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 교/이규왕목사

바울의 소원, 우리의 소원(엡 1:17-19)

미션(cmc) 2009. 6. 22. 08:28

바울의 소원, 우리의 소원

 

(엡 1:17-19)
『[17]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18] 너희 마음의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이며 [19] 그의 힘의 위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하나님은 우리의 소원을 들으시고 이루어 주시는 분이지 인간들처럼 소원은 없으실 것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에 보면 하나님께서도 소원이 있으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빌 2:13)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사람이 누구를 사랑하게 되면 그 사랑하는 사람의 소원이 나의 소원이 되는 것처럼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면 하나님의 소원이 나의 소원이 되는 것입니다. 그 대표적인 사람이 사도 바울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소원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인간들처럼 부자가 되거나 새집을 갖는 것이 소원이 아니라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들이 구원을 받는 것을 소원하신다고 성경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딤전 2:4)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본래 기독교에 대해서 적대적이었던 사울이 다메섹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기 위해 가는 길에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후 변하여 새사람이 되어 오로지 그리스도만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었고 그리스도의 소원이 바울의 소원이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바울의 소원이 무엇일까요? 바울은 비록 답답한 감옥살이를 하면서도 티끌만큼도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고 오히려 감사의 조건을 찾아 하나님께 감사하였을 뿐 아니라 주님의 몸된 에베소 교회를 염려하며 부흥하기를 간절히 소원하는 모습을 오늘 성경에서 우리가 배워야 하겠습니다.

 

