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나온 길과 가야할 길
(신 1:30-33)
(신 1:30) “너희보다 먼저 가시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애굽에서 너희를 위하여 너희 목전에서 모든 일을 행하신 것 같이 이제도 너희를 위하여 싸우실 것이며” (신 1:31) “광야에서도 너희가 당하였거니와 사람이 자기의 아들을 안는 것 같이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가 걸어온 길에서 너희를 안으사 이 곳까지 이르게 하셨느니라 하나” (신 1:32) “이 일에 너희가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믿지 아니하였도다” (신 1:33) “그는 너희보다 먼저 그 길을 가시며 장막 칠 곳을 찾으시고 밤에는 불로, 낮에는 구름으로 너희가 갈 길을 지시하신 자이시니라”
사람마다 세상을 살아가는 모습이 제 각기 다릅니다. 그러나 인생살이는 어느 누구를 막론하고 인생여정(人生旅程)이라는 말처럼 마치 단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는 미지의 세계를 향해 나아가는 여정이라고 해도 크게 틀리지 않을 것입니다.
그 같은 길을 갈 때 1) 어떤 사람은 열심히 지도책을 보거나, 아니면 지나가는 사람에게 물어가면서 목적지를 찾아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2) 어떤 사람은 그 길을 잘 아는 사람과 더불어 동행을 하면서 여유롭게 목적지를 찾아 가는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물론 언젠가는 두 사람이 다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겠지만 한 사람은 목적지에 도착하기 전까지 한 순간도 마음에 평안이 없는 피곤한 여정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동행자의 안내를 따른 사람에게는 낯선 길이었을지라도 경치를 구경하며 설명을 들으며 여유 있고 즐거운 여행이었을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 여정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느 누구를 막론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동일하게 구원을 받았지만 자기의 의지로 신앙생활을 한 사람과 주님과 동행함으로 신앙생활을 한 사람과 느낌은 동일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52주 한해를 마감하면서 우리는 누구와 동행을 하면서 지난날을 살아왔으며, 또한 남은 날들을 누구와 동행하면서 가야하는지 오늘 성경 말씀을 통해서 깨닫기를 축원합니다.
1.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나 온 길
오늘 우리가 흘러가는 역사 속에서 2009년 한 해의 끝자락에 서 있는 것처럼 오늘 성경 말씀은 지금으로부터 3400여 년 전에 실제 역사 속에 있었던 사건입니다.
가고 오는 역사 속에 수많은 나라들이 있지만 그 가운데 이스라엘 백성들만큼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을 많이 받은 민족이 없을 것입니다.
그들은 역사 속에 존재할 때부터 본래 나이 늙도록 자식을 낳지 못했던 아브람에게 하나님께 특별한 은총이 아니었다면 존재할 수 없었던 민족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대제국 애굽에서 430년간 노예 생활을 하던 약소민족으로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가 아니었다면 자유와 해방을 얻을 수 없었던 민족이었습니다.
그것만이 아닙니다. 홍해를 육지처럼 건너는 기적과, 낮에는 구름기둥과 밤에는 불기둥으로 인도하심과 보호하심과, 광야에서 농사와 길쌈을 하지 않고서도 자그만 치 40년 동안 하늘에서 내린 만나와 암반에서 나오는 생수와 우박처럼 떨어진 메추라기 고기를 배부르게 먹고, 전쟁의 경험이 없으면서도 중도에서 길을 막는 대적들을 물리치며 요단강가에 이르게 된 것은 그들과 동행하신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였습니다.
그와 같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을 한지 2년 2월 20일에 시내 산을 떠나 약속의 땅 가나안을 향해 나아가는 중에 두 달에 후에 가나안의 최남단 변경 지대인 가데스 바네아에서 도착하게 되었습니다.
(민 34:4) “돌아서 아그랍빔 언덕 남쪽에 이르고 신을 지나 가데스바네아 남쪽에 이르고 또 하살아달을 지나 아스몬에 이르고”
이제 요단강을 건너기만 하면 하나님께서 그들을 인도하시고자 하는 최종 목적지인 가나안 땅입니다. 가나안 땅은 본래 여호와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그의 자손들에게 영원한 기업이 되게 하겠다고 약속하신 보기에 아름답고 광대하며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마침내 그 땅에 이르게 하시겠다고 굳게 약속하셨습니다.
