룩셈부르크~프랑스 파리(약4시간30분)
HILTON ORLY HOTEL(2일숙식)
프랑스공화국(French Republic)
북동쪽으로 룩셈부르크·벨기에, 북서쪽으로 영국 해협, 서쪽으로 대서양과 비스케이 만, 남쪽으로 스페인·안도라·지중해, 동쪽으로 이탈리아·스위스·독일과 맞닿아 있고, 지중해의 코르시카 섬이 포함된다. 면적은 543,965㎢, 인구는 62,596,000명(2009년 추계), 수도는 파리이다. 국민은 주로 프랑스계이다. 공식언어는 프랑스어이고, 종교는 그리스도교인에 로마 가톨릭 신자가 압도적이며 개신교·이슬람교·유대교도 있다. 화폐단위는 유로(#128/€)를 사용한다. 육지의 반 이상이 농업에 적당하고, 자연 그대로의 상태를 간직한 넓은 삼림지역이 영토의 1/4가량을 덮고 있다. 프랑스는 소규모 기업들이 큰 비중을 차지하는 발전된 혼합 경제이다. 국가 수반은 대통령이고, 정부의 수반은 수상이다. 의회는 양원제로 구성된다. 프랑스는 세계의 주요 경제 대국이고 유럽공동체(European Union/EU)의 창립 회원국이었다.
파리 (프랑스)
파리(프랑스어: Paris, 문화어: 빠리)는 프랑스의 수도로, 프랑스 북부 일드프랑스 지방의 중앙에 있다. 센 강 중류에 있으며, 면적은 105㎢. 인구는 2007년 기준으로 217만 명이다. 파리의 행정 구역은 1~20구로 나뉘어 있다.
파리는 센 강을 기준으로 우안(rive droite)과 좌안(rive gauche)으로 나뉜다. 우안은 전통적으로 정치, 경제 기능이 집중된 곳으로 정부 기관, 사무실, 백화점, 주요 기차역 등이 집중해 있다. 반면 좌안은 교육 기능을 중심으로 발전해왔다. 좌안의 라틴 지구에는 소르본을 비롯한 대학 및 그랑제콜, 연구소 등이 집중해 있다.
루브르 박물관
루브르 궁전은 800년에 걸친 역사를 가지고 있으며, 중세의 성에서 프랑스의 역대왕의 궁전까지, 그후로는 미술관으로 그 건물양식이 발전해 왔다.
원래는 궁전으로 중세부터 프랑스 역사상의 중요한 사건의 한부분을 차지했으나 지금은 국제적인 명성에 힘입어 궁전보다는 미술관으로서의 이름이 널리 알려져있다.
1793년에 프랑스 공화국에 의해 설립된 루브르 미술관은 설립시기 면에서는 애슈몰린 미술관(Ashmolean Museum,1683년)과 드레스덴 미술관(Staatliche Kunstsammlungen Dresden,1744년), 그리고 바티칸미술관(1744년)보다 늦지만 유럽에서 최대최고의 미술관의 하나로 손꼽히고 있다.
루브르는 원래 미술관으로 사용될 계획은 아니었다고 한다.
마리 4세가 1671년에 그랜드 갤러리를 1층에 열었다. 미술과 예술품에 박식했던 그녀는 "고대의 방"과 왕의 데상실과 왕의 회화실을 두었고 일반인들에게는 공개하지 않았다고 한다. 1747년 왕의 콜렉션들을 감상할 수 있는 "뮤즈의 궁전"으로 불리우면서 박물관의 역활이 부각되었다고하니 그 옛부터 박물관으로서의 기능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현재에는 페이가 설계한 유리로 만들어진 피라미드가 루브르를 대표한다. 유리 피라미드를 좀 더 지나면 1805년 나폴레옹의 승전을 기념하여 베니스에서 빼앗았다가 1815년 워털루 전투의 패배로 돌려준 산 마르코의 네마리 말들을 조각한 카루젤 개선문도 볼거리이다.
[전시작품 및 예술품]
루브르 미술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콜렉션들은 각 8개부분으로 나뉘어져 있다. 지중해연안의 고대문명에서 서양의 중세시대 전기까지를 지나서, 19세기 전반까지의 작품이 있다.
