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사랑으로 이웃을 섬기는 성도
(눅 10:30-37)
(눅 10:25) “어떤 율법교사가 일어나 예수를 시험하여 이르되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눅 10:26) “예수께서 이르시되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 (눅 10:27) “대답하여 이르되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 (눅 10:28)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하시니” (눅 10:29) “그 사람이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예수께 여짜오되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니이까”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나 믿지 않는 사람이나 마음에 간절한 바람은 매일 매일을 건강하고 행복하게 오래 사는 것과 죽음이 오면 영생 복락을 얻는 것입니다. 또한 그것은 이단종교가 사람들을 미혹하는 공통된 미끼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매일 매일을 행복하게 사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렇게 물으면 그것은 건강하게 사는 것이라고 대답을 할 것입니다. 그래서 새해 인사 가운데 대세를 이루는 화두는 ‘새해는 더욱 건강하시기를 기원합니다’ 라는 것이 아닙니까?
물론 그것이 틀린 말은 아니지만 완벽한 말도 아닙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세상에 모든 부귀권세를 다 가지고 있다고 할지라도 건강을 잃게 되면 아무 소용이 없기 때문에 건강은 인생이라는 집의 기초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설령 건강하다고 할지라도 사람이 그것 하나만으로 행복하다고 느끼는 것이 아니라 심심해서 못살겠다고 말하는 존재이기 때문에 건강한 사람일수록 무엇인가 보람된 일이 있어야만 행복할 수 있는 것입니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세상에서 가장 보람된 일을 자기 자신의 만족에서 찾게 되면 결국 무가치한 사람이 되어버리고 말게 되지만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일에서 찾게 되면 진정한 행복이 무엇인가를 깨닫게 됩니다.
그것을 우리에게 본보여 주신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이 세상에 오실 필요가 없으신 영원하신 하나님의 독생자이십니다.
인간은 일평생 자신만의 행복을 추구하는 삶을 살면서도 그다지 행복한 삶을 살지 못한 채 결국 죽음에 이르러서 한 줌의 흙이나 재가 되고 마는 허무한 존재입니다.
그렇게 한평생을 살 수 밖에 없는 우리들에게 과연 영원토록 행복한 삶이 무엇이며, 어떻게 사는 것이며, 그 결과 어떤 복을 받게 되는지 오늘 성경 말씀을 통해서 깨달아 2012년 한 해를 예수님의 사랑으로 이웃을 섬기는 행복한 성도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1. 예수님을 시험하는 율법 교사의 질문
오늘 성경에 한 율법교사는 자신이 율법을 잘 알고 다 지킨다는 생각을 가지고 살면서 예수님에게 그것을 인증 받고 싶은 마음에 예수님을 시험하는 질문을 하기를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까? 라는 질문을 던졌습니다.
예수님은 그 율법사에게 즉답을 주시지 않고 되물어 스스로 답을 찾게 하시려고 율법에 무엇이라고 기록되었더냐? 라고 물으셨습니다.
율법교사는 마치 후후 불지 않아도 쉽게 먹을 수 있는 식은 죽 먹듯이 신명기 6:5과 레 19:18 에 있는 너무나 유명한 말씀을 술술 외어 댔습니다.
(눅 10:27) “대답하여 이르되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
예수님은 율법 교사를 칭찬하시듯이 ‘네 대답이 옳도다 그대로 행하면 살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율법 교사는 예수님의 그 같은 말씀에 만족하지 않고 자기는 벌써 그 율법을 잘 알고 다 지키고 있다고 자신하는 사람처럼 자신이 사랑해야 하는 이웃의 범위에 대해서 묻기를 ’내 이웃이 누구니이까‘라고 반문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이유는 당시 이방인들에게 대해서 냉혹하리만큼 배타적인 유대인들이 생각하는 이웃은 고작해야 동족이나 같은 유대교인들만을 이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그와 같은 율법 교사의 질문에 대해서 직답 대신에 우회적으로 강도 만난 사람의 이야기를 통해서 진정한 이웃이 누구이며, 그 이웃을 어떻게 섬겨야 하는지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가르쳐 주셨습니다.
2. 예수님의 지혜로운 답변
1) 절대 도움이 필요한 이웃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은 해발 760m의 고지대인 반면에 그 성전에 와서 절기를 지키고 돌아가야 하는 여리고는 해저 250m의 저지대에 위치해 있습니다.
