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노를 조절합시다(엡 4:26~32) |
김정태 목사(부산 성동교회) |
▲ 김정태 목사 |
분노의 바람은 성령의 횃불 끈다
화를 더디게 하며 용서하는 성숙한 성도 되어야
정말 어처구니없는 일이 대한민국의 수도 서울의 한 가운데서 일어났습니다. 분노에 찬 70세 남자가 국보 1호인 숭례문을 방화한 것입니다. 이 방화로 유구한 세월을 우리와 함께한 숭례문은 불과 5시간 만에 불에 타 버렸습니다. 숭례문은 600년이나 된 문화재이며 국보 1호로 대한민국의 자존심이었습니다.
한 사람의 분노. 그 작은 분노가 사회적으로 엄청난 재앙과 상처를 안겨 준다는 사실을 우리는 다시금 되새겨 봐야 할 것입니다.
분노의 발생과 내적증상
분노하게 되면 인체에서는 ‘스트레스 반응’이라는 생리적인 변화가 생기는데, 아드레날린이나 코티졸, 카테콜라민 같은 스트레스 호르몬이 분비됩니다. 이 호르몬은 심박동을 빠르게 하고, 혈압을 높여주고, 근육을 긴장시키며, 혈당을 높여 주게 됩니다.
분노하게 되면, 다음으로 부신 피질 신경계가 흥분하게 됩니다. 부신 피질 신경계가 흥분하면서 안색이 변하고 상대방이 인지하는 상황으로 됩니다. 내부적인 분노는 분노 근원을 자신에게 둠으로 침울과 우울증과 같은 질병 동반하지만, 외부적인 분노는 분노 근원을 상황에 둠으로 타인 또는 사회에 원한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분노의 외적발전
분노의 근원을 자신에게 두면, 자신을 소극적인 사람으로 만들면서 침울하게 되고 우울증과 같은 정신적인 고통을 당하게 됩니다. 그리고 분노의 근원을 상황에 둘 때에는, 사람이나 환경에 원한을 갖게 되고 복수심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분노 근원을 상황에 둘 때 분노는 계속 발전하게 됩니다.
분노는 안색을 변하게 합니다. 분노는 스트레스 호르몬을 방출하게 하고 부신과 피질의 흥분으로 안색을 변하게 합니다. 가인과 아벨이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을 때에 하나님은 아벨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가인의 제물은 받지 않았습니다. 가인은 분노로 인하여 안색이 변하게 되었습니다(창4:5,6). 가인이 분노의 근원을 자신에게 찾았다면 죄를 짓지 아니했을 것입니다. 분노의 근원을 타인에게 찾았기에 동생을 죽이는 최초의 살인자가 되었습니다.
분노는 소동을 일으킵니다. 바울의 전도로 돈벌이를 하지 못하게 된 데메드리오와 직공들은 분노로 2시간이나 소리를 지르며 소동을 했습니다(행19:28-34). 바울은 분노가 떠들고 소동하는 것이라고 하면서 버리라고 했습니다(엡4:31). 노함은 분노를 가져오게 하고, 분노는 소동을 일으키게 됩니다.
또한 분노는 잔인한 사람으로 만듭니다. 분노는 사람을 가만히 있게 만드는 감정이 아닙니다. 분노는 감정 조절을 하지 못하게 하고, 이성을 잃어버리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잠언 기자는 미련한 자의 분노는 돌과 모래보다도 무겁고, 분노는 잔인하고 창수 같다고 했습니다(잠27:3,4).
분노는 또한 살인을 하게 합니다. 2003년 대구 지하철참사는 자신의 신병을 비관해 분노한 사람이 나머지 불특정 다수를 상대로 방화를 저질러 192명이라는 무고한 사람을 숨지게 하고, 140명에게 중상을 입힌 대 참사였습니다. 이번에 숭례문 방화범 채모씨(70세)도 지하철 사고를 내려고 하다가 인명 피해 때문에 숭례문에 방화 했다고 했습니다.
분노를 조절하는 방법
첫째, 분노는 치명적 인격의 상처임을 기억하고 조절해야 합니다. 노하기를 속히 하는 사람은 인격적인 장애인으로 어리석은 일을 행한다고 했고(잠14:17), 우매자라고 했습니다(전7:9). 호라티우스는 “노여움은 한때의 광기로, 억제하지 않으면 노여움이 당신을 삼키게 될 것이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사람인지라 분노를 낼 수도 있지만, 분노의 수위와 시기를 조절해야 합니다. 잠언에는 노하기를 더디하면 용사보다 낫다(잠16:32)고 했고, 야고보 사도는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와 성내는 것은 더디하라고 했습니다(약1:19). 세네카는 “분노를 지연시키는 것이 분노에 대한 최선의 묘약이다”라고 했습니다.
둘째, 분노는 죄를 짓고 마귀가 틈타는 것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마귀로 틈을 타지 못하게 하라(엡4:26,27)고 했습니다. 분노는 마귀가 틈타는 통로이므로 스스로 분노를 해소하는 방법을 세워야 합니다. 돕슨은 말하기를 “사탄이 교회와 교인을 망쳐놓는데 제일 좋은 책략은 서로가 서로에게 노여움을 참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셋째, 분노는 성령을 근심케 하고 은혜를 쏟는 것임을 잊지 맙시다. 분노의 바람이 불면 영성의 횃불은 꺼지게 됩니다. 바울은 분노를 하는 것은 성령을 근심케 하는 것이라고 했고(엡4:30), 야고보는 사람의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한다(약1:20)고 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말씀으로 받은 은혜도 분노 몇 번에 다 쏟아지고, 평생으로 세운 인격도 분노 몇 번에 여지없이 무너지게 됩니다.
넷째, 성도는 분노를 버리고 오히려 용서하고 사랑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 성전에 가셔서 장사하는 사람들을 보고 채찍으로 쫓아내고 상을 엎었습니다(요2:13-16). 이것은 사사로운 분노가 아니라 거룩한 분노였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분노는 마음의 등불을 꺼 버리는 바람과 같은 것이고, 땅벌 집에 돌을 던지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바울은 노함과 분냄을 버리라고(엡4:31) 말하고 있습니다. 이제부터 우리는 단순히 버리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한걸음 더 나아가서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용서하라”(엡4:32)는 말씀을 실천하며 사랑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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