-고대 오리엔트 미술, 이슬람 미술
-고대 이집트미술
-고대 그리스, 고대 에트르스크
-조각
-공예품
-회화
-그래픽 아트
-중세 르와르
-아프리카, 아시아,오세아니아, 아메리카미술
루브르의 우리에게 잘 알려진 대표적인 작품을 몇가지 말하자면, 다빈치의 <모나리자>, <밀로의 비너스>, <사모트라케의 니케>, 들라크르와의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 다비드의 <나폴레옹 대관식> 등등 헤아릴 수 없는 유명한 예술품들이 소장되어 있다.
밀로의 비너스
밀로스 섬에서 1820년 출토된 비너스 상으로서 출토 당시 원래부터 팔이 없었습니다.
즉, 이 비너스 상은 작자 미상인 조각상으로 BC 2∼1세기에 조각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발굴 당시 이미 두 팔이 손상된 상태였지만 동세나 근육의 모양으로 미루어, 파손된 한 손으로는 흘러내리는 옷자락을 잡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또 다른 손은 '파리스의 심판'에 등장하는 금사과를 쥐고 있었을 것으로 추측되어집니다.
조각상의 기단부에 아가산드로스, 혹은 알렉산드로스라는 조각가의 이름이 새겨져 있긴 하지만, 분명히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이 없어 작자 미상으로 남겨지게 되었다고 합니다.
무슨 이유에서 양 팔이 없이 땅 속에 묻혀 있었는지는 모르나 아무튼 그 밀로의 비너스가 다른 비너스 상에 비해 유명해진 이유는 바로 그 황금 비율에 있습니다.
헬레니즘 시기에는 여인을 주제로 한 누드 조각상의 지속적인 수요와 함께 고전적이면서 동시에 관능적인 육감미를 완벽하게 결합한 조각상들이 많이 제작되어졌는데
미의 여신 아프로디테는 이러한 여인 누드 조각상에 가장 적합한 주제로 인용되어, 그리스 고전시대 이래 꾸준하게 조각상의 주제로 채택되어져 왔습니다.
헬레니즘 시대에 제작된 거의 모든 아프로디테 상은 주로 BC 4세기경의 조각가 프락시텔레스가 제작한 '크니도스의 아프로디테'의 영향을 받은 작품이 대부분입니다.
이 밀로의 비너스 상 역시 그러한데 우리가 흔히 말하는 황금분할(1.618:1)이 이 밀로의 비너스 상에 적용되어 있습니다.
배꼽을 기주으로 한 상반신과 하반신의 비율, 또한 머리에서 목:목에서 배꼽, 배꼽에서 무릎:무릎에서 발끝 등 온 몸의 비율이 바로 이 황금비율로 이루어져 있다고 합니다.
이게 바로 밀로의 비너스입니다.
'사모트라케의 니케'로 불리는 승리의 여신상
1863년 에게해 북서부 연안의 작은 섬 사모트라케에서 발견됐다고 한다. 프랑스 부총독이었던 남자가 거대한 조각의 파편 100여점을 발굴해 그걸 하나하나 맞춰나가다보니 승리의 여신이 탄생했다는 것. 니케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승리의 여신으로, 영어 발음으로는 나이키(NIKE)다.
니케 석상은 로도스 섬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사모트라케가 승전기념을 위해 뱃머리의 장식용으로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니케가 밟고 있는 흰색 대리석은 로도스 섬에서 나온 것이고, 머리와 팔 부분은 처음 조각들이 발견됐을 당시부터 없었다고 했다. 한쪽 팔이 1950년 따로 발견됐지만 미완의 모습이 더 강렬한 인상을 준다는 게 중평이다. 이 작품은 헬레니즘(인간 중심의 그리스 사상)조각의 정수로 뽑히고 있다. 과도하게 뒤틀어진 여신의 몸은 오히려 균형을 유지해주고 날개의 각도, 바람이 불어 물에 젖은 천이 여신의 다리를 휘감고 있는 사실적 묘사는 여신이 하늘에서 내려와 뱃머리에 착륙하는 찰라를 잡은 것이라고 해서 더욱 더 극적인 인상을 준다.
