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령한 복을 받은 성도
(엡 1:3-7)
[3]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시되 [4]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5]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6]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 [7]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속량 곧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세상에는 어느 누구를 막론하고 불행을 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 것처럼, 행복을 원치 않는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일을 하든지 공부를 하든지 돈을 벌든지 무슨 종교를 믿든지 다 행복을 위해서일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이유도 마찬가기 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를 믿는 나는 지금 행복하다고 생각하는가? 아니면 불행하다고 생각하는가? 한번 자문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막상 그 같은 질문에 선 듯 대답하지 못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무엇이 불행이고, 무엇이 행복인지 행복의 기준을 잘 모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불행한 사람과 행복한 사람을 구분하는 잣대가 무엇입니까? 무엇보다 먼저 건강이나 재산의 많고 적음이나 사회적인 지위의 높고 낮음일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흔히 완벽한 복이라고 생각하는 기준을 뜻하는 오복도 역시 그 같은 것들입니다.
오복이란 어떤 사람은 1) 수(壽) 2) 부(富) 3) 강녕(康寧) 4) 유호덕(攸好德) 5) 고종명(考終命)이라고 하기도 하고, 1) 치아가 좋아야 무엇이든지 잘 먹고 오래살 수 있고 2) 자손이 많아야 대가 끊어지지 않고, 3) 부부 해로하고 남편이나 아내가 오래 살아 야하고, 4) 손님 대접을 하려면 가진 것이 많아야 하고, 5) 죽어서 명당에 묻혀 자손들에게 복을 전해 줄 수 있어야 오복이라고도 합니다.
과연 우리 주변에 오복의 조건을 다 갖춘 행복자가 과연 몇 사람이나 될까요? 설령 그러한 조건을 다 충족했다고 해서 정말 행복할 수 있을까요?
설령 오복의 조건을 다 갖춘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결코 죽음을 맞게 되면 가지고 있는 모든 것들은 물거품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에게 ‘오복’은 허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으심을 받은 인간에게 진정한 복은 무엇일까요? 오늘 성경 본문에서 그 답을 찾으시기 바랍니다.
1. 신령한 복
오늘 성경은 사도 바울이 복음을 전하다가 감옥에 갇혀 고난을 받고 있으면서 교회들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편지를 기록한 옥중서신입니다.
바울은 감옥에서 옥중서신을 기록했다고 해서 티끌만큼도 신세 한탄이나 원망 불평을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감옥 밖에서 자유롭게 사는 성도들에게 축복을 빌었습니다.
『[엡 1:1, 2]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은 에베소에 있는 성도들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신실한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2]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이는 모든 사람들이 바라는 은혜와 평강이 돈으로 사거나 수고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어주어야만 인간이 받아 누릴 수 있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행복은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은혜와 평강이 아니라 돈이 많아야만 행복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하나님을 믿는 것을 거부하고 오로지 돈을 버는 일에만 급급하게 됩니다.
그러나 막상 세상을 살아가노라면 행복을 얻기도 전에 일을 하고 돈을 버는 과정에서 여러 가지 고난과 스트레스를 맛보게 되며 불의의 사고를 만나고 심지어 불치의 병을 얻기도 하는 것이 인생의 현주소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고달픈 현실에서 잠시나마 탈출을 하기 위해 술이나 담배나 유흥이나 마약에 빠지거나, 오락이나 운동을 통해서 스트레스를 풀거나, 고달픈 현실에서 탈출하려고 휴가를 계획하기도 합니다.
물론 그 같은 것들이 일시적인 도움이 될 수도 있지만 인생의 근본 문제를 해결해 주지는 못합니다. 왜냐하면 그 시간이 지나고 나면 다시 고달픈 현실로 되돌아와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될 경우 심리적으로 우울하게 되고, 과연 인생이 무엇인가? 하는 문제에 대한 의문이 생기게 되고, 나중에는 자신이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지 목적을 발견하지 못한 채 삶의 의욕을 잃게 되고, 사람을 불신하는 대인 기피증에 걸리기도 하고, 내일에 대한 희망을 잃어버리고 삶에 회의를 생기면서 자살도 마다하지 않는 것입니다.
심지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교회를 다닌다고 해서 하는 사람들 중에도 그러한 사람들이 있다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그렇다면 고달픈 현실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에게 과연 무엇이 시급한 것일까요?
