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 상/하나님이 그들과 만났을때

예루살렘 공동체를 세운 느헤미야의 리더십 /47-느헤미야]

미션(cmc) 2009. 9. 30. 07:47

[하나님이 그들과 만났을 때 47-느헤미야] 

느헤미야는 에스라와 같은 시대를 살았다. 두 사람 모두 페르샤 아닥사스다 왕의 허락을 받고 예루살렘으로 돌아간 인물이었으나, 두 사람은 달랐다.


   
에스라는 명문 대제사장 가문의 자손이었으나 느헤미야는 평범한 유대인 하가랴의 아들이다(스 7:1-5, 느 1:1). 에스라는 모세의 율법에 정통하고 두루 학식을 갖춘 학자였으므로 아닥사스다 왕의 총애를 받았다(스 7:6, 12). 그러나 느헤미야는 수산 궁 관리인으로 출세하여 왕의 술을 책임지는 최측근 고위직 인물이었다(느 1:1, 11). 느헤미야는 청렴결백하며(느 5:14-19) 인내심이 강하고(느 6:1-19), 담대하며(느4:1-23) 설득력까지 갖춘(느 5:1-13) 인물이었다.

느헤미야를 발탁하는 데 있어 아닥사스다 왕의 부친 아하수에로 왕의 영향력을 빼놓을 수 없다. 그가 누구인가, 유대인 모르드개를 재상으로 중용했고, 에스더를 왕비로 삼았다(에 5:2, 8:1-2, 15-17). 유대인은 정직하고 성실하였으며, 지혜롭고 총명하였다. 이 때문에 다니엘 모르드개 느헤미야 에스라가 왕실의 총애를 받았으며, 이 때문에 아닥사스다 왕은 예루살렘의 성전에 대한 관심이 남달랐다(스 7:15-28, 느 2:2-10).


느헤미야는 친동생으로부터 에스라가 14년 전 예루살렘에 거하는 유대인들에게 하나님의 법을 가르치기 위해 귀환하였으나 곤경에 빠져 있다는 소문을 들었다(느 1:2-3). 이방인의 딸과 결혼하여 우상을 섬기게 된 잘못은 일찍이 에스라가 회개운동을 일으켜 근절시켰다(스 10:7-17). 그러나 10여 년 세월이 흐르는 사이에 대제사장 엘리아십(느 3:1, 예수아의 손자, 느 12:10-11) 과 그의 자손들 그리고 영적 지도자들이 먼저 타락함으로써 백성들은 다시 이방 민족의 눈치만 살피게 되고 예루살렘 성은 아직도 훼손된 채 방치되어 있다는 딱한 소식이었다(느 1:3). 에스라 혼자의 힘으로는 시정할 엄두도 못 내는 상황이었다.


이 소식을 듣고 느헤미야는 금식하며 기도했다(느 1:4). 아닥사스다 왕 20년(BC 445) 기슬로 월(11-12월, 느 1:1)부터 니산 월(이듬해 3-4월, 느 2:1)까지 느헤미야는 끈질기게 기도했는데 그 내용은 유다 총독이 되어 예루살렘 성을 재건하고 믿음의 공동체를 유대 땅에 완성하도록 하나님이 왕의 마음을 움직여 달라는 것이었다(느 1:9-11, 2:5-8). 느헤미야의 기도를 하나님이 들으셨다.


예루살렘 성벽을 BC 443년부터 중수하자 이웃 민족들의 반발이 거셌다. 특히 북쪽 사마리아의 실력자 호론 사람 산발랏과 암몬 사람 도비야(느 2:10, 4:1-3) 그리고 아라비아의 지도자 게셈(느 6:1)은 무력적인 위협과(느 4:11) 더불어 유대인들이 반역을 도모한다는 유언비어까지 만들어 페르샤 제국에 퍼뜨리고 있었다(느 2:19, 6:6-7). 느헤미야는 백성들에게 한 손으로는 병장기를, 다른 한 손으로는 건축을 계속하자고 호소했으며(느 4:13-23) 마침내 52일 만에 성벽이 완성되었다(느 6:15). 

 그런데 12년 동안 유대 총독을 지내고 느헤미야가 BC 433년 잠시 페르샤 수도로 돌아간 사이 대제사장 엘리아십 가문은 암몬의 지배자 도비야와 제휴하여 그 세력을 예루살렘으로 불러들이고(느 13:4-6) 사마리아의 지배자 산발랏과 사돈까지 맺었다. 백성들은 성전세를 떼먹었으며 생계가 막연해진 성전 봉사자들은 근무지를 이탈하였고 다시 암몬과 모압 여인들과 결혼하였다(느 13:23-24). 급히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느헤미야는 이런 잘못에 대해 강력하게 시정했다. 그리고 역사책 느헤미야서를 저술하면서 아예 민족 지도자 명단에서 대제사장 엘리아십과 그의 후손들의 이름을 빼버렸다. 그리고 그들의 죄상을 일일이 기록으로 남겼다. 그 결과 대제사장 예수아와 그의 아들 요아김만이 민족 지도자 명단에 에스라, 느헤미야와 함께 등재되어 있는 것이다(느 12:26).

 

손진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