눈치챘겠지만, 스포츠용품 회사로 유명한 나이키의 로고도 여기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나이키 창립 당시 회사를 상징할 로고를 찾던 동업자는 여대생에게 로고 디자인을 의뢰하고, 그 여대생은 여신 니케의 날개와 옷자락에 흐르는 선에서 영감을 받아 승리를 표현하는 V를 부드럽게 뉘어 나이키 로고를 만들었다고 한다. 여대생에게 35달러를 주고 구입한 디자인 로고가 현재는 1000억달러의 이상의 브랜드 가치를 발휘하고 있는 셈이다.
나폴레옹 황제의 대관식
다비드의 대작 〈나폴레옹의 황제 대관식〉은 1804년 파리 노트르담 성당에서 있었던 황제 대관식을 기록한 것으로, 자의건 타의건 그가 얼마나 나폴레옹에게 충성을 다했는가를 잘 증명해 보인다. 다비드는 황제의 대관식을 빛내기 위해, 그 자리에 있지도 않은 황제의 어머니 마담 메레를 정중앙의 의자에 앉은 모습으로 그려 넣었고, 병중이라 참석하지 못한 사람까지 그려 황제의 대관식에 쏠린 관심을 극대화했다. 바로 교황 옆에 서 있는 추기경 카프라라가 그 사람이다. 카프라라는 아파서 불참했다지만, 황제의 어머니가 불참한 것은 나폴레옹의 가정사 때문이었다고 한다. 나폴레옹 자신도 애가 둘이나 딸린 유부녀 조제핀을 유혹해서 결혼했으면서, 동생이 자신의 맘에 들지 않는 여자와 결혼하는 것에 노발대발해서 아예 대관식에 참석조차 못하게 했다. 나폴레옹의 어머니는 그런 형이 하도 괘씸해서 아들의 대관식에 안 간다고 고집을 피우고는 동생이 있는 로마로 떠나버렸던 것이다
조세핀 황후
'조세핀'은 1779년 '비콩 알렉산드르 드 보아르네'와 결혼하여 프랑스로 건너갔고, 같은해 에 코르시카 섬의 10살난 소년은 브리앵의 프랑스 군사학교에 입학하기 위해 프랑스로 갔다.
이 소년이 바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다.
보아르네와 조세핀의 결혼은 행복하지 못했고,1794년 프랑스혁명의 여파로 보아르네가 단두대에서 처형당하면서 둘의 결혼 생활은 끝이 났다.
'조세핀'과 '나폴레옹'이 처음 만난 것은 1795년, '나폴레옹'이 왕실 경호군의 공격을 받은 공화당 정부를 돕기 위해 파리로 왔을 때이다.
그랑 오달리스크
19세기 초 오리엔탈리즘의 주요 테마의 하나로 서양 회화에 등장했고 근대 나체화의 주요 주제가 되었다. 이미 카를로 반 로 등의 엑조티슴적인 회화에 사르타나(술탄의 소실)나 오달리스크가 그려졌으나, 이를 불후의 테마로 만든 작가는 앵그르Jean Auguste Dominique Ingres(1780~1867)이다. 그는 1814년과 1819년에 살롱에 출품한 <그랑 오달리스크>(루브르 미술관)를 비롯하여 여러 점의 오달리스크를 제작했다. 또한 들라크루아Eugene Delacroix (1798~1863), 르누아르Pierre Auguste Renoir (1841~1919), 마티스Henri Matisse(1869~1954) 등이 동일한 주제의 작품을 남겼다.
100여 명의 사람들이 물을 포도주로 만든 그리스도의 기적을 목격하고 있다.
그림의 중앙에 위치한 그리스도의 양 옆에는 성모 마리아와 사도들이 자리잡고 있다.
하지만 그리스도는 연회에 참석하고 있는 많은 손님들 속에 파묻혀 버린다.
종교적인 한 장면이 베네치아 도시에서 벌어지는 화려한 연회로 바뀐 것이다.
이 그림에서는 카를 5세, 프랑수아 1세, 술탄 솔리만 그리고 마리 튀도르와 같이
당대의 유명인사들을 찾아볼 수 있다.