(출 3:8) “내가 내려가서 그들을 애굽인의 손에서 건져내고 그들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아름답고 광대한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곧 가나안 족속, 헷 족속, 아모리 족속, 브리스 족속, 히위 족속, 여부스 족속의 지방에 데려가려 하노라”
물론 이스라엘 백성들은 출애굽 이후 지난 40년 동안 갖가지 기적을 통해서 전능하신 하나님이 그들과 동행하시는 증거를 입으로, 눈으로, 귀로, 온 몸으로 산 체험을 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약속하신 가나안 땅에 대한 소망을 굳건하게 하기 위해 열두 지파에서 한 사람씩 대표로 뽑은 열두 정탐꾼을 40일 동안 가나안 땅을 정탐하게 하고 그 땅에서 나는 농산물을 증거품으로 가져오게 하셨습니다.
(민 13:20) “토지가 비옥한지 메마른지 나무가 있는지 없는지를 탐지하라 담대하라 또 그 땅의 실과를 가져오라 하니 그 때는 포도가 처음 익을 즈음이었더라”
열두 정탐꾼은 함께 동일하게 가나안 땅을 정탐하고 증거물로 그 땅에서 생산된 포도송이가 달린 가지를 베어 막대기에 꿰어 어깨에 메고 또 석류와 무화과 열매를 따서 가지고 와서 백성들에게 정탐 결과를 보고 하였습니다.
(민 13:23) “또 에스골 골짜기에 이르러 거기서 포도송이가 달린 가지를 베어 둘이 막대기에 꿰어 메고 또 석류와 무화과를 따니라”
그러나 문제는 그 열두 정탐꾼들이 동일한 기간 동안에, 동일한 장소를 정탐하고 돌아와서 보고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두 패로 나뉘어 상반된 보고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중에 열명은 매우 비관적이고 부정적으로 보고를 함으로 인해 온 백성들을 절망의 골짜기로 몰아넣었는가 하면 여호수아와 갈렙 두 사람은 긍정적인 보고를 하여 백성들에게 믿음을 갖게 하려고 하였으나, 백성들은 가나안의 농산물을 눈으로 보고 입으로 맛보면서도 믿으려고 하지 않고 불신에 가득차서 원성이 자자하였습니다.
(민 14:1) “온 회중이 소리를 높여 부르짖으며 백성이 밤새도록 통곡하였더라”
심지어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가나안에 대한 소망을 잃어버린 이스라엘 온 백성들은 마치 이성을 잃은 사람들처럼 모세를 향해 돌을 들 정도였다면 그 같은 모습을 지켜보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심정은 어떠하셨을까요?
(민 14:10) “온 회중이 그들을 돌로 치려 하는데 그 때에 여호와의 영광이 회막에서 이스라엘 모든 자손에게 나타나시니라”
그 결과 출애굽과 광야 사십년의 여정은 한 순간에 수포로 돌아가 버리고 말았으니 그렇게 원망 불평한 사람은 한 사람도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광야에서 다 죽임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마치 ‘다 된 밥에 재 뿌린다’는 속담처럼 되어 버린 것입니다.
(민 14:36) “모세의 보냄을 받고 땅을 정탐하고 돌아와서 그 땅을 악평하여 온 회중이 모세를 원망하게 한 사람” (민 14:37) “곧 그 땅에 대하여 악평한 자들은 여호와 앞에서 재앙으로 죽었고”
오늘 성경 말씀은 그들이 광야에서 낳은 새로운 세대들에게 모세가 죽음을 목전에 뒤고 38년전 가데스바네아의 사건을 떠올리면서 그 자손들은 그 부모들처럼 가나안 땅 사람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하나님의 약속을 굳게 믿고 흔들리지 말아야 할 것을 당부하는 고별 설교입니다.