또한 그 거리는 약 36km로 걸어가기에는 좀 먼 거리였으며, 길이 매우 가파르고 길옆에는 암석들이 많아 산적들이 자주 출몰하는 곳이었습니다.
성경을 라틴어로 번역한 제롬(Jerome)에 의하면 A.D. 4세기말까지도 그 길에는 강도떼들이 횡행하였다고 합니다.
오늘 성경은 바로 그 길을 내려가던 한 사람이 강도를 만나 모든 것을 다 빼앗기고 매까지 맞아 거의 죽게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눅 10:30)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매 강도들이 그 옷을 벗기고 때려 거의 죽은 것을 버리고 갔더라”
그러므로 이 사람은 스스로의 힘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태로 그냥 내버려두면 둘수록 위급해지는 상황에서 누군가의 도움이 절실한 상태였습니다.
2) 도움을 주어야 할 책임이 있는 이웃
그 때 마침 강도를 만나 죽어가는 사람의 곁으로 다가오는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은 마땅히 강도 만난 사람을 도와야 할 책임과 의무가 있는 제사장이었습니다.
(눅 10:31) “마침 한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사장은 강도 만난 사람을 돕지 않고 보고 피하여 지나갔다고 말씀 하였는데 여기서 ‘피하여’라는 말(ajntiparevrcomai)은 반대편으로 지나가다는 뜻입니다.
아마도 제사장은 강도 만난 사람을 보자 자기도 강도를 만날까봐 두려워서 오던 길을 되돌아가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제사장이 피하여 지나 간 후에 얼마의 시간이 흘러 또 한 사람이 강도 만난 사람의 곁을 지나가게 되었는데 그 사람은 레위인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레위인조차 제사장처럼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 버리고 말았습니다.
(눅 10:32) “또 이와 같이 한 레위인도 그 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되”
여기서 ‘피하여’라는 말은 제사장과 동일한 모습으로 반대편으로 지나간 것을 뜻합니다. 이제 강도 만난 사람은 점점 더 위기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더욱 누군가의 도움이 절실하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제사장이나 레위인은 강도 만난 사람을 도와야 할 책임과 의무와 능력이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돕지 않고 반대편으로 간 이유가 무엇일까요? 몰인정하고 인색하기 때문이었을까요? 당연히 비난을 받아야 마땅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나름대로 비난하기 어려운 이유가 그들에게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만일 강도 만난 사람을 돕다가 자기들도 그와 같이 강도를 만날까봐 두려워서 못 본체 하고 지나간 것이라면 그래도 비난의 돌을 던져야 할까요?
과연 오늘 우리들에게는 그러한 두려움이 없습니까? 그래서 오늘 우리들도 마땅히 도움을 주어야 할 사람을 돕지 않고 못 본체 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래서 오늘 성경에 나오는 제사장이나 레위인을 무조건 싸잡아 비난하기에는 우리들도 자유롭지 못한 사람들일 것입니다.
예화 1
얼마 전에 인터넷 상에 중국의 몰인정한 외면 문화라는 제목으로 동영상 하나가 사람들의 주목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중국에서 2세 여자아이가 길 한복판에서 뺑소니를 당해 쓰러져 있는데,무려 18명의 사람들이 도움의 손길을 주지 않고 매정하게 지나가 충격을 주고 있습니다.중국 뺑소니 사고는 지난 13일 중국 광동성 포난시의 한 골목에서 일어났습니다. 사고현장에 설치된 폐쇄회로(CCTV)에는 한 승합차가 어린아이를 치고 도주하는 모습이 담겨있습니다. 뒤이어 한 행인이 아이 곁을 지나치지만 눈길도 주지 않습니다.두 명의 행인이 더 지나가고 이 곳을 지나가던 트럭 한 대가 쓰러진 아이를 또다시 밟고 지나갑니다. 이어 일곱 명의 행인이 아이를 발견했지만 아무도 나서지 않아 즉시 병원으로 이송되지 못합니다. 이 아이는 약 10분간 쓰러진 상태로 방치되어 있다가 쓰레기를 버리러 온 18번째 행인인 한 여성에게 구조돼 아이 엄마에게 신고 됐다고 합니다. 그 아이의 이름은 왕위에(王洋網)로 밝혀 졌는데 그 이후 병원에서 치료를 받다가 끝내 새벽 끝내 숨졌다고 합니다.