그것이 바로 사람들이 행복의 절대조건이요 지상 최상의 축복이라고 생각하는 오복보다 더 좋은 복인 ‘신령한 복’을 받아야만 한다고 오늘 성경이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신령한 복은 무엇이며, 신령한 복은 어디서 누구에게로부터 얻어 지는 것일까요?
1) 신령한 복의 출처
[엡 1:3]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시되
여기서 ‘신령한 복’이란 육체적인 복과 대조가 되는 영적인 복을 뜻하는 것입니다. 창조주 하나님께서 인간을 보이는 육체와 보이지 않는 영혼을 가진 존재로 만드셨기 때문에 육체적인 복과 더불어 신령한 복까지 받아야만 전인적인 행복을 누릴 수 있음을 뜻합니다.
그 같은 신령한 복의 출처는 세상이 아니라 하늘이며,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아무리 돈과 권력을 가지고 있어도 복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믿지 않으면 신령한 복을 받을 수도 없고, 신령한 복을 받지 않고는 행복할 수 없는 것입니다.
2) 신령한 복이란?
그렇다면 ‘신령한 복’은 무엇일까요? 육체적인 복은 눈으로 볼 수 있기 때문에 누가 복을 받았는지 받지 못했는지 쉽게 확인할 수 있지만 신령한 복은 말 그대로 영적인 복이기 때문에 믿음의 눈이 열리지 않고는 받았는지 받지 못했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신령한 복은 돈이 있고 없고, 권세가 높고 낮고 와는 하등에 상관없이 한번 받은 자에게 영원히 변함이 없는 복으로 하나님 아버지께서 세상을 창조하시기 영원 전에 우리를 하나님의 아들딸로 택하신 복입니다.
[엡 1:4,5]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5]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여기서 ‘창세전’이라고 한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택하신 동기는 우리의 성품이나 행동을 보시고 택하신 것이 아니라 무조건 택하신 것을 뜻하며, ‘자기의 아들들’이라는 말은 친아들이 아니라 양자를 뜻하는 말입니다.
당시 로마법에 의하면 양자 제도가 가능하였는데 로마 시민이 노예의 아들을 양자로 입양한다고 할지라도 그 아이는 법적으로 친자식과 동일한 권한이 부여되어 양아버지의 이름과 재산까지 상속받을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전쟁에 패배하여 노에가 된 자손이지만 양자로 삼기만 하면 얼마든지 가능한 것처럼, 타락한 인간일지라도 하나님이 양자로 택하시기만 하면 하나님의 자녀가 얼마든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믿음으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하나님의 자녀로 입양함을 받게 된 것이 바로 신령한 복입니다.
(요 1: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아무나 예수를 믿고, 아무나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을 하고, 아무나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은 사람만이 가능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는 기독교는 내가 선택한 종교가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선택하셨기 때문에 설령 잘 믿는다고 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고 교만할 것도 없는 것은 그것이 나의 의지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이기 때문입니다.
2. 특권과 책임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일정한 법칙과 원칙이 있습니다. 그것은 어느 누구를 막론하고 아담의 자손은 자신의 행위로 구원을 받을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일방적인 은혜로 구원을 얻었다는 것입니다. 예외는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아무런 공로가 없이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택하심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은 무엇보다 큰 특권이 아닐 수 없습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아무런 조건없이 일방적으로 베풀어 주신 은혜이지만 하나님은 그같은 특권을 받은 자가 마땅히 감당해야 할 책임과 의무를 부여하시는 일정한 법칙이 있으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구약에서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요구하신 계명과 율례와 법도인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를 보면 하나님의 그같은 명령을 순종하였을 때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육신적인 복을 받았지만 불순종하였을 때는 육신적으로 고난을 받았습니다. 그것이 바로 순종하는 자에게 천대까지 복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으며, 불순종하는 자에게 삼사대 까지 저주를 받으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출 34:7) 『인자를 천대까지 베풀며 악과 과실과 죄를 용서하리라 그러나 벌을 면제하지는 아니하고 아버지의 악행을 자손 삼사 대까지 보응하리라』
그것이 바로 이스라엘의 역사입니다. 이스라엘이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택하심을 받은 것이 특권이었지만 하나님이 그 백성들에게 부여해 주신 책임과 의무인 율법의 말씀을 지키지 않았을 때 결국 이방 나라에 멸망을 당하게 하실 정도로 공의로우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렇다면 오늘 성경에서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택하신 특별한 은혜로 말미암아 우리가 예수를 믿고 교회를 다니고 있는 것은 참으로 감사한 일입니다.
