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해받은 초대교회
예수님을 믿는다고 고백하는 그 순간부터 시작된다. 개종하는 것 자체가 핍박을 감수해야 된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탄생으로부터 시작하여 십자가 죽음과 초대교회 탄생은 핍박이 계속 이어져 내려왔다. 초대교회는 300년 동안 핍박을 받아야 되었다. 하지만 교회가 핍박을 받은 과정에서 교회는 로마제국을 정복하게 되었다. 순교의 피는 교회를 탄생시키는 귀중한 씨앗이 되었다. 교회의 핍박은 아주 고통스러웠다. 그러나 대단히 효과적(fruitful)이었다.
1. 기독교 박해 이전 시대
1) 티베리우스 황제(Tiberius : A.D 14-37) == 아우구스투스 황제이후 박해는 간헐적이고 부분적이었다. 티베리우스는 아우구스투스의 전권을 계승하여 황제가 되었다. 반유대주의자인 친위대장 세자누스에 의해 임명된 빌라도총독에 의해서 예수님이 처형되었다. 로마에서 유대인들이 추방되었고, 4,000명의 유대청년들과 싸우게 되었다.
2) 칼리굴라 황제(Gaius Caligura : A.D 37-41) == 정신적으로 불안한 사람이었다. 자신을 신이라 확신하면서 신에 합당한 예우를 하도록 하였다. 예루살렘 성전에 자기 신상을 세웠다. 살해되어 비참하게 죽었다.
3) 클라우디우스 황제(Claudius : A.D 41-54) == 유대인들에게 불리한 정책을 결정하여 로마에서 유대인을 추방하였다.(행18;2) 반유대주의 감정을 가지고 있었다. 여기서 기독교 박해가 시작되는 계기가 되었다.
2. 박해하는 원인
로마정부가 기독교를 핍박하게 된 원인은 무신론과 식인풍습, 근친상간이었다.
a) 무신론 == 로마인들은 눈에 보이는 신의 형상을 만들어 섬겼는데 기독교인들은 우상숭배를 거절하면서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니 눈에 보이지 않는 신을 신으로 인정할 수 없었다. 그래서 무신론자라고 낙인이 찍혔다. 기독교인이 믿는 신 때문에 로마인들이 믿는 신들이 진노하여 천재지변이 발생한다고 하였다.
b) 식인풍습 == 초대교회는 예배 때마다 성찬예식을 거행하게 되었는데 예수님의 몸과 피를 상징하는 떡과 포도주를 먹는 모습을 오해하여 인육을 먹고 마시는 것으로 인정하게 되었다. 기독교인들은 자식을 잡아먹는 불의한 자들이라고 하였다.
c) 근친상간 == 예수님을 주님으로 영접하고 고백한 성도들은 신분이나 계층이나 성을 초월하여 서로간의 호칭을 형제⋅자매라고 불렀기 때문에 근친상간하는 무리들로 오해받게 되었다. 기독교인들은 부도덕한 자들이라 하였다. 동굴에 남녀가 모여서 혼음한다고 하였다.
d) 근본적인 기독교 박해의 가장 큰 이유는 황제숭배를 거부했기 때문이다.
특히 도미티아누스 황제는 자신을 신이라 하면서 섬기도록 하였다.
로마인들과 기독교인들 사이에 사상이 일치되지 않았다. 로마인들은 국가 지상주의를 표방하는 반면, 기독교인들은 신본주의를 표방하였다. 로마제국은 영원하다고 주장하는가하면 기독교인들은 끝이 있다고 여겼다. 로마인들은 가장의 명령에 절대적인 복종을 요구하였지만, 기독교인들은 가장이 불신자이면 복종치 않는 경향이 있었다.
로마인들은 다신주의를 표방했지만 기독교는 다신교를 거절하고 유일신을 신앙하였다. 기독교인들의 집회를 비밀집회라 단정하고 비밀집회는 딴 국가를 건설하려는 음모라고 보았다. 그리고 기독교인들은 군대복무를 거절하였기 때문에 박해 받는 계기가 되었다.
