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합회사진 방/수원노회 유럽탐방

유럽종교개혁지 탐방 8편(독일 에르푸르트 아우구스티누스 수도회)

미션(cmc) 2012. 7. 16. 22:46

 

 아이슬레벤~에르푸르트 이동

 RAMADA HOTEL ERFURT 투숙 

 

에르푸르트 [Erfurt]

튀링겐 분지에 위치하며 게라 강을 끼고 있다. 724년 처음 에르페스푸르트로 기록되었는데, 이 이름은 게라(원명 에르프) 강의 여울(푸르트)에 수도원과 왕의 저택이 서 있던 데서 유래했다. 742년 성 보니파티우스가 이곳에 주교관구를 세웠다. 805년경에는 프랑크 제국의 동쪽 경계선에 접한 군사 요충지이자 행정·상업 중심지였다. 1250년경 마인츠의 대주교로부터 자치권을 인정받았으며, 중세시대에는 광활한 여러 지역을 관장했다. 15세기에 한자 동맹에 가입했으며, 1600년까지 청색 물감을 추출하는 데 쓰던 대청을 상당량 취급한 상업 중심지였다. 1392년에 개교한 대학교는 1816년 탄압을 받았다. 30년전쟁(1618~48) 때 스웨덴의 주둔군이 점령했으며, 1664년에는 마인츠 선거후의 영토가 되었다. 1802년 프로이센으로 넘어간 뒤, 프랑스가 점령했던 시기(1806~13)를 제외하고는 1945년까지 프로이센 작센의 일부가 되었다. 1808년 나폴레옹과 러시아의 알렉산드르 1세가 바이에른·작센·베스트팔렌·뷔르템베르크 등의 여러 왕들과 함께 에르푸르트 의회 의사당에서 회의를 가졌으며, 1850년 잠시 시행된 프로이센 동맹 회담도 이곳에서 열렸다. 돔베르크 언덕 꼭대기에 성당과 장크트제베루스 교회가 우뚝 서 있다. 대성당(1154~1476)에는 15세기의 유리와 수많은 예술작품들이 있다.

에르푸르트대학

1501년 4월 또는 5월에 마르틴 루터는 에르푸르트대학 입학허가를 받는다. 에르푸르트대학은 당시에 독일에서 세 번째 오래된 대학으로 1392년에 개교했다. 루터는 1502년 학사자격을 얻고 1505년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부친의 권유에 따라 법학공부를 계속하려 했다. 그런데 1505년 7월 2일 부모가 살던 만스펠트(Mansfeld)에서 에르푸르트로 돌아오던 중 스토테른하임(Stotternheim) 근처의 길에서 벼락을 맞았다. 그는 비 내리는 흙탕물 속에 뒹굴며 두려워 떨며 수도사가 되기로 결심한다.

  22살의 청년이 두려움 때문에 수도사가 되기로 결심하고 부친의 분노를 사게 되는 상황을 이해하기 힘들다. 여기에서 많은 사람들의 상상력이 발동한다. 친구와 둘이 길을 가다가 벼락에 친구가 죽자 수도사가 되기로 결심했다는 설, 친구의 죽음이 하나님의 형벌이라 생각하고 자신이 죄의식에 사로잡히게 되었을까? 또 다른 설 하나는 두려움에 떨며 광부들의 수호성인인 성 안나에게 도움을 기도하며 수도사가 되기로 서원했다고 한다.

  아무튼 루터는 1505년 7월 17일 성 아우구스티누스 수도원(Augustinerkloster)에 들어갔다. 1506년 9월 수도사가 되기로 서약하고 1507년 4월 사제로 서품을 받고 5월 1일 수도원 채플에서 첫 미사집전과 강론을 했다. 루터는 1511년 비텐베르크 수도원으로 부름을 받을 때까지 이곳에서 살았다.

 

어거스틴 루터 설교교회

루터는 자신의 내면에 숨어 있던 공포와 불안을 자각하는 경험을 하게 되었다. 슈토텐하임이라는 작은 마을에서 뇌우를 만났고, 가까운 곳에서 벼락이 내려치는 가운데 구원받을 준비다 되지 못했다는 공포에 싸여 '성 안나여, 수도사가 되겠나이다'라고 서원 하였다. 루터는 1505년 7월 17일 그 당시의 가장 엄격하기로 이름난 어거스틴파 은둔 수도원에 들어갔으며, 수도사 수련기간에 처음 접하게 된 성경에 몰입하였다. 1507년 4월 4일 에르푸르트 대성당에서 사제서품을 받았고, 1507년 5월 2일 주일에 수도원 동료, 부모, 그리고 친구들이 참석한 가운데 첫 미사를 집전하였다.
1508년 비텐베르크 어거스틴 수도원으로 자리를 옮긴 루터는 비텐베르크대학에서 철학을 강의하였다. 1509년 성경학사 학위를 받았고, 다시 가을에는 에르푸르트대학으로 가서 명제집 학사가 되었다. 1510년 11년 사이에 루터는 다른 동료 수도사와 함께 로마로 파견되는 협상대표가 되었다. 루터가 협의할 문제는 어거스틴 총 수도원 독일 책임자인 요한 스타우피츠가 기타 다른 엄격한 수도원들과 수도원의 규율을 통합하는 안을 내놓았는데 이에 반대하기 위함이었다. 루터는 비텐베르크대학에서 1512년 10월 19일에 신학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요한 슈타우피츠는 자신의 교수직을 루터에게 물려주었다.