(신 1:1) “이는 모세가 요단 저쪽 숩 맞은편의 아라바 광야 곧 바란과 도벨과 라반과 하세롯과 디사합 사이에서 이스라엘 무리에게 선포한 말씀이니라”
오늘 성경은 지난 날 이스라엘의 역사이지만 하나님이 성경에 그같은 역사를 기록하게 하신 것은 그 이스라엘의 모습을 통해서 잘못된 우리의 모습을 발견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사람이 살다가 보면 인간관계를 통해서 나름대로 상처를 받게 되는데 무엇보다 가장 큰 상처는 배신(背信)것입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자그마 한 고난에 가려 지금까지 하나님이 내게 주시는 큰 은혜를 망각하고 하나님께 원망 불평하는 것은 곧 불신앙이요 불신앙은 영적인 배신행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지난 51주를 돌이켜 보면서 겉으로는 교회를 다니고 있지만 크고 작은 어려움을 경험하게 될 때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헤아리고 하나님께 도우심을 구하기보다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감사를 잃어버리고 원망 불평하면서 살아오지 않았는지를 돌이켜 보아야 하겠습니다. 그것이 바로 영적인 배신행위로 비참한 결과를 자초하는 것입니다.
2. 이스라엘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
여호와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서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될 새내기들에게 지난 38년 전의 과거를 회상하면서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얼마 사랑하셨는지, 어떻게 사랑하셨는지를 회상하게 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생색을 내시기 위함이 아니라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깨달아 가나안 입성을 앞두고 그들의 부모들이 가나안 사람들을 두려워 하며 하나님을 원망하며 배신했던 전철을 밟지 않게 하기 위함입니다.
1) 먼저 가시는 여호와 하나님
(신 1:30) “너희보다 먼저 가시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애굽에서 너희를 위하여 너희 목전에서 모든 일을 행하신 것 같이 이제도 너희를 위하여 싸우실 것이며”
하나님이 비록 눈에 보이시지 않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금까지 지나 온 여정을 돌이켜 보게 되면 어떤 고난을 경험하였든지 알고 보면 그 길에는 항상 여호와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보다 앞장서서 인도하셨다는 말씀입니다.
(출 13:21) “여호와께서 그들 앞에서 가시며 낮에는 구름 기둥으로 그들의 길을 인도하시고 밤에는 불 기둥을 그들에게 비추사 낮이나 밤이나 진행하게 하시니”(출 13:22) “낮에는 구름 기둥, 밤에는 불 기둥이 백성 앞에서 떠나지 아니하니라”
그것만이 아닙니다. 출애굽을 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첫 번째 만난 장애물은 파도가 넘실거리는 홍해였습니다.
더구나 뒤에는 애굽의 바로 왕이 최정예부대를 이끌고 이스라엘을 뒤쫓아오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마치 독안 든 쥐와 같은 처지에서 그 자리에 가만히 머물러 서있을 수도, 후퇴를 할 수도, 앞으로 나아갈 수도 없는 사면초가의 형국이었습니다.
그와 같은 위기에 이르게 되자 이스라엘 백성들은 일제히 모세를 향해 원망과 불평을 떨어 놓기 시작하였습니다.
(출 14:11) “그들이 또 모세에게 이르되 애굽에 매장지가 없어서 당신이 우리를 이끌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느냐 어찌하여 당신이 우리를 애굽에서 이끌어 내어 우리에게 이같이 하느냐”
그러나 알고 보면 그같은 원망은 모세에 대한 것이 아니라 출애굽하게 하시고 구름과 불기둥으로 지금 인도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불신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들을 죽이지 않으시고 모세로 하여금 지팡이를 든 손을 바다 위로 내밀어 그것을 갈라지게 하신 후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무사히 건너게 하시고 애굽 군대는 홍해에 다 빠져 죽게 하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 성경 말씀처럼 먼저 가시며, 앞서 싸워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인 것입니다.
(신 1:30) “너희보다 먼저 가시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애굽에서 너희를 위하여 너희 목전에서 모든 일을 행하신 것 같이 이제도 너희를 위하여 싸우실 것이며”
여기서 ‘이제도’라는 말은 가나안 땅에 들어갈 새내기들에게 과거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먼저 가시고 싸워주셨던 것처럼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길에서도 동일하게 앞서 가시고 싸워 주실 것을 믿으라는 말씀입니다.
