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 교/ 각종 설교 모음

새날의 양식을 위하여

미션(cmc) 2009. 1. 26. 20:55

'지상설교'새날의 양식을 위하여
마태복음 6:9-13

이세용 목사(안산반월교회)


 

성도들의 신앙생활에서 차지하는 기도의 비중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입니다. 기도는 하나님과 사람과의 사이를 맺어주는 연결점이요, 하나님의 역사가 인간의 삶의 현장에 이루어지는 은혜와 축복의 성취장(成就場)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기도와 기도 생활에 대해서 깊은 관심을 가지고 바로 행하며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역사를 우리의 삶 속에 충만하게 이루는 역동적인 성도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성도들이 교회에 들어와서 가장 많이 외우는 것 중에 하나가 아마도 「주기도문」일 것입니다. 왜 우리 성도들은 이 주기도문을 그렇게 힘써 외워야 하고 배워야 하고 행하여야 합니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기도의 모본으로 가르쳐 주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다른 것도 가르치실 것이 많은데 특별히 기도에 관하여 이렇게 세세한 모범답안을 가르쳐 주셔야 하셨을까요? 기도란 우리의 신앙생활 중에서 매우 귀중한 역할을 하는 만큼 잘못될 가능성도 아주 높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가 본 본문의 말씀은 눅 11장에도 나오는데 제자들이 예수님의 기도하시는 모습을 보고 『주여 세례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기도하기를 가르쳐준 것 같이 우리에게도 가르쳐 주옵소서』라고 청원하였을 때 그러면 『너희도 이렇게 기도하라』하고 가르쳐 주신 것이 곧 주기도문입니다.


주기도문의 내용은 크게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처음 세가지의 기도는 하나님께 대한 청원이요, 다음 세가지의 기도는 우리 생활의 관심사에 대한 청원입니다. 자세히 보면 그 형태가 꼭 십계명의 구조와 흡사합니다. 이중에서도 우리의 일상생활에 관한 세 가지의 내용을 보면 11절의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와 12절의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와 13절의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하는 것들입니다. 그 의미는 육신의 물질생활을 위해서도 기도하라는 것과 하나님 앞에서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위해서도 기도하라는 것과 우리의 처신에 관해서도 하나님께 기도하라는 자상하신 가르치심입니다.


이 중에서도 우리의 매일매일의 생활에 관련하여 가장 큰 관심을 집중시키는 것은 바로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라는 항목입니다. 왜 우리 주님께서는 그 고상하신 기도를 가르쳐 주시면서 하필이면 우리의 문제들 중에 제일 차원이 낮은 「먹고 사는 것」에 대해 기도하라 하셨을까요? 신 8:3 하반절에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이라고 하셨지 않습니까?


이 문제에 대하여 우리는 주님의 뜻을 주의 깊게 살펴 그 뜻을 바르게 이루어야 합니다. 주님께서 일용할 양식을 위한 시도를 요구하신 몇가지 의미를 살펴봅시다.


첫째 주님은 우리가 육신의 양식을 위하여 물질을 구하는 기도까지도 요구하신다는 것입니다. 옛날 그리이스의 철학에서나 동양의 사상들에서는 대개 영혼과 육신을 이원론적으로 분리해 영혼은 고귀하나 육신은 비천하고 차원이 낮은 것으로 여겼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육신을 위하여 구하거나 원하는 것은 천한 일이라고 무시하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이러한 때에 예수님께서 『일용할 양식』, 즉 물질을 위해서도 기도하라 하심은 『엄청난 사상의 전환』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인간의 존재문제를 근본적으로 새롭게 보는 시각의 대 변혁이요 파격입니다. 우리의 영혼이 귀하다면 우리의 육신도 똑같이 귀하다는 진리를 새삼스럽게 일깨워 주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바로 이 점을 이해하면서 고전 3:16에 『너희 몸은 하나님이 거하시는 거룩한 전』이라고 제시합니다.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하여 주일을 거룩하게 지키는 것도 중요하지만 엿새동안 세상에서 육신생활을 위해 열심히 살아가는 것도 똑같이 중요함을 가르쳐 주시는 교훈입니다.