 

 

루터가 설교하던 설교대

 

 

 

루터에 얽힌 이야기 - 거위가 타고남은 재에서 나온 백조 한 마리

예비 수도사로 견습기간을 마친 루터는 1506년 9월 서원식을 거쳐 정식 수도사가 되었다. 그리고 1507년 4월 4일 에어푸르트 대성당에서 사제서품을 받은 후, 5월 2일 수도원 교회에서 첫 미사를 집례하였다. 이 때 심경을 나중에 루터는 이렇게 말하였다:
사제서품 후 에어푸르트에서 첫 미사를 봉헌하며 “살아 계시며 유일하신 주 하나님께 저를 바칩니다” 라고 고백할 때, 나는 그 제단에서 도망치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만일 수도원장이 뒤에서 나를 붙들지 않았다면, 정말 그렇게 하였을 정도로 나는 정신이 없었다. 그 때 나는 “주님과 이야기를 나누는 이 자가 과연 누구란 말인가” 라고 생각하였다. 그 이후에도 나는 이런 충동을 크게 느끼며 미사를 드렸는데, 하나님께서 나를 이런 중압감에서 해방시켜 주신 것에 감사드린다.
루터가 첫 미사를 집례한 제단 그 자리에서 바로 한 계단 아래 바닥에 자카리아 (Johannes Zachariae) 신부의 묘비가 있다. 그는 1414-15년에 열린 콘스탄츠공의회에서 체코 출신 종교개혁가 얀 후스 (1367-1415)를 이단자로 정죄하여 화형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사람이다. 그 공로로 그는 교황에게서 후스를 이긴 자(Hussomastix = Husüberwinder) 라는 칭호를 받는 한편, 금으로 만든 장미꽃 다발을 선사받았다.
한편 1415년 7월 6일 화형 당하기 직전에 후스는 이런 말을 남겼다고 한다: “당신들은 오늘 거위 한 마리(후스라는 단어에 체코말로 거위라는 뜻이 있다) 를 불에 굽지만, 그 타고남은 재에서 100년 안에 백조가 한 마리 나올 것이다. 그 백조를 당신들은 결코 불태울 수 없을 것이다.” 후스가 말한 이 예언은 그로부터 91년 후에 루터가 바로 이 묘비 위에 엎드린 채 수도사 서원을 드리고, 또 그로부터 11년 후에 빗텐베르크에서 “95개 조항”을 통해 종교개혁운동을 시작함으로써 이루어졌다. 그래서 사람들은 후스를 거위로, 루터를 백조로 상징하게 되었던 것이다.  

 

세례단

 

 

루터가 사제 서품을 받은 대성당

12세기에 지어진 고딕 교회로 에르푸르트의 대표적 명소이다. 돔 광장 주변에 교회가 위치하고 있는데, 구시가지 지역에 위치하고 있다. 왼편이 마리엔 교회이고, 오른편이 데비리(떼베데) 교회이다. 루터는 어거스틴 수도원에서 사제 생활을 하고, 이 교회에서 사제 서품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곳 지역에는 많은 대학들이 모여 있던 곳이었는데, 2차 세계대전 이후에 이 지역에 있던 많은 대학들이 외곽 지역으로 옮겨졌다. 하지만 에르푸르트 신학과 건물은 이 교회 뒤쪽에 위치하고 있다.

 

 

 

 

 

 

 

 

멘델이 현대 유전한 이론을 밝혀냈던 수도원(Augustiniansky klaster, Augustinian Monastery and Basilica of the Assumption of Our Lady)
1686년 아우구스티누스 수도원의 대수도원장으로 선출된 요한 그레고르 멘델(1822-1884, 아우구스티누스 수도회의 성직자로, 현대 유전학의 비밀을 밝힌 체코 출신의 과학자)은 이 수도원에서 그의 유전학 이론 가설을 공식화하고 밝혀 내는데 성공하였다.
Husova 거리에서 Pekarska 거리로 들어과 내리막 길을 걸으면 멘델 광장에 다다르게 되고 광장 한 곳에 위치한 고딕 양식의 건물인 성모 교회(Bazilika Nanebevzeti Panny Marie)의 뒷편에 멘델의 기념관이 있다. 기념관앞에는 멘델이 완두콩을 키웠던 정원이 있고 정원 한편에는 그의 기념 동상이 서있다.