사람들이 기르는 가축 가운데 소나 말은 주인이 등 뒤에서 채찍질을 해서 앞으로 달려가게 하지만 양떼는 주인이 앞장서서 인도해야만 제대로 길을 가는 동물입니다. 만일 그렇게 하지 않으면 길을 잃고 골짜기에 빠지거나 숨어 기다리던 맹수의 밥이 되고 맙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보면 의인법으로 우리를 양으로 비유하여 말씀하신 곳이 많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를 등 뒤에서 채찍으로 가게 하신 것이 아니라 선한 목자가 되셔서 앞서 인도하시되 때로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갈 때도 있지만 그렇게 하시는 까닭은 그곳을 통과하게 되면 푸른 초장과, 쉴만한 물가가 있음을 아시고 주님이 먼저 앞장서서 그 길로 인도하심을 믿어야 합니다.
우리의 지나온 길을 돌이켜 보면 분명히 앞서 가신 주님을 만나게 되고, 우리의 가야할 길을 내어다 보면 이미 주님이 앞서 가고 계심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할 일은 주님이 어디로 인도하시든지 내 생각으로 속단하지 말고 믿음으로 주님을 따라가기만 하면 우리가 가야 할 길 너머에는 예비해 놓으신 푸른 초장과 쉴만한 물가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시 23:1)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습니다.”(시 23:2)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서 쉬게 하십니다. 여호와는 나를 잔잔한 물가로 이끌어 쉬게 하시며”(시 23:3) “나에게 새 힘을 주십니다. 자신의 이름을 위하여, 주님은 나를 의로운 길로 인도하십니다.”(시 23:4) “내가 음산한 죽음의 골짜기를 지나가게 된다 하더라도, 나는 겁나지 않습니다. 그것은 주님께서 나와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막대기와 지팡이가 나를 든든하게 보호해 줍니다.”(시 23:5) “주님께서 원수들이 보는 앞에서 내게 식탁을 차려 주십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내 머리 위에 향기로운 기름을 바르시며 내 잔이 넘치도록 가득 채워 주십니다.”(시 23:6) “여호와의 선하심과 사랑하심이 내가 죽는 날까지 나와 함께하실 것이 틀림없습니다. 이제 나는 여호와의 집에서 영원히 살 것입니다.”
2) 안아주시는 하나님
하나님은 연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자유와 해방을 얻었을 뿐 아니라, 홍해를 건너고 광야를 무사히 통과할 수 있었던 비결은 하나님 아버지가 안아 건너가게 하셨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신 1:31) “광야에서도 너희가 당하였거니와 사람이 자기의 아들을 안는 것 같이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가 걸어온 길에서 너희를 안으사 이 곳까지 이르게 하셨느니라
여기서 ‘안는다’는 말씀은 어린아이를 키울 때 아이가 걸어가기 힘든 언덕이나., 건너갈 수 없는 개울을 만나게 되면 엄마 아빠가 곁에서 함께 가는데도 믿지 못하고 겁을 내면서 걱정하는 아이를, 엄마 아빠는 어린아이 번쩍 들어 올려 품에 안고 가거나 아니면 무등을 태워 건너게 하는 것처럼 ‘들어 올리다, 나르다, 가지고 가다’라는 뜻입니다.
만일 지난 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그렇게 안아주시지 않았다면 어떻게 애굽에서 해방을 하고 홍해를 건너고 물 없는 광야를 무사히 지날 수가 있었을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지나 온 길에 안아주신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잊어버리게 될 때 앞으로 가야할 가나안 여정은 더욱 두려운 일이 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데스바네아에서 하나님을 원망하고 불평하다가 멸망을 당하게 된 것은 외적인 환경이 아니라 앞서 가시고 안아 건너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망각한 내적인 불신앙의 결과였습니다.
(신 1:32) “이 일에 너희가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믿지 아니하였도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광야에서 번쩍 들어 올려 품에 안으시고 무사히 건너게 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 하나님은 변덕스런 우리들과 달리 변함도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신 하나님이십니다.