3. 제1차 박해(A.D.64-96)
(1) 네로(Nero : A.D. 54-68) 황제의 박해
글라우디오 황제가 조카인 아그리파나와 결혼하였는데, 아그리파나는 자기의 아들 네로를 황위에 오르게 하기 위하여 글라우디오 황제를 독살시키고 친위대가 네로를 황제로 등극시켰고 원로원이 승인하였다. 16세에 황제가 된 네로는 처음에는 성공적으로 황제직을 수행하였지만 62년에 자신의 고문인 부루스, 65년에 세네카를 제거하면서 폭악한 폭군이 되었다. 62년에 아내인 옥타비아를 “하나님을 믿는 자”라는 이유 때문에 살해하고 유대교로 개종한 포파이아와 결혼한다. 유세비우스는 네로를 ‘극단적인 광기’라는 말로 표현하였는데 절친한 친구, 생모, 아내, 친족들을 살해하였다.
a) 원인
64년 7월18일 로마시에 대 화재가 발생하였다. 대부분이 목조건물이었던 로마시는 6일 동안 3분의 2 이상이 불에 타고 말았다. 14구 중 3구가 전부 불탔으며, 7구가 반 이상 타버렸다. 로마 시 전체의 반 이상이 불탔다. 이 때 네로는 트로이 함락 노래의 배경을 삼아 불타는 로마를 내려다보며 거문고를 탔다.
b) 죄명
평소에 불만이 황제에게 많았던 시민들은 네로 황제 자신이 화재의 책임자라고 말했다.
평소 황제에 대한 불만을 가지고 있던 시민들은 이 화재가 미친 네로의 짓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이일로 인하여 네로 황제는 화재사건에 연루되게 되었고 이 소문은 계속 확대되어 로마시 전체에 걷잡을 수 없이 퍼져 나갔다. 그는 자기를 지지하는 계급으로는 마지막 남은 한 비천한 계급 플렙스(Plebs)의 동정을 잃지 않기 위하여 이 방화의 책임을 기독교인들에게 덮어씌우게 되었다. 네로는 이때 로마 시민들의 민심을 안정시키고자 하는 목적으로 화재가 발생하게 된 모든 책임을 유대교에서 갈라진 기독교인들에게 돌리고 책임을 전가하기 위하여 네로는 기독교인들을 무차별 학살하였다.
c) 처형 방법
이 때부터 기독교인에 대한 대 학살 사건이 일어났다.
그 방법은 맹견과 사자의 밥이 되게도 했고, 십자가에 처형하기도 하였고, 화형을 시키기도 했다. 일부 기독교인들을 궁정에서 베푼 연회석을 밝히는 인간봉화로까지 섰다.
d) 순교자
많은 신자들이 학살당했지만, 특히 바울과 베드로가 순교 당하였다.
e) 네로의 최후
네로는 처음에는 세네카, 부루스가 고문이 되어 5년 간 선정을 했으나, 오래지 않아 악당의 손에 들어 국고를 탕진하고, 귀족들을 반란 혐의로 처형했다. 어머니를 죽이고, 아내 있는 남편 등을 처형하는 등 인륜을 무시하고 정사를 돌보지 않아 민심이 흉흉해 졌으며, 국민의 신망을 잃게 되었다. 68년 지방의 반란이 일어나고, 원로원이 네로를 국적으로 판정하고 때려죽이기로 결의했다. 69년에 그는 부하 넷을 데리고 시골로 도망쳐 지하실에 숨어 있다가 잡으러 온 군인들의 발굽소리를 듣고 온 국민의 저주 속에서 “세상이 나 같은 예술가를 잃는구나” 외치며 30세의 젊은 나이에 부하가 쥔 칼에 자기 목을 찔러 자결했다.
네로 황제의 죽음이후 1년간은 내란으로 인하여 많은 어려움들이 있었지만 내란이 종식된 후 베스파시아누스(Vespasian 69-79)가 잠시 황제가 되어 통치를 하였는데 베스파시아누스는 기독교인들에게는 많은 관용을 베풀려고 하였으나 유대인들의 곳곳에서 끊임없는 반란을 일으켰다.
베스파시아누스는 이를 진압하기 위하여 많은 노력을 하였지만 결국 진압하지 못하고 자신의 장남인 티투스(79-81)에게 예루살렘성을 점령하라는 명령을 내리었고, 티투스는 많은 병력을 이끌고 예루살렘에 내려가 성을 포위하여 장악하였다.
이렇게 되어 유대인들의 생활과 삶의 중심이 되었던 헤롯성전은 로마의 대 화제 사건에 연류되어 결국 AD 70년에 성이 함락된 뒤 끝내 무너지고 말았다. 그 후 티투스장군은 돌아가서 로마의 황제가 되었으나 2년을 넘기지 못하고 갑작스런 열병으로 죽었고 티투스가 죽은 뒤 그의 뒤를 이어 도미티안이 황제가 되었다.