우리가 그러한 축복을 받은 것이 우리의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의 일방적인 은혜라면 어떤 면에서 이스라엘 백성들보다 예수를 믿는 우리가 하나님께 받은 축복이 더 크고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이방인인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은 특권 중에 특권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본래 타락한 아담의 자손으로 머리에서 발끝까지 죄로 얼룩진 인생이기 때문에 도저히 거룩하신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같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신 것이며 우리의 죄를 대속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는 조건을 갖추도록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일컫게 하여 주신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받은 축복과 비교할 수 없는 큰 은혜와 축복과 특권입니다.
그러나 아담의 자손인 우리가 머리에서 발끝까지 죄악으로 얼룩진 것을 아시고 부르신 하나님은 그와 같은 우리를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기 위해 죄 없으신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심으로 흘리신 보혈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룩하고 흠이 없는 하나님의 아들 딸이 되게 하셨습니다.
[엡 1:7]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속량 곧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그것만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그와 같은 축복이 한시적인 것이 아니라 영원 불변한 것임을 보증하시기 위해 성령을 보내어 주시기까지 하셨습니다.
[엡 1:13]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
그와 같은 성령의 인 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구원의 확신을 갖게 되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아야 겠다는 결단을 할 수 있고 또한 성령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주님의 말씀에 순종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고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죄 씻음을 받은 것은 티끌만큼도 우리의 공로가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의 값없는 은혜요 특권이라면,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에게도 이스라엘 백성처럼 마땅히 우리가 감당해야 할 책임과 의무를 요구하시는 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창조하시고, 자녀로 택하시고, 구원하시고, 천국 백성이 되게 하신 궁극적인 목적입니다. 과연 그것이 무엇일까요?
1) 그것이 바로 오늘 성경에 말씀하신 것처럼 하나님께서 우리를 택하시고 구원하신 목적인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 찬송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엡 1:6]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
여기서 ‘찬송하게’라는 말씀은 단순히 노래를 부르는 것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나같은 죄인을 구원하시기 위해 창세전에 택하시고 그리스도 예수의 보혈로 죄를 씻어 주시고 성령으로 인치심으로 확고한 구원을 보증하여 주신 하나님을 높이고, 감사하고, 자랑하는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찬송하는 최고의 삶이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은 사람이 가장 힘써야 책임과 의무는 하나님을 찬송하는 예배의 삶인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 사람들에게 구원받은 성도에 걸 맞는 언행심사를 통해서 본이 되는 선한 삶을 살아야만 세상 사람들이 그 사람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구원받은 성도가 최우선으로 생각하고 힘써야 할 책임과 의무입니다.
2)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은 자에게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또 하나의 책임과 의무는 열매를 맺는 신앙 생활을 하라는 것입니다.
지상 교회는 마치 알곡과 가라지가 함께 자라는 밭처럼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은 백성과 받지 못한 백성이 함께 어우러져 교회를 다니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 누가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은 자녀인지 알 수 있는 방법이 바로 열매라는 것입니다.
(요 15:16)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열매를 맺게 하고 또 너희 열매가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라』
그 열매가 바로 전도를 통해서 하나님이 택하신 자녀를 세상에서 교회로 불러내는 일입니다.
하나님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이 ‘전도’라는 방법으로 당신이 택하신 백성을 주님이 피로 값 주고 사신 교회로 부르십니다.
(행 18:10) 『내가 너와 함께 있으매 어떤 사람도 너를 대적하여 해롭게 할 자가 없을 것이니 이는 이 성중에 내 백성이 많음이라 하시더라』
그러므로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음을 믿는다면 그것은 나의 의지나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이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나를 택하시고. 성령께서 나를 교회로 인도하신 삼위일체 하나님의 은혜임을 깨닫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전도의 열매를 많이 맺어야 할 책임과 의무가 있다는 것입니다.
3) 성경 말씀을 읽고 듣고 연구하고 전하는 일이 구원받은 신령한 복을 받은 성도들이 최선을 다해야 할 책임과 의무입니다.