1. 바울의 감사기도
 에베소는 지리적으로 지중해 동쪽과 서쪽 사이의 바다 길과 간선 도로 사이의 수송로를 연결하는 소아시아의 항구도시로 교통 요충지입니다. 동서양의 문명과 사상과 종교와 자본이 만나는 곳으로 로마 제국의 국제적인 상업의 중심지였습니다. 에베소에는 세계 칠대 불가사이 중에 하나로 꼽히는 다이아나 신을 섬기는 아데미 신전이 있던 곳이었습니다.
 이는 영적으로 음란하고 우상이 많은 도시로 기독교인들이 신앙 생활을 하기가 어려운 곳임을 뜻합니다. 바울은 그와 같은 에베소에 가서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회당에서 석 달 동안을 담대히 하나님 나라에 대하여 강론하였고, 삼년 동안 눈물로 목회를 하였으며, 밀레도에서 에베소로 사람을 보내어 교회의 장로들을 청하여 마지막 고별 설교를 하고 눈물로 작별을 한 뜻깊은 곳이기도 합니다.
(행 20:35-38, 쉬운) 『[35] 나는 모든 일에서 여러분에게 모범을 보였습니다. 여러분은 저처럼 열심히 일해서 약한 사람을 도와야 합니다. 또한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고 하신 주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36] 바울은 이 말을 마친 뒤에 무릎을 꿇고 모든 사람들과 함께 기도했습니다. [37] 그들은 다 바울을 껴안고 작별의 입맞춤을 하면서 울었습니다. [38] 특히 그들은 다시는 자기를 보지 못하리라는 바울의 말을 듣고 슬퍼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배 타는 곳까지 바울을 배웅했습니다.』
 바울이 그러한 에베소 교회를 쉽게 잊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고생스러우면 더욱 사랑하는 사람이 보고 싶은 것처럼 바울은 로마 옥중에서 교회들이 궁금하던 중 에베소 교회에 대한 긍정적인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엡 1:15) 이로 말미암아 주 예수 안에서 너희 믿음과 모든 성도를 향한 사랑을 나도 듣고 (16) 내가 기도할 때에 기억하며 너희로 말미암아 감사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고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주 예수 안에서 너희 믿음’이라는 말과 ‘모든 성도를 향한 사랑을’이라는 말씀입니다.
 이는 에베소 교회의 성도들이 하나님과 관계에서는 신실한 믿음을 이웃과의 관계에서는 모든 성도를 사랑하는 균형 잡힌 교회였음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교회의 본질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아무리 교회가 선교와 구제를 많이 하고, 성도들이 예배를 열심히 참석하고 기도를 많이 한다고 할지라도 이웃에 대한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요, 아무리 이웃을 사랑한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없으면 그 사랑은 자기를 위한 위선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후일에 에베소 교회가 그 같은 사랑을 상실하였을 때 주님으로부터 혹독한 책망과 경고를 듣게 되었습니다.
(계 2:1-5, 쉬운)  “에베소 교회 지도자에게 이렇게 써서 보내어라. ‘오른손에 일곱 별을 쥐고, 일곱 금촛대 사이를 걸어 다니시는 분의 말씀이다. [2] 나는 네 행위를 알고 있다. 그 수고와 인내, 또 네가 악한 자들을 그대로 두지 않고, 스스로 믿음의 형제인 척하는 자들을 시험하여 그들이 가짜인 것을 밝혀 낸 일도 잘 알고 있다. [3] 너는 나를 위해 고난을 참고, 낙심하지 않으며, 잘 견뎌 주었다. [4] 그러나 너를 책망할 일이 한 가지 있다. 그것은 네가 나를 처음만큼 사랑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다. [5] 이전에 네가 나를 어떻게 사랑했는지 그 때를 돌이켜 보아라. 어디서 잘못되었는지 생각하고, 회개하여, 예전처럼 행하도록 하여라. 만일 네가 회개하지 않으면, 내가 가서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치워 버릴 것이다.』
 그러나 에베소 교회가 그 같은 경고를 끝내 무시하다가 결국은 지진으로 폐허가 되어 교회는 다 무너져 유적들만이 남아 있는 광경을 볼 수 있습니다.
 이는 교회와 성도들이 정의로운 삶을 빙자하여 사랑을 잃어버리고서도 잘믿는 줄로 착각하고 있는 것이 얼마나 두려운 결과를 자초하는 것인지를 경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 연조가 오래 될수록 우리 속에 잃어가고 있는 것은 구원의 감격과 더불어 주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이 식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주를 위해 교회를 위해 무엇을 하느냐? 가 아니라 어떤 마음으로 하느냐? 를 더 중요하게 여겨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종교 개혁자 칼빈은‘믿음은 사랑으로 표현되고, 다른 사람을 향한 사랑은 참된 믿음의 증거이다’라고 말하였습니다.
 예화: 성 벌 뱅크-늘 화초와 대화하는 것을 즐겼는데, 어느 날 선인장에게 ‘너는 정말 가시가 많고 억세구나 네가 살아온 세월이 얼마나 험했는지 알겠다. 누군가 너를 G해치려고 한다는 두려움으로 험한 세상을 살아오느라고 온몸에 가시를 세워게 된거야. 그러나 이제 염려마라 내가 옆에서 너를 사랑하고 지켜줄게 무장한 마음을 풀어 놓고 내 사랑을 느끼렴! 매일 매일 선인장과 대화를 나누었는데 몇 달이 지나 가시가 하나 둘 떨어지기 시작하였다. 결국 가시가 하나도 없는 새로운 선인장이 탄생을 한 것이다.
 사람은 더 말할 것 없습니다. 사람이 가장 행복할 때는 사랑을 받고 있을 때이고 사랑을 할 때인 것입니다. 사랑하면 가시 돋힌 사람이 사랑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2. 바울의 소원기도
 바울은 믿음과 모든 성도들을 향한 사랑이 잘 어우러진 에베소 교회 성도들을 위해 하나님께 기도할 때마다 감사 기도만 한 것이 아니라 더 좋은 믿음의 교회가 되게 해 달라고 세 가지 소원을 품고 간절히 기도하였습니다.