둘째 주님은 우리가 육신의 양식을 구하는 데 있어서도 매일같이 기도하기를 요구하신다는 것입니다. 왜 주님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한 평생 먹고 살 양식을 한꺼번에 구하라 하지 아니하시고 째째하게(?) 하루하루의 일용할 것만을 구하라 하셨을까요? 통 크게 왕창 구해서 크게 받고 평생을 편안하게 살게 되면 좋으련만, 매일 같이 하나님께 매달려 괴롭히지 않아도 되고. 만일 이런 경우가 허락된다면 우리 인생들은 그것들을 가지고 증권시장으로, 부동산 투기 현장으로, 백화점 세일장으로, 경마장으로 눈이 벌개서 달려갈 것입니다. 그것도 주일에.


만일 이런 경우가 허락된다면 우리 성도들도 물질에 관한한 평생에 쓸 것을 다 받았으니 하나님께 더 구할 것도 없고 감사할 것도 없고 관계를 지속할 아무런 이유가 없으니 자연스럽게 하나님과 멀어지게 될 것이고 곧 관계는 끊어지고 말 것입니다. 만일 이런 경우가 허락된다면 우리의 인식구조가 바뀌어 버리고 그러면 우리 인생의 삶 자체가 망가질 지도 모릅니다. 큰 것을 받은 사람의 마음이 작은 것에 대해 귀하게 여길 줄 알겠습니까? 대개 큰 것을 갖게 되면 사행심 투기심에 붙들려 작은 것을 우습게 보기 쉽습니다. 작은 것 무시하는 사람은 반드시 망합니다. 따라서 주님은 주님 자신보다는 우리 자신을 위하여 오히려 매일매일 기도하고 하나님을 의지하라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곧 만나의 원리 입니다.


셋째 주님은 우리가 비록 육신의 양식을 위하여 구하는데 있어서도 결코 거절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11절의 「일용할 양식」은 성경의 난외주기(欄外註記)에 무엇으로 되어 있는고 하니 「내일의 양식」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원어에는 「에피우시온」이라고 되어 있는데 묘하게도 주기도문 외에는 다른 곳에 없는 희귀단어라, 그래서 이 낱말을 연구하느라고 지금까지 수많은 학자들의 머리를 희게 만든 말입니다. 20세기에 들어서서 엔게디 사막, 사해 동굴 등에서 귀중한 문서들이 속속 발견되어졌는데 여기에서 바로 그 「일용할」이라는 「에피우시온」이란 말의 뜻이 선명하게 밝혀지게 되었습니다. 그 뜻은 다음과 같습니다.


(1)하루치의, 하루에 쓸 것 (2)하루 생존에 필요한 것 (3)새날에 쓸 것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에 우리가 새롭게 발견한 내용이 바로 「새날에 쓸 것」이라는말입니다. 새날이라면 곧 다가오는 날을 말합니다.


우리가 새벽에 일어나 기도할 때 이제 곧 밝아오는 새날의 모든 일을 앞두고 생각하면 당장 오늘 해결받아야 할 일들이 해결되지 않고 미진한 상태로 남아 우울하고 답답한 마음으로 하루를 시작하는 때가 한두번이 아니지요. 사업이 풀릴 듯 풀릴 듯 하면서 풀리지 않고, 직장에서의 일도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괴로울 때, 가정의 일도 뜻대로 이루어지지 아니할 때, 다가오는 새날, 그날의 문제를 위해 기도하라 하시는 것입니다.


묘하게도 주님은 바로 그 직전에야 기도를 들으셔서 새날에 가서 겨우 해결하는 체험을 할 경우가 많습니다. 참으로 아슬아슬한 삶의 상황이요 초조와 불안이 기쁨과 감격으로 교차되는 장면을 연출할 때가 한두번이 아닙니다. 누구든지 앉아서 평안하게 복받기 원하지 이렇게 아슬아슬하게 위기일발로 복받기 원하겠습니까? 그러나 어쩝니까? 하나님께서 설정해 놓으신 상황인 것을!


오늘날 아직도 우리 주변에는 여전히 한탕주의적 신앙으로 큰 것만 바라며 사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비록 아슬아슬하기는 하지만 새날의 양식을 위하여 조금씩 매일매일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만족하여 감사하는 성도를 하나님은 오늘도 기뻐하시며 살펴 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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