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 교/ 각종 설교 모음

마음을 새롭게 그리고 감사를

미션(cmc) 2009. 1. 26. 20:41

'설교'마음을 새롭게 그리고 감사를 (롬12:1~2)

림택권 목사(아세아연합신학대학교 총장)


 

같은 사건을 접하는데도 이 사건을 보고 해석하는 견해는 여러 가지로 나타납니다. 날 때부터 소경된 사람을 본 제자들은 이 사실이 누구의 죄로 인한 것인가에 관심이 있었고 주님의 마음은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이 나타남에 초점이 있었습니다. (요9:1~3) 주님의 발에 비싼 향유를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 분의 발을 씻는 일을 보고 차라리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는 것이 좋겠다는 견해를 듣고 주님은 저를 가만 두어 나의 장례 할 날을 위해 준비케하라고 말씀 하셨습니다.(요12:1~8)



형님이 받은 유업이 마땅치 않아 그 문제를 시정토록 요청하는 한 젊은이에게 주님은 외면하시고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고 동문서답하셨습니다.(눅12:13~21)


이처럼 나타난 인간의 사건들은 그것을 보는 눈에 따라 그 의미가 달라지고 그로 인해 기쁨이 되거나 슬픔이되기도 합니다. 믿음의 눈으로 보는 분의 세상사와 하나님 없이 스스로 자신의 삶을 지탱하는 분들의 눈에 나타나는 세상사는 하늘과 땅의 차이만큼 엄청나게 달라집니다. 그래서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케 하자(고후10:5)고 당부합니다. 마음을 새롭게 하므로 변화를 받는 일(롬12:2)은 믿는 자들의 첫걸음이고 근본 바탕입니다. 사고방식의 변화, 생각하는 방향이 그리스도의 지배를 받는 일이 실은 신앙생활이며 그리스도인의 마음입니다. 그래서 감사(Thank)하는 일은 생각(Think)에서부터 시작됩니다. 바울사도의 기도는 이 추수감사 계절에 함께 드릴 기도인줄 믿습니다 내가 기도하노라, 우리 사랑을 지식과 모두 총명으로 점점더 풍성하게 하소서.. (빌1:9)




첫째, 모든 사람이 모두 나를 다 좋아하거나 내 의견에 동의하는 것이 아님을 깨달아야합니다. 실은 그 반대로 삶의 목적이 뚜렷한 사람일수록, 그것도 그 목적이 자신의 유익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의 선을 위한 것일 수록 억센 반대에 부딪히게 됩니다. 인류 역사가운데서 주님만큼 그 분을 지지하는 사람과 반대하는 무리들간에 뚜렷한 선이 그어진 분은 없을 것입니다. 그분께서 반대나 배척을 당한 이유는 주님의 하시는 일이 나쁘거나 그분 자신이 옳지 못해서 그런 것은 아닙니다. 어떤 분의 말대로 모든 사람에게서 칭찬을 들으려는 사람은 자기 얼굴에 가면을 쓴 광대일 뿐이다. 이 말은 다시 한번 되새겨 볼일입니다. 그런데 얼마나 많은 사람이 사람들에게 좋게 하고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려 하는가?(갈1:10) 모 든 사람에게서 인정받으려는 욕망으로 인하여 마음에서 진정한 감사를 빼앗기고 있습니까?



어째서 하나님께서는 40세 젊고 의에 불타는 모세에게 일거리를 주시지 않고 80세가 되었을 때 부르셔서 출애굽의 사명을 주셨을까요? 하나님께서는 젊은 일군을 싫어하신다는 뜻일까요? 여러 가지로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얻을 수 있을 것이나 우리는 짧은 표현에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모세는 ....어떤 애굽사람이 어떤 히브리사람 곧 자기 형제를 치는 것을 본지라. 좌우로 살펴 사람이 없음을 보고그 애굽사람을 쳐죽여 모래에 감추니라(출2:11,12), 자기 행동의 정당여부를 사람의 평가에 두려는 모세를 하나님께서는 40년간이나 훈련시키셨습니다. 이 인간평가 절대주의을 시정하기까지 모세의 경우 40년이나 걸렸으니 이 사고 방식이 얼마나 우리에게서 진정한 삶에의 감사를 빼앗는지 모릅니다.



둘째, 의롭게 산다고 해서 이 세상에서는 모두 상급을 받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고난의 길을 걷기도 됩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삶이라고 해서 결코 고난이 면제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두가지 방법으로 인도하십니다. 하나는 우리를 고난가운데서 빠지지 않도록 보호해 주시는 방법입니다. 어려운 상황에서 피하도록 비켜가게 하시는 방법입니다. 바울사도와 바나바가 첫 선교사역으로 비시리아지역 안디옥에 갔을 때 유대인들이 경건한 귀부인들과 그 성에 유격자들을 선동하여 두분을 핍박케 하여 그 지경에서 쫓아내니... 발에 티끌을 떨어 버리고 그곳을 떠났습니다(행13:50) 그리고 이고니온에 가서 복음을 전했지만 이방인과 유대인과 그 관원들이 두 사도를 능욕하며 돌로 치려고 달려 들었으나 저희가 알고 도망하였다. (행14:5,6)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고난에서 피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루스드라에 갔을 때에는 안디옥과 이고니온에서 온 유대인들이 무리를 오인하여 돌로 바울을 쳐서 죽은 줄로 알고 성밖으로 끌어 내쳤다(행14:19). 이 경우 하나님의 인도하심은 바울을 역경에서 피하게 하신 것이 아니라 역경을 통과토록용기를 주셨습니다. 훗날 바울사도는 이두가지 인도하시는 방법을 회상하면서 주께서 이 모든 것 가운데서나를 건지셨다 (딤후3:11)고 고백합니다.