우리는 구원의 비밀을 어떻게 알게 되었습니까? 어떤 사람은 마치 칼빈이 만들어 낸 신학으로 오해하지만 성경 말씀에 그렇게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엡 1:13]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
세상에 어느 누구도 성경으로 말미암지 않고 창조주 하나님과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와 보혜사 성령을 알 수 없습니다. 누구든지 성경 말씀이 아니고는 하나님이 우리를 어떻게 구원하셨는지 구원의 도리를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우리를 구원받게 하는 진리요, 구원받은 우리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가르쳐 주는 안내자요 그 길로 갈 수 있도록 도우시는 성령을 만날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아무리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았다고 할지라도 성경을 읽고 듣고 순종하지 않으면 믿음의 확신과 마음에 기쁨과 감사가 식어지는 것입니다.
믿음은 들음으로 난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고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죄씻음을 받고 성령으로 인침을 받은 신령한 복을 받은 사람이라면 무엇보다 말씀을 읽고 듣는 일에 더욱 힘써야 합니다.
개혁주의의 거두 존 칼빈은 제네바에 있는 성 베드로 교회에서 에베소서 한 권을 마흔 여덟 번에 걸쳐 설교를 하였다고 합니다. 그의 고백을 들어 보면 더 명확하게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어떻게 우리를 창세전에 선택하셨는지에 대해서 논증이나 이성으로는 이해할 수 없지만 하나님이 우리에게 성경을 통해서 그것을 선포하셨음으로 우리가 그것을 알 수 있게 되었다. 그리스도 믿음안에서 깨닫게 될 때 그 진리가 충분히 스스로 입증되는 것을 체험할 수 있다”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거룩하고 흠이 없는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시기 위해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시고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우리의 죄를 씻어 주셨다는 성경 말씀을 이해하고 믿게 될 때 그 은혜에 감사하며 더 더욱 거룩하고 흠이 없는 삶을 살아야 하겠다는 강력한 동기를 부여하게 됩니다.
결 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세상에서 아무리 육신적인 복을 많이 받았다고 할지라도 죽음의 때가 오면 모두 다 버려야만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신령한 복을 받은 사람은 비록 고달픈 육신의 삶을 살지라도 하나님을 찬송하고 예배하고, 이웃에게 복음을 전하며, 서로 사랑하며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는 삶을 살 때 육신의 삶까지도 행복하게 됩니다.
인간이 육신을 가지고 살기 때문에 먹고 마시는 문제가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결코 먹고 마시기 위해서 세상에 태어난 존재가 아니고 먹고 마시는 문제는 한도 끝도 없는 문제이기 때문에 거기에만 얽매이면 인생의 본질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만일 인생의 본질을 잃어버리면 아무리 잘 먹고 잘 산다고 할지라도 그것만으로 행복할 수 없고 오히려 그 때문에 불행한 삶을 자초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의 가치는 그 사람이 얼마나 좋은 것을 먹고 마시는가? 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 볼 때 바람직한 생각, 감동을 주는 말, 본이 되는 삶을 사는가 여부에 따라 존경이나 비난을 받게 됩니다. 그것이 입술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삶으로 하나님께 영광이 돌려지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고달픈 현실을 살아갈수록 인생의 본질을 추구하는 노력을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그리스도인들은 무엇을 먹고 마실까? 하는 염려를 버리고,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추구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지금까지 육신을 가진 우리가 삶의 우선 순위를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입을까? 하는 것이 인생이 살아가는데 있어서 가장 시급하고 중요한 문제라고 생각하며 살아왔으나 그럴수록 더 힘들고 어렵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근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더 좋은 삶은 그 같은 염려를 하나님께 맡기고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추구하는 삶의 본질을 회복하라는 말씀으로 오늘 우리가 돌아가는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그렇게 살아야 할 가장 큰 이유는 그렇게 해야만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고, 행복한 삶을 살 수 있기 때문이 아닙니다.
무엇보다 그렇게 사는 것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며, 하나님께서 나를 세상에 태어나게 하신 이유이며, 또한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를 구원하시기 위해 십자가에 달려 피 흘려 죽으신 궁극적인 목적이며, 결과적으로 내게 복이 되기 때문입니다.
(마 6:33)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그것이 창조주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으신 목적이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피를 흘리신 이유이고, 하나님께 찬미하며 영광을 돌리는 행복한 삶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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