(약 1:17) “온갖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부터 내려오나니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 하나님은 변함없이 피값으로 사시고 자녀로 삼으신 우리를 사랑하시되 지금까지 지나온 길만이 아니라, 앞으로 우리가 가 가야할 남은 미래만이 아니라, 영원토록 어떤 고난과 위기 가운데 버려두시지 않으시고 나보다 앞서가시며, 두 팔을 펴시고, 십자가에 못 박히신 흔적이 남아있는 손으로 나를 번쩍 들어 올려 안으시고 통과하게 하실 것을 믿게 하시려고 오늘 성경 말씀을 주신 것입니다.
(약 1:17) “온갖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부터 내려오나니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
우리가 평소에 들어서 익히 잘 알고 있는 일본의 사형수였던 니카타의 ‘모래위의 두 발자국’이라는 시 한 편을 소개하겠습니다.
어느날 밤, / 꿈을 꾸었네./ 주와 함께 바닷가를 거니는 꿈을 꾸었네/ 하늘을 가로질러 빛이 임한 그 바닷가 모래 위에서/ 두 짝의 발자국을 보았네./ 한 짝은 내 것, 또 한 짝은 주님의 것/ 거기서 내 인생의 장면들을 보았네/ 마지막 내 발자국이 멈춘 곳에서../내 삶의 길을 돌이켜 보았을 때/내 삶의 길에 오직 한 짝의 발자국만 있는것을 보았네./ 그때는 내 인생이 가장 비참하고 슬픈 계절이었네./ 나는 의아해서 주님께 물었네/
" 주님, 제가 당신을 따르기로 했을때
주님은 저와 항상 함께 있겠다고 약속하셨지요/그러나 / 제가 주님을 가장 필요로 했을 때/ 그때 거기에는 한 짝의 발자국 밖에는 없었습니다/주님은 저를 떠나 계셨지요..?/주님이 대답하시었네/ 나의 귀하고 소중한 아들아/ 나는 너를 사랑했고 너를 결코 떠나지 않았단다/네 시련의 때, 고통의 때에도.../네가 본 한 짝의 발자국..../그것은 내 발자국이니라../ 그때, 내가 너를 등에 업고 걸었노라 "
3) 미래에 소망을 주시는 하나님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렇게 많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으면서도 원망 불평하기때문에 하나님이 얼마든지 그들을 버리실 수 있으셨으나 버리지 않으시고 도리어 앞서 가시고 안으셔서 가나안 땅 요단강 앞에 내려놓으신 것입니다.
큰 집을 짓는 광경을 보게 되면 어떤 사람은 길을 닦고, 어떤 사람은 수도관을 묻고, 어떤 사람을 토목공사를 하고, 어떤 사람은 그 위에 기초를 놓고, 어떤 사람은 그 위에 집을 짓습니다. 왜냐하면 한 사람이 그 모두를 다 할 수 없기 때문에 하청업자들이 나누어서 공사를 하게 됩니다.
이스라엘 민족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은 그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새내기들이 들어가야만 하는 가나안 땅이라는 미래에 대해서 확실하게 보장 하셨습니다
(신 1:38) “네 앞에 서 있는 눈의 아들 여호수아는 그리로 들어갈 것이니 너는 그를 담대하게 하라 그가 이스라엘에게 그 땅을 기업으로 차지하게 하리라”
여기서 ‘들어갈 것이니’ ‘차지하게 하리라’는 말씀을 주목하십시오. 그러나 그 주인공이 모세가 아니라 여호수아라는 것입니다. 모세가 얼마나 섭섭했을까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죄로 인해 그동안 그렇게도 많은 고생을 한 모세는 가나안 땅을 멀리 내어다 보면서도 그 땅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과연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인간은 하나님처럼 영원무궁한 존재가 아니라 그 능력에 있어서나, 그 수명에 있어서 유한한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모세와 같이 위대한 사람일지라도 이스라엘의 구원의 역사를 모두 다 이룰 수는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모세에게 허락하신 사명은 출애굽에서 요단강까지 이며,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미래의 사명은 모세의 시종 여호수아가 이어가게 하시겠다는 미래의 소망을 모세의 입을 통해서 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자기가 그렇게 수고를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없게 되었으나 조금도 섭섭해 하거나, 슬퍼하거나, 낙담하지 않았습니다.