이것을 가리켜 사자성어로 오불관언(吾不關焉, 내가 상관할 일이 아니다)이라고 합니다. 물론 중국에서도 많은 인터넷 상에서 많은 사람들이 중국이 어쩌다 이 지경이 되었는가? 라고 개탄하는 소리가 들끓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곰곰이 살펴보면 다 그럴만한 사연이 있다는 것입니다. 중국인들을 이렇게 처신하게 만든 결정적인 사건이 있었습니다.
예화 2그것은 지난 2006년 11월 난징(南京)에서 있었던 '펑위(彭宇) 사건'이다. 당시 일용직 근로자였던 펑위는 승강장에서 버스를 타려고 몰려든 군중에 의해 쓰러진 한 할머니를 부축해 일으켜 세우고 할머니의 가족에게 연락해 병원에서 진료를 받을 수 있도록 도왔습니다. 참으로 고마운 일이 아닙니까? 그러나 그에게 돌아온 것은 고맙다는 답례 대신 손해배상 청구였습니다. 할머니가 자신을 밀어 넘어뜨린 가해자라고 고발을 하여 배상금으로 13만 위안을 주라는 법원의 판결이었습니다.한 것입니다. 우리나라 돈으로 계산을 하면 무려 23,673,000원입니다. 평위는 목격자들을 증인으로 세워 억울함을 호소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법원은 1심에서 '공평의 원칙'을 내세워 펑위에게 4만 위안을 배상하라고 판결했습니다. 펑위는 불복 끝에 항소했고, 양측은 2심 재판이 진행되는 동안 합의해 법정싸움을 종결지었다고 합니다. 이 사건은 당시 언론을 통해 대대적으로 보도되면서 중국인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습니다. 선의로 베푼 행동이 도리어 자신에게 화를 미칠 수 있다고 여기게 된 것입니다. 진실을 밝히지 못한 법원의 판결을 조롱하고 비판하는 여론도 비등했습니다. 이후 길거리에서 넘어지는 노인이나 교통사고를 당해 쓰러진 부상자가 있어도 선뜻 달려들지 않는 '외면 문화'가 점차 확산하게 된 것입니다.
오늘 성경에서 제사장이나 레위 인이 강도 만난 이웃을 선뜻 돕지 못한 이유도 바로 그와 비슷한 이유 때문일 것입니다. 또한 중국만이 아니라 그것이 오늘 한국의 현실이기도 합니다. 특히 이단들이 그와 같은 방법으로 교회에 침투를 해서 목회자를 넘어뜨린다는 공공연한 비밀이 나돌기도 합니다. 참으로 개탄할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3. 이웃이 아니면서 이웃이 되어준 사람
예수님은 율법 교사에게 이웃을 마땅히 도와주어야 할 책임과 의무가 있는 제사장이나 레위인은 강도 만난 이웃을 돕지 않았으나 그곳을 지나가던 또 한 사람이 도왔다고 말씀하였습니다. 과연 어떤 사람이었을까요?
(눅 10:33) “어떤 사마리아 사람은 여행하는 중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그 사람이 바로 사마리아 사람이라고 하였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제일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것은, 아브라함의 혈통을 이어 받은 순수한 유대인이라는 자부심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이방인이나 본래 아브라함의 자손이었으나 전란으로 인해 이방인의 피가 섞인 사마리아 사람들을 개 취급을 하며 멸시하는 악습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은 사마리아 사람들과 도움을 주고받기는커녕 상종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북쪽 갈릴리로 가시기 위해 사마리아 땅을 지나가시다가 사마리아의 땅에 있는 야곱의 우물가에서 사마리아 여자에게 물을 구하셨을 때 그 여인이 한 말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요 4:9) “사마리아 여자가 이르되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 하니 이는 유대인이 사마리아인과 상종하지 아니함이러라”
그렇다면 오늘 성경에서 만일 사마리아 사람이 강도 만난 사람을 보고 그냥 지나쳐도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오히려 유대인들에게 더러운 사마리아 사람이 유대인을 만졌다고 모함을 받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1) 섬김의 원동력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마리아 사람은 강도 만난 사람이 유대인임을 보고 그냥 지나친 것이 아니라 도움을 베풀었습니다. 그 이유는 그릇된 전통이나 관습이나 편견을 뛰어넘는 인간적인 긍휼함 때문이었습니다.
