퍼(Abraham Kayper)는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두가지 명령」을 말했습니다. 하나는, 문화명령(Cultural Mandate, 창 1:28)인데 이 세상에서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여 만물을 정복하고 다스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직업을 신성히 여기며 (단, 하나님이 허락지 않으시는 악하고, 타락한 직업은 제외) 최선을 다해 열심히 살아야 합니다. 학생은 열심히 공부하고, 농부는 열심히 농사짓고, 학자는 열심히 연구하고, 예술가는 예술에 정진하여 하나님께서 얼마나 아름다우신 분인가 나타냄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가정주부는 가사를 잘 돌봄으로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축복된 가정을 복되게 해야 합니다.
다른 하나는 소위 지상명령(The Great Commission, 마 28:18-20)인 모든 족속에게 복음을 전하라는 명령입니다. 주님께서는 재림의 시기에 관하여 말씀하시면서 여러 가지 징조를 가르쳐 주시고, 그러한 징조들이 나타나되 아직 끝은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거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마 24:14)고 말씀하시면서 복음전파가 온전히 이루어질 때 재림하시겠다고 하겠습니다. 성도의 가장 큰 사명은 복음을 전파하는 일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이유가 천국가기 위한 것 뿐이라면, 왜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후 곧바로 천국으로 데려가지 않으시고 이 땅에 살도록 하십니까? 복음을 전하여 택한 백성을 그리스도에게 인도하고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라는 것입니다(벧전 2:9). 이 세상은 성도들의 일터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자가 없이 어떻게 택한 자가 구원을 얻겠습니까?(롬 10:9-17) 택한 자가 다 구원 얻기 전에는 주님이 재림하실 수 없습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주신 달란트를 활용하고, 모든 기회와 모든 방법을 동원하여 전도와 선교와 주의 일에 충성하다가 주님 앞에 서야 하겠습니다.
넷째로, 그리스도의 재림에 소망을 두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본문 12절에서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고 하였고, 13절에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에 거하는 바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바라보아야 할 곳은 이 땅이 아니고 하늘 나라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입니다. 이 땅에 있는 모든 것은 썩어지고 지나가고 불타버릴 것이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을 비롯한 족장들은 이 세상을 바라보고 산자들이 아니라 본향인 하늘 나라를 바라보며 살았던 자들입니다(히 11:8-16). 그래서 그들은 이 세상 삶을 나그네의 삶이라고 생각하며 우거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모세도 이 땅에서의 부귀영화를 버리고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으며,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재물로 여겼습니다. 주님으로부터의 상이 있음을 믿었기 때문입니다(히 11:24-26). 사도 바울도 이 세상의 모든 화려한 배경을 분토와 같이 여기며 위에서 주시는 상을 바라보며 생명도 귀하게 여기지 않으면서 은혜의 복음을 전하는 일에 전 생애를 바쳤습니다(행 20:24, 딤후 4:6-8). 주님께서도 우리의 보물을 땅에 쌓지 말고 하늘에 쌓으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천년 만년 살 것처럼, 이 땅에서의 삶만을 계획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노후 대책은 세우면서 왜 이 세상의 사람이 끝난 후 주님 앞에서는 죽음 후의 대책을 하지 않습니까? 우리의 평생이 날아가듯이 신속히 지나갑니다. 이제부터는 상받을 일만을 해야되지 않겠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의 재림의 시각이 순간순간 다가오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나를 부르실 시간도 점점 가까워 오고 있습니다. 종말이 다가오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이제 말씀과 기도로 깨어 있습니다. 거룩한 삶으로 신부단장 하십시다. 나에게 주신 사명을 충성스럽게 감당하십니다. 그래서 나를 칭찬하시고 상주실 주님의 재림의 날을 소망 삼고 영광의 그날까지 달려가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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