오늘날 얼마나 많은 교인들이 약삭빠른 계산으로 고난에서 면제되는 하나님의 인도하심만을 간구하다가 고난에 처할 때 하나님의 인도하시는 두 번째 방법은 모르고 당황하고 원망하고 심지어 하나님 품에서 떠나기 까지 하지 않습니까! 이 비켜가기 절대주의에 익숙한 현대인의 사고방식으로는 지금 당하는 경제 위기 속에서는 진정한 삶에의 감사를 드리지 못합니다.



셋째, 많을수록 행복하다는 사고는 삶에의 감사를 빼앗아 갑니다. 물론 가난을 예찬하는 기독교가 아닙니다. 교회는 바른소리를 외칠 때가 되었습니다. 아니 이미 늦은 지도 모릅니다. 우리말 가운데 있다는 낱말은 소유와 존재를 모두 뜻합니다. 내가 집에 있다고 할 때에는 존재를 지칭하고, 자동차가 있다라는 표현에서는 소유를 뜻합니다. 엄연히 소유와 존재는 별개의 것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같은 낱말을 씁니다. 아마 이런 연유에서인지 우리에겐 소유가 많아야 존재가치 (살맛이 난다)가 있다는 사고가 더 만연한 민족성입니다.


성경에도 이런 인물이 등장합니다. 어떤 날 무리 중에 한 사람이 선생님, 내 형을 명하여 유업을 나와 나누게 하소서하고 청합니다. 이때 주님께서는 이 사람아! 누가 나를 너희의 재판장이나 물건 나누는 자로 세웠느냐?고 하신 후 ...사람의 생명(존재)이 그 소유의 넉넉한데 있지 않다.(눅12:13~15)고 하셨습니다.


이 소유와 존재의 관계를 분명히 하고 살아가는 사고방식 속에서는 아주 평범한 경우에도 삶에의 감사를 느낍니다.




끝으로 어떤 경우에나 감사를 드릴 대상은 하나님뿐이십니다. 한국 교회처럼 감사장, 감사패를 많이 그리고 멋지게 만들어 증정하는 경우는 많지 않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음에도 엄청난 표현으로 감사패를 주고 받을 때에 어리둥절해집니다. 열심히 주님을 섬기고 이웃을 돕고 교회를 위한 분들에게 집사님은 다른 분들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집사님이 아니라 오직 집사님과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입니다.(고전15:10)라는 칭찬의 글을 새긴 감사패는 더 멋질 것입니다. 우리는 엄청난 불행을 당한 성도께서 그런 상황에서도 하나님께 감사하는 간증을 듣습니다. 이런 분들의 모습에서 다시 한번 범사에 감사하라(살전5:18)는 말씀의 뜻을 깨닫고 옷깃을 여밉니다. 교통사고를 당했을 때에도 감사해야 합니다. 그러나 감사의 대상은 결코 교통사고 그 자체가 아니라 그런 경우에도 감사를 받으실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범사를 감사하자가 아니라범사에 감사하라(give thanks in all circumatanies)"고 합니다. 감사하는 삶은 바른 사고에서 시작됩니다. Thank는 Think에서 유래했으니까요. 그래서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께 복종케하시는 주님께 이 금년 감사절에도 무릎을 끓고 이미 받은 은혜를 헤아려 보는 일은 큰 축복입니다.




풍랑 만나 조난 당한 그 분은 구사일생으로 널조각에 의존해 어떤 외딴섬에 도착했습니다. 아무도 살지 않는 이 섬에서 하루하루 생명을 유지하며 섬 근처를 지나가는 선박이 나타나길 기다립니다. 하루, 이틀... 이날도 나무조각등으로 엉성하게 만든 거처를 떠나 먹을 것을 찾아 나섰습니다. 몇시간후 지치고 절망된 몸으로 움막집을 향해 돌아오는데 느닷없이 떠오르는 연기를 보고 놀라 거처를 향해 달려갑니다. 설상가상으로 거적떼기 움막처가 어찌된 연고인지 불에 타고 있었습니다. 그만 주저 앉아 허기진 채 망망한 수평선을 바라볼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어찌된 일입니까? 눈길 닿는 먼 곳에서 한 점 같은 물체가 보일 듯 말듯하더니 점점 가까이 다가옵니다. 그처럼 기다리던 배가 오는 것입니다. 기어가다 싶이 물가로 달려가며 도와달라고 손을 휘저으며 소리칩니다.




조난 이후 재산목록 1호이다 싶이한 움막집이 불에 타는 절망 속에서 이 사건은 감사의 연유가 된 것입니다. 멀리 항해하던 선원이 피어오르는 연기를 보고 사람이 거처하는것같아 다가오고 있었으니 말입니다. 인간의 절망은 하나님 뵙는 응접실이 되기도 합니다. 사고방식의 새로운 변화는 절망의 연기 건너편 그곳에 머무는 도움의 손길을 보기도 합니다. 그리고 감사를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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