1) 자기는 못 들어갈지라도 여호수아와 더불어 새내기들이 들어가게 하시겠다고 하나님이 보장하여 주셨기 때문입니다. 자식을 사랑하는 부모는 자신보다 자식들이 더 잘되는 것을 좋아하는 것입니다.
2) 자신의 주제는 하나님의 종으로 주인이 시키는 대로 하는 것뿐 이기 때문에 주인되신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이의를 제기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3) 자신이 비록 지상의 가나안 땅에는 못 들어갈지라도 하나님께서 자기를 위해 하늘의 가나안 땅은 활짝 문을 열고 기다리심을 믿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현실은 어제나 오늘이나 크게 달라진 것이 없습니다. 또한 내일이 오면 새해가 오면 더 형편이 좋아지고 건강해 질 것이라는 희망이 보이질 않습니다.
그럴 때 우리도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하나님을 원망하고 불평하는 불신앙의 죄에 범하기 쉽습니다.
그럴 때 우리도 지금까지 지나 온 길을 돌이켜 보면서 수많은 고난과 위기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결과적으로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시고 전화위복케 하시고 인생 역전케 하셨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우리의 현실이 비록 어렵고 힘들지라도 우리의 미래까지 절망적인 상태로 버려두시지 않으실 것입니다.
오늘까지 살아올 수 있었던 것은 나의 의지가 아니라, 안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였음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은 믿음과 사랑만이 아니라 내일에 대한 소망, 미래의 소망, 영원한 소망을 항상 품고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히 6:18) “이는 하나님이 거짓말을 하실 수 없는 이 두 가지 변하지 못할 사실로 말미암아 앞에 있는 소망을 얻으려고 피난처를 찾은 우리에게 큰 안위를 받게 하려 하심이라”
결 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지나 온 한 해를 이스라엘 백성들을 통해서 비처보아야 하겠습니다. 어느 해보다 경제적으로 힘들고 어려웠던 한 해를 무사히 보낼 수 있었든 것은 앞서 가시고, 안아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또한 2010년에는 한국 경제가 5% 정도 성장할 것이라고 긍정적인 전망은 소망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가 가야 할 새해를 어떤 믿음의 자세로 준비해야 할까요?
하나님이 주신 은혜에 대해서 배은망덕한 삶을 살지는 않았는지 돌이켜 보고 회개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새해에는 하나님께 더욱 더 영광 돌리고, 주신 은혜에 감사하며, 맡기신 사명에 핑계나 게으름 부리지 말고 충성하기로 굳게 다짐해야겠습니다.
우리가 자고 깨면 만나는 수많은 사람들과의 관계는 다 똑같은 것이 아니라 어떤 사람은 사랑의 관계라면, 정반대로 어떤 사람과는 미움의 관계인 경우도 있습니다.
물론 사랑과 미움은 정반대 말이지만 출발은 동일한 사랑이었지만 다만 결과가 사랑은 변함이 없는 관계이고 미움은 변질된 관계라는 차이입니다.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은혜를 받게 되면 현재 자신의 처지가 어떠하든지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고 믿게 되면 어떤 환경에서도 감사하는 마음을 잃어버리지 않게 됩니다.
그러나 정반대로 하나님이 이미 내게 베풀어주신 온갖 은혜와 축복을 망각하고 현재 당면하고 있는 어려움에만 집중을 하게 되면 마치 쓰나미가 휩쓸고 지나가는 것처럼 마음속에 믿음과 소망을 한 방에 다 쓸어 가버리고 남게 되는 것이 영적인 쓰레기인 원망과 불평만 가득히 쌓이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믿음을 잃어버리지 않으면 시작은 미약하나 나중이 창대하게 되고, 불신앙에 빠지게 되면 시작은 창대하나 나중은 비참하게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오래 교회를 다녔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은혜를 받지 못한 사람은 자신의 형편과 처지가 어떠하든지 상관없이 매사에 불만이 가득하고 입만 열면 원망 불평이 쏟아져 나오게 됩니다.
물론 감사와 불평은 상반된 감정이지만 그것은 환경의 차이 때문에 달라지는 것이 아니라 믿음의 차이 때문에 달라지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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