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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시간에는 “우연히” 보아스의 밭에 들어간 룻에게, “마침” 그곳에 나타난 보아스를 만나도록 역사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살펴봤다. 한 가지 기억할 것은 룻이라는 그릇이다. 교회사를 통해 보면, 하나님의 주권적 요소에 대한 인간적 요소는 늘 어려운 문제였다. 물론 무게 중심은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에 있다. 하지만 인간적 요소 역시 그 무게가 결코 적지 않기에 두 요소의 균형을 잡는 것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어려운 문제이다. 하지만 이런 어려움 속에서도 한 가지 확실한 사실이 있다. 그것은 2가지 요소 모두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이다. 오늘 본문은 룻이라는 인간적 요소에 대해서 말씀하신다. 룻은 어떤 사람이었기에 하나님의 온전하신 은혜를 받을 수 있었을까?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다. 하지만 오늘 본문에서는 그 핵심적 요소 1가지를 말씀하신다. 10절과 13절에 보면 룻은 보아스에게 은혜를 입자, 큰 절을 드렸다. 바로 이것이다. 진정한 겸손이다. 스스로 자신을 낮추는 것이다. 언뜻 생각하면 겸손은 쉬워 보인다. 우리는 늘 교회에서 겸손에 대해 듣는다. 그래서 겸손은 교회를 다니는 우리에게는 늘 자연스럽고 익숙하다. 그런데 바로 여기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겸손이라는 것이 너무 익숙하기에 이것이 우리에게 겸손을 행하는 것도 쉬울 것이라는 착각을 만드는 것이다. 하지만 조금만 더 생각해 보면 진정한 겸손은 결코 쉽지 않다. 우리가 누군가에게 큰 은혜를 입었다고 해도 자연스럽게 얼굴을 땅에 대고 큰 절을 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물론 큰 절을 했다는 행위 그 자체가 룻이 하나님의 은혜를 받도록 만든 핵심은 아니다. 룻의 큰 절이 진정으로 중요한 이유는 이것이 그녀의 내면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생각해 보자. 왜 룻은 갑자기 큰 절을 했을까? 치밀하게 계산된 행동이었을까? 아니다. 룻의 큰 절은 13절의 자연스러운 결과였다. 보아스의 하녀 중 하나보다도 못하다는 그녀의 겸손의 결과인 것이다. 평소 스스로 자신에 대해서 겸손하게 생각한 그녀의 내면적 겸손의 자연스러운 반응인 것이다. 물론 룻은 당시 이방여인이었다. 주변의 이스라엘 사람들보다는 낮은 신분이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몸이 먼저 반응한 룻의 큰 절은 결코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룻의 내면의 진정한 겸손이 큰 절로 나타났던 것이다. 그래서 큰 절이 중요하다. 핵심이 되는 것이다. 예배의 동양적 의미는 큰 절이다. 하나님 앞에 나 자신을 완전히 낮추는 것이다. 그래서 오늘날 우리에게 큰 절이 중요하다. 하나님 앞에 완전히 자신을 낮추는 큰 절, 바로 예배이다. 겸손이다. 우리는 진정으로 하나님 앞에 겸손할까? 완전히 주 앞에 큰 절을 하고 있을까? 오늘 우리에게 룻의 큰 절, 겸손이 절실히 필요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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