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 상/하나님이 그들과 만났을때

회개운동으로 부흥을 이끌어낸 제사장 /에스라

미션(cmc) 2009. 9. 5. 18:38

하나님의 살아계심 믿는 신앙에 뛰어난 학식까지 겸비하여 이스라엘의 비전 제시

에스라는 대제사장 예수아와 마찬가지로 유다 왕국 마지막 대제사장인 스라야의 자손이다(왕하 25:18-21, 스 7:1). 그러나 예수아의 시대와, 제사장이며 서기관이었던 에스라의 시대(느 12:26, 또는 학사 겸 제사장, 스 7:11-12, 21)는 다르다. 80년 정도의 차이가 있다. 왜냐면 예수아는 스룹바벨과 함께 약 5만 명의 동족을 이끌고 고레스 왕 때인 BC 538년에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제1차 귀환자였지만 에스라는 80년 후 아닥사스다 왕 때인 BC 458년에 동족 약 2000명을 이끌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제2차 귀환자였다(스 7:7-10).


그리고 제1차 귀환 때는 바벨론 포로에서 갓 벗어난 감격시대였지만 제2차 귀환 때는 페르샤에서 자유민으로 이미 80년 세월을 지냈기에 그다지 환영받지 못한 시점이었다.
에스라는 대제사장 집안의 후손답게 모세의 율법에 정통했고 학식을 두루 갖춘 학자였다. 그래서 아닥사스다 왕은 그를 학사 또는 제사장으로 부르며 총애했다(스 7:12). 유다 백성들은 에스라를 제사장 겸 서기관으로 불렀다(느 12:26). 학자로서의 자질과 관리로서의 능력을 평소 높이 평가한 아닥사스다 왕은 그에게 무척 호의적이었다(스 7:6). 에스라가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동족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가르쳐주고 싶어 했을 때(스 7:6-10), 페르샤 왕은 ①이 소원을 들어 주었고 ②예루살렘 성전에 보내는 왕의 예물을 운반하는 권한과 ③자원하는 유대인 귀환자를 인솔하는 권한, ④현지 백성들을 다스리고 가르치는 모든 권한을 에스라에게 부여했다(스 7:11-26).


아닥사스다 왕이 그의 총신(寵臣)인 에스라에게 부여한 이런 포괄적 권한을 감안할 때 에스라는 BC 444년 새로운 유다 총독 느헤미야가 부임해 올 때까지 14년 동안 예루살렘에서 동족들을 다스리는 한편 율법과 학문을 가르친 실질적 지도자요 스승이었다.


에스라는 페르샤 군대의 힘보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보호하시는 힘을 더 의지했다. 그래서 4개월이 넘는 페르샤 수도에서 예루살렘 성까지의 긴 여행을 왕의 호위군사 도움 없이 하나님께 기도하며 무사히 마친 진기한 기록을 세웠다(스 8:15-34). 왕이 맡긴 많은 예물과 재물 그리고 귀환을 꺼리는 동족 가운데서 겨우 끌어모은 2000명도 안 되는 장정들을 이끌고 험하고 먼 길을 도적맞지 않고 여행한다는 것은 기적 같았다. 왕에게 호위군사를 요청하지 않은 자신의 소행을 후회도 하지만(스 8:22)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더욱 의지하는 초심을 버릴 수는 없었다. 하나님을 섬기던 레위 지파를 특별히 징집하여 열두 행렬을 마련했다. 출애굽 당시처럼 이스라엘 열두 지파의 행렬을 불기둥, 구름기둥으로 인도하시고 보호해 주시던 하나님을 기억한 에스라였다(스 8:24-25). 하나님도 에스라의 기도를 들어주셨다(스 8:31).


예루살렘에선 큰 문제가 기다리고 있었다. 80년 세월이 지나는 동안 가나안 땅에 흩어져 살던 귀환자 유대인들이 사마리아인과 가나안인들의 딸을 아내로 맞았고, 그들의 우상을 섬기고 있었다. 에스라는 통곡하며 성전에 들어가 백성들의 죄를 자복했고(스 9:3-10:1, 6), 금식하며 용서를 구했다(스 10:6). 에스라의 회개기도에 백성들이 동참했다. 마침내 3일 만에 가나안의 모든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에 모여 함께 회개했다(스 10:7-17). 이방 여인들을 돌려보내고 옛날 요시야 시대의 종교개혁을 다시 시행한 것이다. 그 상세한 기록이 에스라서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