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 상/하나님이 그들과 만났을때

사마리아 땅의 우상문화 막았다 [ 43. 스룹바벨 ]

미션(cmc) 2009. 8. 8. 13:38

[ 43. 스룹바벨 ]

스룹바벨은 BC 597년 바벨론 포로가 되었던 유다 왕 여호야긴의 손자이다. 스룹바벨의 생애와 관련하여 특별히 묵상해보아야 할 질문은 다음 세 가지이다. 첫째, 여호야긴 왕의 지차 셋 째 아들의 소생인 스룹바벨이 어떻게 정통성을 지닌 장자가 되었는가? 둘째, 유다 백성들의 신앙적 순수성을 어떻게 지켜내고 있는가?

여호야긴 왕은 부친 여호야김 왕이 죽자 십팔 세에 왕이 되어 불과 3개월간 통치하다가 BC 597년 바벨론으로 끌려갔다. 37년 후 석방된 여호야긴 왕은 다시 집안을 바벨론 땅에서 일으켜 세울 수가 있었는데, 그 슬하에 일곱 아들을 두었다. 그의 장자는 스알디엘이었으며, 셋째아들이 브다야였고 브다야의 아들이 스룹바벨이었다. 그런데 장자 스알디엘이 일찍 죽자 여호야긴 왕은 똑똑한 왕손인 스룹바벨을 택하여 스알디엘의 양자로 입적하고 그에게 가문을 물려주었다. 그리고 스룹바벨이 장성할 때까지는 생부인 브다야가 족장일을 대신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다윗 왕조는 바벨론에 의하여 망했지만 왕가의 대물림은 여호야긴 왕이 풀려난 이후 여호야긴 - 스알디엘 - 스룹바벨로 계속되었다.

   

 

스룹바벨은 유다 백성들로부터 존경을 받았을 뿐 아니라 페르샤 제국의 왕으로부터도 신임을 받았다. 그래서 BC 538년 백성들을 이끌고 예루살렘으로 귀환할 수 있었으며, 다리오1세(BC 521-486)로부터는 유다 총독으로 임명받기도 했다.

스룹바벨은 예루살렘 성전을 재건하는 과정에서 유다 백성들의 신앙적 순수성을 지키기 위해서 사마리아 인들의 요구를 배척했다. BC 586년 예루살렘이 완전히 멸망하여 황폐화되기 시작하자 사마리아 인들이 남하하여 이를 차지하였다. 그런데 갑자기 BC 538년 유대 인 포로들이 돌아와서 성전을 재건하고 예루살렘 성을 복구하려고 했다. 이를 무력으로 함부로 저지할 수는 없었다. 왜냐 하면, 사마리아 땅도 페르샤 제국에 속해 있었으며 황제가 임명한 총독이 다스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사마리아 인들은 유대 인들과 협상을 시작했다. 성전 짓는 일을 돕고 함께 살기를 원했다. 그렇지만 스룹바벨은 대제사장 예수아와의 협의를 거쳐서 이를 받아들이지 아니했다.

그 이유는 다음 두 가지로 볼 수 있다.

첫째, 사마리아 인들은 이미 이스라엘 자손으로서의 긍지와 혈통적 순수성을 잃어버리고 있었다. BC 722년 멸망당한 이후 200년 동안 이민족과 함께 다민족사회를 형성해서 살아오는 동안 그 곳 사마리아 땅에서는 이스라엘의 혈통도 유일신 하나님 종교도 모두 사라져버렸던 것이다.

둘째, 예루살렘 성전을 짓고 함께 살자고 하는 것은 하나님 신앙을 회복하겠다는 뜻이 아니라 단지 예루살렘 거주권을 잃지 않으려는 의도였으므로 이는 위험한 것이었다. 이렇게 되면 일찌기 여로보암이 도입한 금송아지 숭배사상은 물론 사마리아 땅의 온갖 우상 문화가 예루살렘에 그대로 잔류하게 될 것이었다. 이 점을 스룹바벨과 예수아는 정확하게 인식하고 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