(2) 도미티아누스(Domitian: A.D. 81-96) 황제의 박해
네로 → 베스파시안(A.D.69-79 : 경제적 안정, 중앙정부에 대한 자신감, 지방 정돈을 통한 질서 회복) → 티투스(A.D.79-81 : 2년 만에 열병으로 죽음) → 티투스의 도생 도미티안이 황제에 등극하였다.
a) 원인
도미티아누스이 전에는 죽은 황제를 신으로 섬기도록 하였으나 도미티아누스는 살아 있는 자신을 “주와 신(dominus et deus)"으로 숭배하도록 하였다. 수도(首都) 로마에 금은(金銀) 형상을 만들고 우상숭배를 강요하며 유대인들이 매년 예루살렘에 보내던 헌금들을 황제에게 바치도록 결정하였다. 유대인들이나 기독교도들이 이것을 거절하자 도미티안 황제는 별도의 법률을 만들어 대처하였다. 당시 로마 당국자들은 유대인과 그리스도인들을 잘 구별할 수 없었다. 당시 기독교인들은 유대교의 풍습들을 대부분 좇았기 때문에 로마 당국에서는 기독교인들을 유대교와 같은 종파로 간주하여 박해를 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이 황제를 예배하기를 거부한데서 문제가 생겨서 박해가 일어났다.
② 죄명
황제는 아내인 도미틸라(Domitilla)를 유배시키는 한편 조카인 플라비우스 클레멘스와 그의 두 아들을 무신론자와 유대인의 관습을 쫓는 자들이라는 이유로 살해한다.
기독교도 때문에 모든 신이 노했다는 죄명이 내려졌다.
③ 처형 방법
황제는 귀족들의 재산을 몰수하고, 맹수와의 결투시키기도 하고, 로마에서 추방시키기도 하였다. 요한은 외딴 섬으로 유배시켰는데 밧모 섬으로 유배시키기도 했다. 요한은 밧모섬에서 요한계시록을 기록하였다.
④ 카타콤
황제의 박해를 피하여 성도들은 지하 무덤에서 예배를 드리기 시작하였다. 신앙 파수의 무대가 되었다.
⑤ 도미티아누스의 최후
15년 동안 잔악하게 통치한 후에 네로 황제처럼 독재자가 된 결국은 자신의 궁전에서 비참하게 암살을 당하고 말았다.
예루살렘성이 함락된 뒤 유대인들이 외국에 나가든지 고국에 있던지 그들이 꼭 찾아보는 성지가 두 곳이 있는데 그 하나가 통곡의 벽이요 또 한곳이가 맛사다 성이다.
맛사다 성은 예루살렘의 멸망 시 성을 빠져 도망 나온 960명의 유대인들이 마지막까지 버티었던 예루살렘 남쪽 약100km 의 위치에 있는 천연적인 군사의 요새지이다. 이곳은 해발 600 m의 깎아지른 절벽으로 헤롯 대왕이 유사시를 대비하여 자신의 궁전까지 지어 놓았던 곳이기도 하다.
유대인들은 이곳에서 3년 동안이나 로마의 군대들과 대치하며 자신들을 지키었던 난공불락의 요새지였다. 그러나 로마의 10군단의 실바 장군에 의하여 무너지게 되었는데 마지막에는 “로마의 노예가 되기보다는 스스로 죽음을 택하자 로마인들의 손에 죽는 수치보다는 스스로 죽자” 이렇게 최후를 택한 유대인들은 자신의 아내와 아들들을 모두 죽이고 나중에는 남자들이 모여 10명씩 조를 짜서 제비뽑고 한사람이 9명을 죽이고 마지막 남은 자가 죽은 시체를 가지런히 뉘어 놓은 뒤 자신도 죽음으로서 택함 받았다는 의를 지켰던 믿음의 성지 라고 하여 해마다 유대인들은 맛사다를 찾는다.
4. 2차 박해 (A.D. 98-249)
(1) 트라얀(Trajanus : A.D.98-117) 황제의 박해
기독교인들은 세 종류로 분류시켰는데
㉠ 그리스도인 이라고 고백하고 그 고백을 계속 지키는 자.
㉡ 그리스도인이라는 혐의를 받았지만 그리스도인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자
㉢ 과거에는 그리스도인이었으나 지금은 배교했다고 주장하는 자
트라얀 황제는 황제숭배를 본격화하였는데 기독교인들이었다고 해도 예수그리스도를 버리고
황제를 숭배하면 박해하지 않고 석방시켰다. 황제숭배를 거절하는 기독교인들만 박해하였다. 기독교인들은 정치적 음모를 꾀 하는 비밀 결사대로 오인하여 하여 박해를 가했다. 트라이야누스 황제는 기독교를 로마 제국에서 이름도 사용할 수 없게 하고 112년에는 법조문을 만들어 조직적인 박해를 시작하였다. 기독교는 로마에 대하여 해로운 단체로 지목이 되어 인정받지 못하고 모임 자체도 가질 수 없게 되었다. 트라이야누스 황제 때 시므온이 120세에 십자가에 처형이 되고 안디옥의 이그나티우스 감독이 체포되어 로마로 이송된 후 원형경기장에서 맹수에게 찢겨 순교 당할 때 그의 나이는 70세였다.