(눅 10:33) “어떤 사마리아 사람은 여행하는 중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여기서 ‘불쌍히 여겨’라는 말(splagcnivzoma)은 예수님께서 병자들을 보시면서 품으셨던 그 마음과 같은 마음을 뜻하는 단어로 ‘내심으로 감동하다, 동정심을 가지다 자비를 베풀다’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독생자이신 예수님이 인간의 육신을 입고 세상에 이유도, 병자들과 귀신들린 자들을 값없이 고쳐주신 이유도 바로 그 불쌍히 여기는 마음 때문이었습니다.
아무리 남을 섬겨야 할 책임과 직분을 가지고 있는 사람일지라도, 아무리 남을 돕고 남을 만큼 많은 물질을 가진 사람일지라도 남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나 감동이 없으면 일원 한 장 도울 수 없는 것입니다.
정반대로 남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만 있으면 제사장이나 레위인과 같은 체면이나 관습이나 이기심에 얽매이지 않고 사마리아 사람들과 같은 적대감에 얽매이지 않고 오늘 성경에 사마리아 사람처럼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진리가 주는 자유이며, 이것이 바로 섬김의 원동력은 돈이 아니라 마음인 것입니다.
2) 섬김의 실천
사마리아 사람은 지금 여행하는 중이었기 때문에 기름이나 포도주나 나귀가 절대로 필요하였습니다. 그리고 시간은 돈이기 때문에 지체하지 말고 빨리 여리고로 내려가서 돈을 벌어야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체하면 할수록 손해가 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사마리아 사람은 강도를 만난 사람을 위해 자신의 소유 즉 자신이 당장 필요한 것을 다 베풀어 섬겼습니다.
(눅 10:34)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니라”
여기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라는 말씀은 의사 출신인 누가만이 할 수 있는 그림같은 표현으로 사마리아 사람의 섬김이 마음에서 우러나온 것임을 잘 묘사하고 있습니다.
당시 기름과 포도주는 식용일 뿐 아니라 긴 여행 중에 있을지도 모르는 사고에 대비하여 상처의 치료제로 널리 알려진 것으로 기름은 상처의 통증을 완화하고, 포도주는 살균 작용을 하는데 사용되었습니다.
그리고 기름과 포도주를 바르고 상처를 싸매어 주었다는 것은 붕대가 없던 시절에 자신의 옷의 일부를 찢어서 덧이 나지 않도록 잘 싸매어 주는 자상한 모습을 표현해주는 것입니다.
그것만이 다가 아니었습니다. 그 사람은 강도 만난 사람과 하루 밤을 함께 지내면서 정성껏 간호를 하였습니다.
사마리아 사람은 그 이튿날 길을 떠나면서 주인에게 치료를 당부하며 노동자의 이틀 일당에 해당하는 두 데나리온의 돈을 주면서 만일 치료비가 더 많이 들면 자기가 되돌아 올 때 갚겠다고 여관 주인에게 부탁하면서 치료비까지 주고 길을 떠났습니다.
(눅 10:35) “그 이튿날 그가 주막 주인에게 데나리온 둘을 내어 주며 이르되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비용이 더 들면 내가 돌아올 때에 갚으리라 하였으니”
그야 말로 완벽한 사랑의 실천입니다. 만일 그와 같은 후속조치가 없으면 나중에는 더 위중해 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오래 참는 사랑이며, 모든 것을 다 주는 사랑이며, 끝까지 사랑하는 사랑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선한 사마리아 사람과 같은 사람이 진정한 이웃이며, 누가 이웃이냐고 묻는 율법 교사에게 생각만 하지 말고 선한 사마리아와 같이 이웃을 구체적으로 사랑하라고 당부하셨습니다.
(눅 10:36) “네 생각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눅 10:37) “이르되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하시니라”
만일 사마리아 사람이 제사장이나 레위인처럼 피해의식에 사로 잡혔다면 그러한 사랑을 실천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결 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세상에는 세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누구에겐가 도움이 필요한 강도 만난 사람, 이웃을 마땅히 도와야 할 책임과 의무가 있는 사람, 적극적인 의무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자발적으로 이웃을 섬기는 선한 사마리아 사람과 같은 성도입니다.