1) 지혜와 계시의 영을 주시기를 소원하는 기도
(엡 1:17)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여기서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라는 말은 하나님에 대한 명확한 지식과 인식을 뜻하는 말입니다.
 세상에 어느 누구도 태어날 때부터 저절로 하나님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 이유는 타락한 아담의 자손은 허물과 죄로 그 영혼이 죽었기 때문에 스스로 하나님을 알 수 없는 영적인 시각 장애자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지으신 자연 만물을 보면서도 창조주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도리어 그 자연을 신으로 착각하는 것이 범신론이요, 자연신론에 빠지게 됩니다.
 하나님의 특별 계시인 성경을 아무리 읽고 들어도 예수가 그리스도임을 알지 못하고 도리어 기독교를 핍박하는 반 기독교인이 되는 것입니다.
 자연은 단순한 경치가 아니라 창조주 하나님을 알려 주는 계시이고, 성경은 단순히 책이 아니라 예수가 구세주이심을 알려 주는 계시입니다.
 그러므로 자연을 통해서 하나님을 알고, 성경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알려면 하나님 아버지께 지혜와 계시의 영인 성령을 받아야만 알 수 있습니다.
(고전 2:13, 14) 『우리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사람의 지혜가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오직 성령께서 가르치신 것으로 하니 영적인 일은 영적인 것으로 분별하느니라,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들을 받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것들이 그에게는 어리석게 보임이요, 또 그는 그것들을 알 수도 없나니 그러한 일은 영적으로 분별되기 때문이라』
 그렇기 때문에 바울은 에베소 교회 성도들이 지혜와 계시의 영을 받아 하나님을 더 깊이 알기를 소원하는 기도를 하였습니다.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만일 하나님을 좀 더 깊이 알기를 원한다면 ‘하나님 아버지 나에게 지혜와 계시의 영을 주셔서 성경을 읽고 들을 때 마다 진리가 깨달아지고 믿어지는 복을 받게 하옵소서! ’라는 기도를 드려야 합니다.

 2) 마음의 눈을 밝혀 주시기를 소원하는 기도
  (엡 1:18) 너희 마음의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이며
 하나님을 좀 더 잘 알려면 지혜와 계시의 영을 받아야 할 뿐 아니라 마음의 눈이 밝아져야만 하나님이 왜 나를 택하시고, 자녀가 되게 하셨으며, 나를 위해 예비해 놓으신 하늘의 소망을 깨닫게 될 수 있기 때문에 마음의 눈을 밝혀 주시기를 소원하는 기도를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엠마오로 내려가는 예수님의 두 제자이야기를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이 친히 나타나셔서 그들과 동행하며 성경 말씀을 풀어주시는데도 깨닫지 못한 이유가 바로 마음의 눈이 어두워졌기 때문입니다.
[눅 24:25-27] 이르시되 미련하고 선지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26]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 하시고 [27] 이에 모세와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성경을 읽거나, 설교를 들을 때 은혜가 되지 않는 원인이 바로 내 마음의 눈이 닫혀져 있기 때문입니다.
 마음의 눈이 밝아 질 때 천국이 믿어지고, 천국을 소망하게 되고, 충성하는 성도들을 위해 예비해 놓으신 영원한 기업과 영광이 보여 집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도 바울이 에베소 교회 성도들을 위해 소원의 기도를 드린 것처럼 마음의 눈을 밝혀 주시기를 하나님 아버지께 소원하는 기도를 드려야 합니다.

 3) 하나님의 능력을 알기를 소원하는 기도
(엡 1:19) 그의 힘의 위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여기서 ‘알게 하시기를’ 이라는 말은 이론적으로 배워서 아는 것이 아니라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몸으로 경험하여 아는 산지식을 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눈에 보이시지 않는다고 안 계시거나 다른 우상처럼 무능력한 존재가 아니라 천지와 만물을 단 엿새 만에 창조하신 능력의 하나님이십니다.
 홍해를 갈라 육지가 되게 하셔서 출애굽한 육십만을 한 사람도 낙오됨이 없이 무사히 건너게 하시고, 연약한 이스라엘을 통해서 강력한 가나안 족속들을 물리쳐 가나안을 정복하게 하신 능력의 하나님이심을 에베소 교회 성도들이 알기를 소원하는 기도를 드렸습니다.
 물론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믿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신화처럼 생각될 것입니다. 그러나 신화가 아니라 영원한 사실임은 신약에서 예수님의 부활을 통해서 하나님의 능력이 강력하게 나타났습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시기 전에 모든 인간들은 죽음의 칼을 휘두르는 사단의 세력 앞에 다 무릎을 꿇었었습니다.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가 로마 병정들의 채찍에 온 몸이 만신창이가 되고, 강도들과 함께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무덤에 장사되었을 때의 모습은 누구에게나 무능력하신 예수님을 비쳐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죽은 지 사흘이 되었을 때 성경에 약속하신대로 예수님은 죽음의 권세를 깨뜨리시고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전무후무한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엡 1:20-22] 그의 능력이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하사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고 하늘에서 자기의 오른편에 앉히사 [21] 모든 통치와 권세와 능력과 주권과 이 세상뿐 아니라 오는 세상에 일컫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시고
 여기서 ‘그의 능력’은 물론 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세상에서 인간이 경험한 가장 강력한 능력은 죽음의 권세요 그 배후에 사단의 세력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부활은 그와 죽음의 권세와 사단의 권세가 패배함으로 예수님은 가장 강력한 능력의 주님이심을 입증된 것입니다. 