베네치아 귀족의 연회에 활기를 불어 넣고 있는 악사들은
오른쪽부터 왼쪽 방향으로 티치아노, 틴토레토, 바사노 그리고 베로네세를 그린 것이다.
무대 장식에 대한 베로네세의 취향이 <가나의 결혼식>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이 엄청난 크기의 회화 작품은 <레비 가에서의 식사>에서처럼 받침대를 세워 만든 난간과
원주들로 구성된 풍부한 건축 장식을 배경으로 근사한 광경을 재현하고 있다.
결국 베네치아식의 호화로운 연회를 그리는 데 성서적인 주제를 구실 삼았던 것이다.
모나리자
모나리자는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피렌체의 부호 프란체스코 델 조콘다의 부인을 그린 초상화로 알려져 있다. 제작년도는 1503년~1506년. 유채(油彩) 패널화로 크기는 세로 77㎝, 가로 53㎝밖에 안된다. 루브르에서 처음 모나리자를 봤을 때 나는 실망했었다. 에게! 이렇게 작아? 유리는 또 왜 씌워져 있는 거야? 그 유리는 방탄유리라고 했다. 그만큼 진귀하다는 뜻이겠지. 하긴 모나리자가 대낮에 도난된 적이 있어 프랑스가 발칵 뒤집힌 적이 있다.
모나리자의 눈썹이 없는 이유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다. 당시에는 넓은 이마가 미인의 전형으로 여겨져 여성들 사이 눈썹을 뽑아버리는 일이 유행했기 때문이란 설, 작품 자체가 미완성이기 때문이라는 설, 원래 눈썹이 그려졌으나 복원 과정에서 지워졌다는 설 등등. 2009년에는 프랑스의 미술전문가가 240메가픽셀의 특수카메라를 사용하여 분석한 결과, 다빈치는 이 그림을 3차원으로 표현하기 위해 유약을 여러 겹 발라 특수처리했는데, 가장 바깥에 그려졌던 눈썹이 수백 년 세월이 흐르는 동안 화학반응을 일으켜 떨어져 나간 것이라는 주장을 제기했다.
눈썹과 상관없이 모나리자의 미소는 보는 이로 하여금 마음의 평화를 느끼게 한다. 어디에도 악한 기운이라고는 없다. 다빈치가 이 작품을 그리기 위해 악사와 광대를 불러 부인의 심기를 항상 즐겁게 했다더니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1830.7.28.)
1830년 7월,당시 프랑스의 왕 샤를 10세는 헌법에 따라 다스리자는 입헌 정치를 인정하지 않았어요.
그리고 프랑스 사람들이 대혁명을 통해 물리치고자 했던
과거의 비민주적인 제도들을 되살리려 했답니다.
국민들은 샤를 10세에 반대하며 선거를 통해 그들의 생각을 표현했어요.
그래서 진보적인 생각을 지닌 사람들을 많이 국회 의원으로 뽑았지요.
그러자 왕은 의회를 해산하고 말았어요.
국민들은 다시 한 번 자유를 위해 싸울 때가 되었다고 판단했어요.
그들은 27일 파리 시내에 바리케이드를 치고 군대와 맞섰답니다.
마침내 29일에는 왕궁을 빼앗고 군대를 물리칠 수 있었어요.
이 혁명 후 유럽에는 자유주의가 물결을 이루게 되지요.
들라크루아도 이 혁명의 한복판으로 뛰쳐나갔답니다.
그 체험이 그림이 되었던 것이지요.
화가가 민중 속에서 본 것은 민중을 압도하는 자유의 여신이었어요.
여신은 오른손에 혁명의 상징인 삼색기를,
왼손에 장총을 들고 바리케이드를 넘고 있지요.
이런 싱싱한 상상력이 낭만주의자인 화가의 태도를 잘 보여 준답니다.
여신과 시민들은 군대의 시체를 넘어 전진합니다.
실크 해트를 쓰고 나팔 총을 든 사나이는 화가 자신을 표현하고 있어요.
베레모를 쓴 노동자, 삼각모를 쓴 대학생, 권총을 양손에 든 떠돌이 소년은
모두 자유를 열망하는 시민들을 상징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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