예화 3
저는 오늘 설교를 준비하면서 내가 바로 제사장과 같이 피해의식에 사로잡혀 강도 만난 사람을 적극적으로 섬기지 못한 장본인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때로는 전화로 때로는 메일로 각계각층에서 도움과 상담을 요청해오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그런 경우에 점점 망설이고 미루게 되면서 도움을 베풀거나 섬기지 못하는 경우가 점점 많아져 가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상대방의 진정성과 의도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혹시 사기를 치는 것이 아닐까? 거짓말이 아닐까? 이용하려는 것이 아닐까? 라고 저울질을 하면서 선뜻 도움을 주지 못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심지어 신천지 추수꾼들은 새신자로 위장을 해서 목사에게 상담을 요청하면서 접근을 하여 약점을 캐내고 유혹을 하고 넘어지게 하여 교회를 시험에 빠지게 하는 사례가 종종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요즘은 담임목사와 상담을 요청하는 전화를 하면 이 핑계 저 핑계를 대면서 연결을 해 주지 않고 담임 목사의 전화번호를 비밀에 붙이는 일이 종종 일어나고 있습니다. 목회자만이 아니라 교회 요람에 보면 전화번화가 다 나와 있기 때문에 이단들이 그것을 입수하여 장애단체를 빙자하여 구매를 요구하는 전화를 걸기 때문에 거절하고 나면 마음이 불편하고 돕자고 하면 혹시 속는 것이 아닌가 하여 마음이 찜찜한 적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선한 사마리아 사람처럼 묻지 따지지도 말고 무조건 도움을 요청하는 사람을 다 도우라고 할 수도 없습니다.
서구 교회는 점점 침체하고 있지만 서구 사람들의 문화에는 기독교 정신이 많이 배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프랑스 형법 제 63조 2항, 독일 형법 제 330조 c 항이나 러시아나 루마니아, 헝가리, 체코슬로바키아와 같은 사회주의 국가의 법에는 선한 사마리아 조약을 법으로 제정하여 국민들에게 지키도록 제도화한 것이 있습니다.
"위험에 처해 있는 사람을 구조해 주어도 자기가 위험에 빠지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자의(自意)로 구조해 주지 않은 자는 3개월 이상 5년 이하의 징역, 혹은 360프랑 이상 15,00프랑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 징역 1 년 이하 또는 벌금형에 처한다. 개월을 초과하지 않는 기간 동안의 징계 노동을 하거나 사회적 비난에 의해 처벌받을 것이며, 또는 사회적 압력 조치의 적용 대상이 될 것이다. 3 년 이하의 금고나 징역형에 의하여 처벌된다" 심지어 가까운 일본나라도 형법으로“구조 의무가 있는 자가 구조를 유기한 때에는 3년 이하의 징역, 구조 의무가 없는 자가 유기한 때에는 1년 이하의 징역에 처한다.” 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이는 사람의 양심이 마치 지진을 만난 것처럼 무너져 버렸을 경우에 법으로 강제 규제해서라도 이웃을 돕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성경 말씀은 그와 같은 강제 규정이 아니라 강도 만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대신 죽어주신 아가페 사랑을 본받아 이웃을 섬기되 특히 도움을 필요로 하는 이웃을 못 본체 하지 말고 최선을 다해, 오래 참음으로, 끝까지 섬기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2012년에는 우리 모두 그와 같은 사랑의 실천을 통해 이웃을 섬김으로 그들의 가슴 속에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 깃들게 한다면 그것이 전도 중에 최고의 전도인 사랑과 섬김의 전도가 될 것입니다.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이웃을 섬기고 사회를 섬기고 나라와 민족과 세계 열방을 섬기는 이웃 사랑과 전도와 선교의 대열에 우리 모두 적극적으로 참여함으로 진정한 행복을 체험하는 2012년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사 58:6) 내가 기뻐하는 금식은 흉악의 결박을 풀어 주며 멍에의 줄을 끌러 주며 압제 당하는 자를 자유하게 하며 모든 멍에를 꺾는 것이 아니겠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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