 3. 교회의 머리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
 교회를 사람 중심으로 보게 되면 문제가 많은 집단처럼 오해하게 됩니다. 그러나 교회를 그리스도 중심으로 보게 되면 교회의 새로운 면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그것이 사도 바울이 오늘 성경 말씀을 통해 에베소 교회 성도들의 눈을 열어 보여준 교회관입니다.
 [엡 1: 22] 또 만물을 그의 발 아래에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삼으셨느니라
 사자가 아무리 용맹스러워도 죽은 사자는 두려워 할 것이 없습니다. 고목나무가 아무리 크다고 해도 죽은 나무에서는 싹이 나거나 자라지 않는 것처럼 생명이 없는 종교는 두려워 할 것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무능력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기독교는 어떤 종교입니까? 예수님이 교회의 머리 곧 주인이시오, 통치자시라는 말입니다. 뿐만 아니라 교회는 단순한 인간 조직체가 아니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신 예수님의 몸으로 생명을 가진 유기체라는 것입니다.
(고전 12:27)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골 1:18) 『그는 몸인 교회의 머리시라 그가 근본이시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신 이시니 이는 친히 만물의 으뜸이 되려 하심이요』
 그러므로 교회의 머리되신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주님의 몸된 교회와 지체된 성도들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아프리카의 우간다나 중동의 예멘이나 동남아의 미얀마와 같은 나라들은 독재자가 장기 집권을 하면서 백성들을 굶어 죽어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북구라파의 스위스나 스웨덴이나 노르웨이나 네델란드와 같은 나라는 땅 덩어리도 작고, 국민수도 적지만 세계에서 가장 잘 사는 나라들입니다.
 인류의 행복은 땅이 크고 자원이 많고, 인구가 많은 것만으로 이루어질 수 없고 얼마나 백성을 사랑하는 좋은 통치자가 나라를 잘 통치하는 여부에 좌우되어집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들이 궁극적인 목적지로 삼고 있는 천국은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하나님은 그 천국을 소망하며 살아가는 성도들을 위해 지상에 하나님 나라의 지점을 세우신 곳이 바로 교회입니다.
 [엡 1: 23]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이의 충만함이니라
 교회가 생명 없는 건물이 아니며, 인간들만 모인 종교 집단이 아니라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님의 몸으로 생명을 가진 유기체라는 것입니다. 또한 그러한 교회는 성도들의 영적인 필요를 충만히 채워주는 영적인 충전소요 발전소라는 것입니다.
 예화
 고속도로를 운전할 때 때로 자주 경험하는 일은 중간 중간에 휴게소가 있다는 것입니다. 혹시 자동차에 기름이 부족해도, 배가 고프고 졸음이 올 때 휴게소에 들어가면 모든 것을 공급받을 수 있습니다. 기분 좋게 나머지 여행을 마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휴게소의 공통점은 슈퍼나 백화점과 달리 인적이 드문 허허 벌판에 있다는 것입니다.
 천국의 지점인 교회를 하나님이 하늘나라가 아니라 삭막한 세상에 세우신 이유가 영적으로 공허한 세상을 충만케 하시기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이의 충만인 것입니다.
 만일 지상에 주님의 몸된 교회가 없다면 인생의 종말은 빈부귀천 신분고하를 막론하고 결국은 죽음 뿐입니다. 그러나 교회의 머리되신 예수님은 몸된 교회를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영적인 발전소와 주유소와 휴게소로 삼으시고 당신의 백성들의 모자라는 부분을 교회를 통해서 충만히 채워주신다는 것입니다.
 만물을 지으시고 그 만물이 잘 살아가도록 때를 따라 비를 내리심으로 만물이 소생하고 만물이 자라고 만물이 꽃을 피우고 만물이 열매를 맺게 하심으로 많은 생명체를 살게 하십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영적으로 황량한 세상에 주님의 몸된 교회를 세워 목마른 인생 굶주린 인생 병든 인생들을 부르시고 거듭나게 하시고 은혜를 부어 주시고 새사람이 되게 하시고 성령 충만하게 하시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시고 다른 사람에게 사랑을 나누고 축복을 나누는 통로가 되게 하시는 곳은 지상에서 유일하게 교회 뿐 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은 인간은 신불신을 막론하고 떡으로만 사는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말씀을 먹어야만 사는 신령한 존재입니다.
 그러나 세상에서는 육신을 위한 떡은 공급 받을 수 있어도 신령한 떡은 공급 받을 곳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육신적으로 아무리 좋은 것을 많이 먹어도 나이만 많이 먹을 뿐이지 결국은 죽음을 해결하지 못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몸인 교회는 생명을 가진 공동체로 사랑해야 하며 섬겨야 하며, 부흥하고 자라게 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예화
 옛날 아프리카에 살고 있던 원주민들은 다이몬드나 보석이 얼마나 가치가 있는 것인지를 몰랐으며, 중동에 살던 원주민들은 땅에서 솟구치는 원유가 얼마나 요긴한 것인줄을 몰랐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 가치를 알게 되었고 산유국이 되어 세계 경제를 좌지우지하게 되었습니다. 가치를 안다는 것과 모른다는 것의 차이가 하늘과 땅 차이인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믿는 기독교의 가치, 내가 다니는 교회의 가치를 잘 모를 때는 나 중심의 종교 생활에 머무르게 됩니다. 시간이 있으면 교회를 나오고 바쁘면 빠져도 전혀 마음에 부담이 없습니다.
 그러나 내가 다니는 교회가 얼마나 소중하며, 하나님의 능력, 예수님의 능력, 성령의 능력, 성경의 능력을 깨닫게 되면 주일마다 우리는 영적인 재충전을 받고 기쁘고 행복한 마음으로 천국을 향해 계속 나아갈 수 있게 됩니다.