안디옥 교회는 스데반의 신앙을 따르던 무리들이 세운 교회로 바나바가 초대 감독이었고 이그나티우스가 2대 감독이었는데 전설에 의하면 이그나티우스는 예수님 당시에 예수님의 품에 안기어 사랑을 받았던 어린아이가 바로 그였다고 한다. 또한 안디옥 교회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는 말이 생겨나게 될 정도로 믿음이 있는 교회였으며 안디옥은 기독교회의 동방에 수도요 항구라고 할 정도로 일설이 있는 교회이다.
안디옥 교회의 감독이었던 이그나티우스는 순교의 현장으로 끌려가면서 7개의 서신을 남겼는데 7개의 서신은 서머나에 있는 폴리갑에게, 에베소, 막네시아, 트라이야, 로마에 있는 교회와 빌라델피아 교회에게 보낸 것들인데 그 내용을 요약해 보면 다음과 같다.
1) 이단을 경계하라
2) 교회의 조직에 통일
3) 감독과 장로의 구분으로 감독의 우위
4) 순교는 영광이다. 라고 말하면서 그는 최초로 카톨릭이란 말을 사용한 사람이다.
(2) 하드리아누스(Hadrianus: A.D.117-138) 황제의 박해
하드리안은 티투스 장군의 아들로서 정신적 육체적인 열정이 남다르며 다재다능한 황제이다. 그는 군대와 함께 있을 때에는 병사와 함께 훈련을 받으며 똑같은 급식을 먹고 행군할 때에도 똑같이 행군을 하는 황제였다. 그리고 그는 뜨거운 종교열로 신비의 종교에 입문하였으며 아테네시에서는 새로운 구역을 추가하였을 뿐만 아니라 창의적이고 대범한 조각가이기도 하였다. 헬라의 유산을 보존하는데 남다른 정열을 갖고 있었다. 기독교인들이 특별한 죄를 범했을 때에만 벌을 받도록 하였다. 기독교인들이 비기독교인들의 근거 없는 모함에서 보호하려고도 하였다. 기독교인들은 합당한 법적 절차가 있는 법정에서 재판을 받도록 하였고, 분명한 증인과 증거들이 확보되도록 하였다.
그러다가 하드리안은 A.D 120-130년까지 10여 년 동안 셀 수 없는 많은 개혁을 통하여 산발적으로 기독교인들을 박해하였으며 125년에 발표한 칙령에서는 할례나 안식일에 회당에서 읽는 율법을 금지하고 예루살렘성전 터에 유피테르 신전을 세우고 우상제사를 강요하며 이를 거부할 경우 박해를 가했다. 그리고 기독교를 믿는 것은 국법을 어기는 죄가 된다고 보았다.
(3)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Marcus Aurelius: A.D.161-180) 황제의 박해
하드리아누스 → 안토니우스 피우스(Antonius Pius : A.D.138-161) →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A.D 161년 황제가 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그 시대 계몽사상의 지성인가운데 한사람이었다. 그리고 그는 다른 황제와 같이 허영에 들뜬 사람이 아니라 개인의 수양을 위하여 텐트 생활을 하며 국정을 수행하였으며 명상록을 저술하기도 하였다. 역사가 유세비우스는 이런 말을 남겼다. 그는 기독교에 대하여 “매우 우호적으로 생각하였다”라고 평가하였다.
아우렐리우스는 상당히 긍정적인 사람으로 처음에는 기독교에 대하여 우호적인 경향이었지만 점차 아첨자들의 영향을 받아서 기독교인들을 박해하게 되었는데 참혹하게 핍박하였다.
점차 이성주의인 스토아철학에 사로잡혀 미신을 믿는 점성가들에게 빠져 기독교를 미신으로 취급하게 되었으며 중요한 행사를 치를 때에는 반드시 희생 제사를 드렸는데 국가의 재해나 질병의 원인들이 기독교인들 때문이라고 하여 비밀정보원을 동원하여 기독교인들을 잡아 들였고 심한 고문을 가하여 자신들의 신앙을 포기하도록 만들었다.
