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 교/사도행전 강해

'사도행전강해'(18)예루살렘 교회의 생활상(2)(2:42~47)

미션(cmc) 2011. 5. 28. 07:00

'사도행전강해'(18)예루살렘 교회의 생활상(2)(2:42~47)

유상섭(총신대학교·신약학)

 

지난주에 이어서 예루살렘 교회의 나머지 두 가지 특성에 대하여 생각해보자. 이것은 떡을 떼는 일과 기도하는 일이다. 먼저, 예루살렘 교회는 떡을 데는 일에 전적으로 헌신했다. 46절은 42절에 언급된 『떡을 뗀다』는 표현의 의미를 좀더 자세히 설명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46절에 언급된 두 가지 식사는 『떡을 떼는 것』과 『음식을 먹는 것』이다. 이것은 42절이 언급한 『떡을 떼는 것』을 두 가지로 세분해서 설명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들이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었다』는 표현은 성도들 가정에서 공동 식사였음을 보여준다(47b절). 47a절의 『떡을 떼었다』는 말은 성찬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면 우리는 47절에서 두 가지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성찬이 정규 식사와 함께 실행이 되었을 가능성이고, 또 하나는 돌아가면서 각 가정에서 모일 때마다 성찬이 거행되었다는 사실이다. 가정의 단위를 놓고 생각해 볼 때 우리는 각 가정에서 모임이 소그룹의 성격이었음을 묵과할 수 없다. 아무리 성도들이 모인 집이 크다고 할지라도 200여명 이상은 수용하기가 힘들었을 것이다. 현대 교회에서는 이러한 성격의 떡을 뗌이 성도들 사이에 부족한 것을 부인할 수 없다. 성찬도 대부분의 교회에서 너무 적게 시행될 뿐만 아니라, 성도들 사이의 식탁교제도 크게 무시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오늘의 교회는 떡을 떼는 일에 대하여 좀더 심각하게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나머지 모습은 예루살렘 교회가 각종 기도에 전적으로 헌신했다는 것이다. 120 문도가 기도에 전적으로 헌신을 했었는데 기도에 전적으로 헌신하는 모습이 교회가 3천명으로 확장되었을 때도 교회가 전적으로 기도에 헌신하는 모습으로 등장하는 것은 정말로 우리에게 도전을 주는 모습이다. 교회의 크기에 성도들의 기도 생활에는 변화가 없었다는 사실은 기도는 교회 개척단계에서는 필사적으로 해야하고 성장 혹은 성숙의 단계에서는 기도를 덜 해도 괜찮다는 생각을 불가능하게 한다. 교회는 기도에 대하여 항상 변함없는 태도를 가져야 할 것을 예루살렘 교회가 우리에게 보여준다.
위에서 지적된 내가 특성 외에도 예루살렘 교회는 신자들 사이에 재물 공유 생활을 했다(44-45절). 저자는 예루살렘 교회의 무리들은 현재 『믿고 있는 자들』이라고 칭하고 있다(44절). 이들은 오순절 날에 단회적인 회개와 세례를 통하여 예수님과 연합되어 하나님의 새 백성의 일원이 되었고 하나님 백성의 참 표징인 성령을 받은 자들이다. 이제 새 언약 백성의 삶은 한 마디로 계속적인 믿음의 삶이다. 이들은 신자들은 마음을 같이하였고, 이러한 일치는 신자들 사이에 재물 공유 형태로 나타났다. 44절의 『모든 재물을 서로 통용했다』는 표현은 교인들이 모두 다 재산을 팔아서 교회에 헌납을 한 후에 이것을 모두 공통분배 했다는 의미로 확대해석 되서는 안 된다. 45절이 바로 이 표현의 의미를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먼저 45절에서 우리의 주목을 끄는 것은 44절에 사용된 두 동사가 미완료 시제로 사용되었듯이 여기에 사용된 세 동사(팔다, 나누어주다, 가지다)의 시제가 모두 다 미완료란 사실이다. 이것은 성도들의 재산 공유가 각 성도들의 사유 재산의 포기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교회 내에 성도들 가운데 궁핍한 문제가 간헐적으로 제기되었을 때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 여유가 있는 성도들이 부동산 (재산)이나 동산 (소유)을 팔아 처분하여 이러한 필요를 해결했음을 보여준다. 만일 모든 교인들이 한꺼번에 재산을 모두 처분하여 나누어 가졌다면 그들은 나중에 더 이상 팔 재산이 없었을 것이다. 교회의 재물 공유에 관한 기록은 4:32-37에도 이와 유사하게 등장한다. 이 두 곳에서 공통점은 성들이 재산을 팔아 교회에 기증하는 행위가 모두 자발적이었다는 것이다. 이 점은 예루살렘 교회가 원시 공산주의의 생활상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 전혀 아니라는 것을 잘 입증한다.
유상섭(총신대학교·신약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