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 교/ 각종 설교 모음

네가 낫고자 하느냐

미션(cmc) 2009. 1. 26. 20:59

'지상설교'네가 낫고자 하느냐(요한복음 5:1-9절 상반절)

이문희 목사(서울 광천교회)


 

태초부터 물음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던지시는 물음입니다. 범죄 후 동산 나무 뒤에 숨어 있는 아담에게 하나님은 『아담아 네가 어디에 있느냐?』라고 물으셨습니다. 동생 아벨을 죽인 후 들판을 배회하는 가인에게 하나님은 『가인아 네 동생 아벨이 어디있느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 사라에게 쫓겨 광야에서 울며 헤매는 하갈에게 하나님은 『네가 어디로 와서 어디로 가며 왜 울고 있느냐?』고 대답을 구하셨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성경에서 여러차례 우리에게 질문을 던지십니다. 그러나 이 물음은 인간들의 그것처럼 무지해서 하신 것이 결코 아닙니다. 아담이 어디 있는지 몰라서 숨바꼭질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가인이 동생 아벨을 죽인 줄 몰라서 던진 질문이 아니요, 하갈이 왜 울고 있는지 몰라서 묻는 물음이 결코 아닙니다.


하나님의 물으심은 인간실존을 향해 던지는 질문입니다. 지난해 교역자들과 함께 속초에 세미나를 갔다가 하루 시간을 내어 바닷가를 거닐었습니다. 마침 멸치새끼 몇마리가 파도에 떠밀려 모래사장에 올라와 버둥거리고 있었습니다. 살겠다고 버둥대면 댈수록 온몸에 모래로 칠갑을 합니다. 지친 듯 눈만 껌뻑거리는 멸치를 볼 때 안타까운 마음이 솟았습니다. 미물이지만 마땅히 있어야 할 곳에서 벗어나 죽음의 자리에서 고통당하는 것을 보며 인간도 자신의 자리를 찾지 못한다면 같은 처지에 빠질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은 물으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물음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의 초청으로 구체화됩니다. 오늘은 그 가운데 38년된 병자에게 던지신 물음을 중심으로 교훈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본문에는 명절에 있었던 한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성경학자들에 의하면 예루살렘 인구가 5만명 정도인데 명절이 되면 성지순례차 온 사람들까지 20만명에 이른다고 합니다. 예루살렘은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고 순식간에 축제의 장소로 변했습니다. 감사와 기쁨의 시간이 이어졌습니다. 이때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오시어 양문 곁에 있는 베데스다라고 불리는 못을 찾으셨습니다. 여기 「베데스다」라는 말은 자비의 집, 은혜의 집이란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바로 이 집을 찾으신 것입니다.


3절에서 5절 말씀을 보면, 그 집에는 병자, 소경, 절뚝발이, 혈기 마른 자들이 가득 차 있었습니다. 은혜의 집, 베데스다는 은혜로 충만한 사람들, 감격하며 기뻐하는 사람들로 가득차 있어야 할 터인데 놀랍게도 그곳엔 죽지 못해 사는 사람들로 신음하고 있었습니다. 아이러니입니다.


오늘의 베데스다가 어디입니까? 가장 자비로와야 하는 곳, 마땅히 그러해야만 하는 곳, 바로 우리 성도들이 모인 곳일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눈에 비친 우리의 모습은 어떠할까요? 겉으로는 순례자의 열심으로 충만한 것 같으나 한구석엔 육적으로 병들고 영적으로 병들어 고통당하고 있는 예루살렘의 모습은 아닐까요? 눈은 떴으나 보지 못하고 귀는 열렸으나 듣지 못하고 다리는 성하나 걷지 못하는….


수많은 병자 가운데 주님은 38년된 병자를 보셨습니다. 그는 물이 동할 때 그 못에 제일 먼저 뛰어들면 어떤 병이라도 낫는다는 전설을 매우 잘 알고 있었지만 엉뚱한 곳에 자리하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 속사람은 죽지 못해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세월이 흐를수록 가슴은 싸늘하게 식어가고 은혜나 자비와는 상관이 없었습니다.


이때 주께서 물으셨습니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 이것이 어찌 단순히 육체의 질병에 대한 물음이겠습니까? 낫기 싫은데 왜 38년 동안이나 물이 동하기를 기다리고 있었겠습니까? 이 질문은 베데스다란 못의 이름을 염두하고 던지신 질문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네가 은혜를 원하느냐? 은혜의 집에서 진정한 은혜를 체험하기를 원하느냐?라는 질문입니다.


은혜는 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에게 거저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아무리 보아도 받을 자격이 없는 38년된 병자, 믿음과 상관없이 행위로, 자신의 노력으로 물이 동할 때 제일 먼저 뛰어들어가기만을 기다려온 사람입니다. 38년이라는 경력과 자신의 의로 가득차 있는 사람입니다. 주님은 네가 낫고자 하느냐?라는 물음으로 그 모든 것을 깨어 부수기를 원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구원의 초청이요 이대로 가면 안된다는 경고의 메시지입니다.


38년된 병자는 바로 나일수 있습니다. 어느날 새벽 이 본문을 묵상하다가 저는 38년된 병자를 통해 제 모습을 보았습니다. 가장 중요한 위치에 있는 담임목사, 성경도 교리도 헌법도 예배순서도 예식절차도, 기도 방법이나 전도 방법도 모르는 것 없는데 정작 내 가슴 속엔 어린 아이 같은 순진함도, 처음 구원받았을 때의 감격도 나도 모르는 사이에 다 식어져 가고 있었습니다. 천국을 외치지만 감격이 없고 지옥을 외치며 심판을 설교하지만 정작 두려움이 없습니다. 신앙행위는 있는데 내용이 없습니다. 저는 그날 새벽 드러난 내 자신의 모습 앞에 형언할 수 없는 눈물이 솟구침을 느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람은 우리의 외모를 봅니다. 직분이라는 껍데기를 보고 나의 이력서를 보고 판단하기를 좋아합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우리의 중심을 보십니다. 속일 수 없는 나의 실존을 보십니다. 여러분은 누구입니까? 여러분의 심령은 베데스다입니까? 혹 죽지 못해 삽니까? 직분의 탈을 쓰고 오늘도 예배당에서 연기하다가 지친 모습으로 갑니까?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나를 나보다 더 잘아시는 주께서 물으십니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 수고로운 짐을 지고 감격도 없는 예배에 길들여져 있는 우리들을 향해, 복음 안에서 자유하며 무엇인가를 해야 한다는 중압감에 비틀거리는 우리들에게 주께서 물으십니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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