기독교인들이 채찍에 맞아 온 몸이 찢어져 유혈이 낭자하고, 속살이 드러나고 창자까지 밖으로 터져 나왔다. 그런 후에 조개껍질이나 땅 위에 놓인 창끝에 눕혀 졌고, 온갖 종류의 고문을 받은 뒤에 사나운 짐승의 밥으로 던져졌다. 박해가 점점 심해지자 배교하는 이들도 있었지만 대부분의 성도들은 온갖 고문과 박해 속에서도 굳건하게 신앙을 지켰고 순교당하기도 했다. 리옹에서도 50여명의 순교자를 냈으며 포티너스(Potinus 178)감독도 그들과 함께 고문 끝에 순교를 당했다. 쌍투스라는 소년은 죽음 앞에서도 “나는 기독교인이다”라고 대답하며 죽어갔다. 이것을 지켜보던 많은 신자들도 용기를 얻어 신앙을 고백하며 순교자의 최후를 맞이하게 되었다. 폴리갑과 저스틴이 순교 당했다. 고울 지방에서 간헐적으로 심하게 핍박이 일어났다.
폴리감은 사도 요한의 제자로서 서머나 교회의 감독이었다. 폴리감은 2세기에 알려진 최고의 성자요 순교자이며 겸손하고 온유한 사람이었다. 폴리감은 죽음 앞에서 유명한 한 마디를 남겼다. 네가 만일 이 자리에서 그리스도를 저주한다면 너를 살려 주겠다고 제안을 한 총독 앞에서 이렇게 대답하였다 “내가 86년 동안 그를 섬겼으나 그분은 나를 한 번도 저버리신 일이 없다”
(4) 셉티미우스 세베루스(Septimius Severus ; A.D.205-211) 황제의 박해
아프리카 출신의 군인으로서 기독교에 대하여 무관심 하였던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황제는 유대교와 기독교를 함께 금지하였다. 알렉산드리아 교회는 세례교인들이 많은 박해를 받았으며 전도하여 얻은 그리스도인의 입교를 불허하는 금지령을 내려 기독교인이 되지 못하게 하였다. 이때 일어난 박해를 통하여 사도 시대의 정신을 속사도 시대로 계승하여 온 교부중의 제일인자였던 이레네우스(Ireraeus)가 순교를 당하였고 유명한 신학자 오리겐의 아버지 레오니마스가 죄인으로 몰려 참수형을 당하였다. 따라서 아프리카의 카르타고에서는 페루페투아(Perpep-tua)와 펠리키타스(Felicitas)여인의 순교는 매우 유명하다. 이 두 여인은 노예였는데 맹수들이 들끓는 원형경기장에서 손에 손을 잡고 기독교의 위대함을 온 천하에 증거하였다.
세베루스 황제 시대의 박해는 주로 이집트와 카르타고에서 발생하였다. 세베루스 황제가 교회를 박해할 때 모든 교회에서 믿음으로 자신들의 신앙을 지켜나갔다. 이교도가 기독교로 개종하는 것을 금지시켰다.
(5) 막시미누스(Maximinus:A.D. 235-288) 황제의 박해
막시미누스 황제는 군 출신 폭군으로 정치개혁을 통하여 신자들로 구성되었던 알렉산더 가문에 대한 증오심에 불타서 복음의 진리를 교사하는 인물이며 행위자들이라고 인식하고 교회의 지도자들을 죽이라고 명령하여 교회의 지도자들, 성직자들을 처형하고 즉위한지 3년이 되는 해에 모든 사람들은 어느 곳에서나 공개적으로 신전에 나와 희생 제사를 드릴 것을 촉구하였다. 그러나 이를 거부하는 기독교인들을 색출하여 지도자들을 유형과 투옥을 통하여 제거하였으며 막시미누스 황제의 임기 동안에는 사형을 당하는 순교보다는 감옥에 투옥시키는 방법을 썼다. 당시 로마 감독이었던 힙포리티스와 폰티아너스는 사르디니아 금광에 유배되어 노예로 죽음을 당하였다. 또한 이때 히플리투스와 우르술라가 순교를 당하였다.
제2차 박해시기에는 고발되는 경우에만 행해졌고, 지엽적이고 간헐적이고 산발적으로 진행되었다. 박해의 위협은 항상 있었지만 항상 박해를 받은 것은 아니다.
5. 제3차 박해(A.D.249-313)
A.D. 250년에 데시우스 황제가 등극하면서 “제국의 모든 거주민들은 신들에게 제물을 바쳐야 한다.”는 칙령을 발표하였고, 모든 사람들은 그 칙령에 의해서 황제를 숭배해야 했고, 숭배한 사람들에게는 증명서를 발급했다. 법에 순종하지 않는 사람들은 투옥을 당하거나 고문을 당하고 목숨을 잃기도 했다.