 

에르푸르트의 아우구스티누스 수도회

루터가 왜 종교생활에 입문하기로 결심했는지 알려주는 증거는 거의 남아 있지 않다. 꼭 믿을 만한 증거라고는 할 수 없지만 그가 만년에 쓴 〈식탁 담화 Tischreden〉에 따르면, 1505년 7월 2일 부모를 방문하고 돌아올 때 슈토테른하임 마을 근처에서 천둥을 동반한 폭풍우를 만나 공포에 휩싸여서 "성 안나여, 나를 도우소서. 수사가 되겠나이다!" 하고 외쳤다고 한다. 〈수도 서약에 관하여 De votis monasticis〉(1521)라는 글에서 "내가 수사가 된 것은 자유롭게 결정한 것도 아니고 원해서도 아니었다. 갑자기 죽을지도 모른다는 공포와 고뇌에 휩싸여 어쩔 수 없이 서약하게 되었다"고 말했다. 그는 버질과 플라우투스의 저서만 남기고 거의 모든 책을 팔아치운 후 1505년 7월 17일 에르푸르트의 수도원으로 들어갔다.

 

루터가 가입한 아우구스티누스 은수자 수도회는 중요한 탁발 수도회로, 15세기 중엽에 이르러 2,000개 이상의 지회를 거느리고 있었다. 1473년의 개혁으로 루터가 가입한 에르푸르트 수도원은 수도원 규칙을 엄수해야 한다는 해석을 채택했다. 1504년 루터의 스승이자 수도회를 통괄하는 지도신부였던 요한 폰 슈타우피츠의 지도로 수도원의 회칙이 개정되었다. 루터는 1506년 수사로서 서원을 했고, 1507년 4월 사제 서품을 받고 그해 5월초에 처음으로 미사를 집전했다. 그때 그는 튀빙겐의 유명론자(唯名論者) 가브리엘 (1495 죽음)이 쓴 미사 규범에 대한 논문을 이미 연구한 바 있었다. 다른 '현대적' 유명론자들과 마찬가지로 오직 이름을 가진 특수자만이 존재하고, 보편적인 개념들은 직관을 통해 형성된다고 주장한 루터는 외경심을 가지고 첫 미사를 집전했다. 이 미사에 그의 아버지가 친구들과 함께 왔는데, 루터는 이 최초의 기회를 이용하여 자신이 받은 소명의 중대함을 아버지에게 설명했다. 그의 아버지는 "너희는 부모를 공경하라는 성서의 말씀도 읽어보지 않았느냐"고 시무룩하게 반문했는데, 이 말은 그의 기억 속에 깊이 아로새겨졌다.

 

 

 

 

 

 

 

루터의 탑의 체험

1483년 독일 시골에서 탄생, 1505년 여행중 벼락을 맞았는데, 살아 있는 것에 감사하여 수도원 입회를 결심, 
아우구스티노 수도원에서 사제서품, 신학박사로 성서 강의 “탑의 체험”을 하게 된다. 
# 탑의 체험 - 루터는 수도원 탑 안에 있는 방에서 로마서를 묵상하던 중 “의화”의 의미를 깨닫게 된다.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공로 때문에 죄인을 자비롭게 바라보심으로써 그 죄인을 의인으로 만드신다”는 의화론으로, 여기에서 “마음으로 믿으면 구원을 받는다”라는 명제를 내세운다. 즉,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서 죽으셨다는 것을 믿고 신뢰하는 마음으로 하느님께 다가가는 사람을 하느님께서는 의롭게 여기신다”는 뜻이다. (이 의화론에 입각한 신앙은 행동이 따르지 않는 믿음, 실천이 따르지 않는 믿음으로 겉 껍데기 믿음이다) 
이를 통해서 루터는 가톨릭의 은총을 중재하는 7성사를 부정하게 되고 믿음에 의해서만 은총을 받게 된다고 주장하면서, 구원의 방주인 교회 자체까지도 부정하게 된다. 결국 구원을 위해서는 성사나 교회가 필요 없으며, 다만 성서와 믿음과 은총만이 필요하다고 주장하게 된다. 
성 베드로 대성당의 보수와 교황청의 재정을 메우기 위해 교회는 유럽 각 지역에 대사를 베풀었다.(대사(大赦)-고해성사로 죄는 용서 받으나 벌(보속)은 남아 있다. 이 벌을 지상에서 채우지 않으면 연옥에 가서라도 채워야 하는데, 이 죄의 잠벌을 없애주는 교회의 특권이 대사이다.) 
대사를 얻기 위해서는 베드로 대성당에 와서 직접 공사에 참여하는 조건이다. 거리가 멀어서 오지 못하는 신자들에게는 신립금을 봉헌함으로서 대사를 얻을 수 있었다. 
#여기에서 면죄부라는 말 자체가 잘못된 것이다. 면죄부는 죄를 용서해 준다는 뜻으로 고해성사를 이야기 하게 되는데,,,,,, 죄를 용서해 주는 것이 아니라, 벌(보속)을 없애 주는 교회의 특전으로서 면죄부가 아니라 대사라 칭하는 것이 옳은 것이다. 교황청에서는 대사를 통하여 더 많은 돈을 거두기 위해 대사 설교사들을 파견하였다. 이들의 설교가 지나칠 정도로 속화되었으며, 
대사가 상거래 식으로 남발하는 것에 대한 시정을 요구하기 위해 루터는 관할 주교님들에게 95개의 질의서-돈을 받고 대사를 남발하는 문제와 대사 설교가들의 지나친 설교에 대한 억제 요청-를 보내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