 결   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를 창세전에 하나님의 자녀로 예정하시고, 그리스도의 보혈로 속죄해 주시고, 성령으로 인을 치시고, 우리를 충만하게 하시려고 몸된 교회로 인도하셨습니다.
 부족한 사람들이 모인 교회지만 서로가 기도하고 사랑을 실천할 때에 주님의 몸 된 교회는 바로 설 수 있습니다. 기도는 하지 않고 비난만 하는 것은 주님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는 악행임을 명심해야 하겠습니다.
 오늘날 교회에 문제가 많다고 지적하는 사람은 많지만 그러한 문제에 직접 뛰어들어 교회가 부족함이 없도록 섬기는 사람은 많지 못합니다. 서로를 이간질하고 모함하는 사람은 많아도 서로 화해케 하고 어려운 부분을 대신 감당하며 사랑을 실천하는 열정적인 사람은 드문 것이 현실입니다.
 오늘 우리도 에베소 교회를 위해 기도한 바울의 소원처럼 하나님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주시고, 마음의 문을 열어 주시고, 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을 깨닫고, 주님의 몸된 교회를 통해서 부족한 부분들이 충만해짐을 받는 성도들이 되기를 소원하고 구하여 응답받는 성도들이 모두 다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누구보다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주님의 몸된 교회를 사랑하고, 교회를 향한 사랑이 곧 주님을 사랑하는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바울이 그가 섬겼던 에베소 교회를 사랑하고 염려하였다는 것은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성경을 가르쳤을 뿐 아니라 그들을 위해 쉼없이 기도를 드린 것처럼 우리도 교회와 성도들을 위해 기도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이를 위해 우리도 바울에 에베소 교회의 영적 성숙을 간절히 소원하며 하나님께 기도한 것처럼 우리도 소원을 품고 하나님께 기도해야 할 것이 무엇이라고 하였습니까?
  1) 나에게도 지혜와 계시의 영을 주심으로 하나님을 더 깊이 알게 하옵소서.
  2) 나의 마음의 눈을 밝혀 왜 나를 부르셨고 나를 위해 예비하신 천국의 기업을 알게 하옵소서.
  3) 하나님의 능력, 예수님의 능력, 성령의 능력이 얼마나 위대한지를 알게 하심으로 담대한 믿음의 사람이 되게 하옵소서.
 하나님의 능력이 얼마나 위대한가를 알게 된다면 나를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해  주신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가를 알게 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더 늦기 전에 내가 하나님 앞에서 생명을 걸고 최선을 다해서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를 깨닫고 실천하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