제3차 박해는 전국적으로 일어났는데 제3차 박해가 시작하게 된 이유는
㉠ 기독교의 급속한 성장
㉡ 제국의 경제 및 도덕의 쇠퇴
㉢ 로마제국 창립 1000주년의 임박
㉣ 교회는 국가 내에 또 다른 국가이며 따라서 로마제국의 위협적인 존재라는 로마지도자들의 견해
㉤ 로마의 쇠퇴가 로마 신들이 기독교의 성장을 싫어하기 때문에 내린 벌이라고 인식하였다.
(1) 데시우스(Decius: A.D. 240-251) 황제의 박해
안토닌 → 마크리누스 → 안토닌 2세 → 알렉산더 → 막시미누스 →고르디아누스 → 빌립 → 데시우스
필립황제를 증오했기 때문에 그 증오심을 교회의 박해로 바꿨다. 250년에 데시우스 황제는 지방 관료와 행정관들에게 정해진 날에 필요한 장소에서 제사를 총괄하도록 명령하였고, 제사를 드린 사람들에게는 제사 증명서인 리벨루스(a libellus)를 발급하였다. 황제 앞에서 기독교인들은 순응, 타협, 거부, 도피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는데 어떤 이들은 부패한 관료들에게 돈을 주어 증명서를 사기도 했다. 역사가 유세비우스에 따르면 기독교 때문에 로마 나라가 쇠퇴해 졌다고 보아서 혹독한 박해를 가하였다. 그는 날짜를 정하여 신전에 제사를 지낸 사람들에게는 증명서를 발급해주었는데, 만약 돈을 주고 증명서를 사지 못한다면 도망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데시우스가 황제가 된 지 2년 만에 고트족과의 전투에서 아들들과 함께 살해당하게 되었다.
로마 감독인 파비아누스, 코르넬리우스, 예루살렘의 감독 알렉산더, 안디옥의 감독 바빌라스가 순교 당했다. 키프리아누스(Cyprianus)는 도피하여 은둔생활을 하며 지냈다.
(2) 발레리아누스(Valerianus:253-260) 황제의 박해
데시우스 → 갈루스 → 발레리아누스
발레리아누스 황제는 처음 3-4년에는 기독교에 대하여 대단히 우호적이었는데 지나칠 정도로 공손하였다. 그의 집에는 경건한 사람들로 가득했고, 주님의 회중이기도 했다. 그러던 그가 257년경에 이집트의 마술사 마크리아누스가 황제에게 기독인들에 대한 박해와 살해를 권면하면서부터 박해가 시작되었다.
국가에 어려움이 오고 국난과 흉년이 계속되자 이를 기독교인들 때문에 신들이 분노를 하였다고 하여 기독교인들의 재산을 몰수하게 하였고, 그래도 계속 그리스도를 믿으면 목숨을 거두도록 하였다. 특히 A.D 258년 기독교에 대한 처벌을 성문화하는 칙령을 발표하고 아녀자들은 재산을 몰수당하고 추방당하고 기독교인들이 친족이 있을 때는 황제의 농장에서 강제노동을 하도록 하였다.
황제는 페르시아의 샤프르 1세와 전쟁을 하여 마침내 포로가 되었고 그는 비참하게 죽으면서 일시적으로 박해는 중단되었다.
스페인의 타라고나지방 감독 투루투어스와 부 감독들이 순교를 당하였다.
프리스쿠스, 마르쿠스, 알렉산더가 사나운 짐승들의 먹이가 되어 순교 당했다.
카르타고에서 키프리안도 순교 당했다.
(3) 디오클레티아누스 (Diocletianus : A.D. 284-305)황제의 박해
발레리아누스 → 갈리에누스 → 아우렐리안 → 프로부스 → 카루스(카리아누스 와 누메리아누스 와 함께 통치) → 디오클레티아누스
갈리에누스 황제 때에 기독교는 황금기를 맞이하면서 성장하였다. 예배의 자유가 주어졌고, 합법적인 종교가 되었다. 아름다운 교회들이 건축되었고, 영향력 있고 교육받은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인들이 되었고, 경제, 군사, 사회적인 조건이 놀랍게 발전하게 되었다.
디오클레시안 황제는 본래 비천한 노예출신으로 자수성가 하여 권력을 획득한 그는 군의 추대로 로마 황제에 오르게 되었다. 그는 20년 동안 뛰어난 행정력과 조직력으로 로마를 통치하였지만 기울어져가는 로마를 살리기 위하여 제국을 4개로 분할하고 군대를 강화 하고 경제를 개혁하고 기독교에 대하여는 우호적으로 관용정책을 베풀었다. 그의 부인 프리스카(Prisca)와 그의 딸 발레리아(Valeria)도 교인이었고, 왕궁의 많은 이들도 기독교인들이었다. 근 20년 동안 교회를 핍박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그의 사위인 갈레리우스가 황제를 선동하기도 하였고, 시벨레(Cybele)를 섬기는 이교도인 그의 모친이 교회를 핍박하도록 강권하여 박해가 시작되었다.
303년 2월23일에 아무런 경고도 없이 니코메니아에 들어가 성경을 불태우고 건물을 파괴하였다. 라비아누스가 팔레스틴의 총독으로 있을 때 갑자기 ‘도처에 있는 교회들을 부수고 성경을 불태우고 신자들이 지닌 직책을 박탈하고 기독교의 신앙을 고수하는 이들에게 자유권을 박탈하라. 모든 기독교인들은 이방신들에게 제물을 바치고 신들에게 제사하라’는 칙령이 내려졌다.
디오클레티아누스는 아내와 딸들까지 기독교인들이라는 이유 때문에 무참하게 살해하고 교회를 박해하였다.
궁내에 기독교인들을 제거하고 아폴로신전에 제사를 강요하였으며 이에 호의적이지 못한 기독교인들을 제국의 전역에서 말살하는 초치를 내렸다. 성경을 압수하고 교직자를 투옥시키고 교회를 파괴하였다. 그러나 305년 건강이 악화되어 자리에서 물러나고 그의 사위였던 동부의 황제 갈레리우스에게 계승하여 기독교인들을 더욱 혹독하게 박해를 하므로 그의 공포를 이기지 못한 그리스도인들은 신앙을 포기하거나 형벌을 피하기 위하여 그들과 타협을 하였다. 그러나 311년 그가 사망하기 직전 기독교인들에게 관용을 베푸는 칙령을 발표하기도 하였다. 그 이유는 기독교인들이 절대로 굴복하거나 굽히지 않는 지조에 감명을 받고 마지막엔 오히려 자기를 위하여 기도해 줄 것을 부탁을 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그는 오랫동안 로마의 박해로 인하여 순교를 당한 순교자들을 로마교외에 있는 카타쿰의 지하 묘소에 장사를 지내주기도 하였으며 결국 로마는 기독교인들의 신앙심을 꺾을 수는 없었다.
로마 황제의 10대 박해
로마 황제 |
이 유 |
방 법 |
발생 상태 | |
1 |
네로 (Nero:54-68) |
로마시 방화범으로 기독교인들을 지목 |
자신의 생일연에 촛불 대신에 ‘인간횃불’로서 화형으로 궁전에 불빛을 밝혔다. |
베드로, 바울이 순교 당함 |
2 |
도미티아누스 (Domitianus:81-96) |
국내에 따로 국가를 세운다고 지목하였다. 로마와 소아시아 지역에서 일시적이고도 산발적인 박해는 그리스도인들의 황제숭배 거부로 비롯되었다. |
재산 몰수, 살해 |
카타콤 생활이 시작됨 로마의 클레멘트 사도요한 (밧모 섬에 유배) |
3 |
트리야누스 (Trajanus:97-117) |
비밀결사, 사회생활부조화를 일으킨다고 함 |
황제상 앞에서 절하라 강요. 집회불허 점차 박해가 강화되었으며 그리스도인들은 황제숭배를 거부하는 비애국적인 집단으로 규정되었고 그리스도인들은 발견 즉시 처형되었다. |
이그나티우스 맹수에게 죽음을 당함 시므온 조시므스 루프스 |
4 |
하드리아누스 (Hadrianus:117-138) |
그리스도인을 증오함 |
즉시로 죄라함 국경일에 헌제케 함 황제 숭배는 계속되었으며 그리스도에 대한 증언을 하는 자는 처벌되었다. |
성묘에 여신단세우고 호교론자 등장 텔레스포루스 |
5 |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Marcus Aurelius: 161-180) |
질병 흉년으로 복음을 경시함 기독교를 사상적으로 배격한 스토아주의자인 황제는 그리스도인들을 자연재해의 장본인으로 규정하였다. |
고문, 리용교회, 베일교회에 심한 핍박 |
유스티누스, 케르마니쿠스 폴리갑 저스틴 포티누스 블란디나 |
6 |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Septimius Severus :205-211) |
폭악, 무도 |
기독교로의 개종을 금지시켰다. |
이레네우스, 오리게레오니다스 페르페투아 순교 |
7 |
막시미누스 (Maximinus:235-288) |
지진사고로 |
기독교 성직자를 처단하였고 그리스도인들이 황제가 암살한 전임황제를 지지하였다는 사실로 인해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였다. |
우르술라 히폴리투스 두 감독 금광에 노예로 감 |
8 |
데시우스 (Decius:240-251) |
기독교 때문에 신쇄해진다. |
재산몰수, 악형 최초로 제국전체에 박해의 손길을 펼친 그는 황제숭배의 향기로운 제물을 요구하였고 기독교의 완전한 파멸과 더불어 이교신앙으로 복귀하도록 명령을 내렸다. |
오리게네스 중형, 키프리아누스 도피 파비아누스 예루살렘의 알렉산더 |
9 |
발레리아누스 (Valerianus:253-260) |
병과 흉년은 신이 노한 까닭이다. |
재산몰수, 예배금지 그리스도인의 재산을 몰수하며 그들의 공민권(公民權)을 박탈하였다. |
키프리아누스 순교 오리겐 씨프리아 식스투스 2세 |
10 |
디오클레티아누스 (Diocletianus: 284-305) |
부제 갈렐리우스의 참소로 인하여 |
교회파괴, 처형 가장 혹독한 박해로서 교회는 파괴되었고 성서는 불태워졌으며 모든 그리스도인의 시민권은 박탈위기에 처했으며 로마 신들에 대한 숭배가 강요되었다. |
니고메디아 회당 파괴, 성 가다리우스 옥사 마우리티우스 알바누스 |
6. 콘스탄틴(Constantine : A.D.306-337)황제의 기독교 공인
콘스탄티누스 대제(大帝) 또는 콘스탄틴 1세라고도 불리는 황제이다.
306년에 그의 아버지 콘스탄티누스(Constantinus)가 죽고 그의 부하들이 콘스탄틴을 황제로 등극시켰다. 태양신을 섬기던 콘스탄틴은 정적인 막센티우스와 이탈리아의 밀비안 다리에서 역사적인 전투를 벌이게 되었는데 전투 하루 전 대낮에 붉은 태양이 이글거리는 하늘에서 승리의 십자가 표시를 보았고, 그 위에는 “이 표지로 정복하라”라는 말이 쓰여 있었다. 콘스탄틴은 만약 전투에서 이긴다면 태양신의 전사가 되겠다고 서약하고 대승을 거두게 된다.
313년에 밀라노칙령(the Eidct of Milan)을 공포하면서 공식적으로 교회에 종교의 자유를 선언하게 되면서 기독교 박해는 끝나게 된다.
“정복할 수 없는 태양(Sol Invictus),” “전쟁의 신(Mars Conservator)”이라는 주화를 발행하였다.
기독교인들에게 재산권을 부여하였고, 전에 빼앗긴 재산을 회복하도록 하였다.
교회의 사역자들의 경비를 보조하기 위하여 국고에서 보조케 하고 부족하면 더 청구하도록 하였다.
하나님을 진정으로 섬기고 예배하며 경배하는 것이 로마의 안녕과 직결된다고 하였다.
이교도 제사장들뿐만 아니라 기독교의 성직자들에게도 면세시켜 주었고,
주일을 공휴일로 제정하고 교회의 절기를 존중하도록 하였다.
감독의 권한을 확대하여 소송을 감독의 법정에서 다룰 수 있도록 하고 일반 관헌들은 감독의 판결에 따르도록 하였다.
유대인들이 기독교로 개종했을 때 돌로 쳐 죽이는 관습을 금지시키고 교회의 건축을 장려하게 되었다.
7. 박해의 결과
“순교는 교회의 씨앗이다”라고 말한 터틀리안의 말이 사실임을 입증하게 되었고, 기독교 종식을 위한 박해가 도리어 기독교를 확대하게 되었다. 박해로 인하여 기독교 신앙의 순수성을 지킬 수 있었고, 복음을 더욱 더 확대케 하는 기틀이 되었다. 온갖 고초와 순교의 장면은 기독교 신앙의 진실성을 증거하게 되었다.
초대교회는 온갖 박해를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구주임을 확신하게 되었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더 확신하게 되었다. 신약 성경(Canon)형성을 촉진하게 되었다. 진리를 전 세계에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사도들, 속사도들, 교부들의 순교로 기독교가 생명의 종교임을 입증하게 되었으며 교회와 국가의 구별을 명확히 하게 되었다.
<<핍박을 피하여 생활하던 카타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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