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규현 목사 (광주중앙교회)
“기대하지 않은 하나님” 벧후 1:1-11
좁은 길에서 만난 뜻밖의 축복 하나님 향한 나의 기대 바꾸면 새로운 하나님의 뜻 발견해 어느 시골 처녀가 서울에 대한 기대를 안고 상경을 했습니다. 공장에서 열심히 일했고 건실한 남자를 만나 결혼을 했습니다. 이제는 조금만 있으면 드디어 편안한 생활을 할 것이라 기대했습니다. 그런데 얼마 못가서 남편이 사고가 나서 일생 동안 자기가 일해서 먹고 살아야 되었습니다. 이 처녀의 삶은 불행할까요? 앞으로 이 처녀는 어디에서 행복을 찾을 수 있을까요? 우리의 삶 속에서도 이러한 일이 많이 일어납니다.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왜 하나님은 내게 이러한 고난을 허락하시는지 몰라 원망할 때도 있습니다. 이와 비슷한 사람이 본문의 베드로입니다. 그는 고기를 잡다가 예수님께 불림을 받았습니다. 3년여 동안 예수님을 좇으며 기적과 말씀의 권능을 보았습니다. 드디어 그는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고백을 하고 예수님께 칭찬을 듣습니다. 마가의 다락방에서는 제자들과 서로 누가 크냐고 논쟁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는 다른 제자들과 마찬가지로 예수님이야말로 자기가 원하는 것을 충족시켜주실 분으로 알았습니다. 그 분이 이스라엘의 왕이 될 때는 나도 높은 자리를 차지할 수 있다는 기대를 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기대는 무너지게 됩니다. 유월절날 밤 예수님은 잡히고 모든 것이 끝난 것처럼 보였습니다. 결국 그는 작은 소녀 앞에서 그토록 따르던 예수님을 부인하게 됩니다. 또한 그는 요한과 함께 예수님의 빈무덤을 보았습니다. 다시 갈릴리 바닷가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았을 때 예수님은 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젊어서는 네가 스스로 띠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원치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그 후의 삶은 오직 주의 말씀을 증거하고 고난당하는 과정이었습니다. 물론 이러한 삶이 그가 처음에 기대했던 삶은 아니었습니다. 이러한 베드로가 인생의 거의 마지막에 쓴 글이 베드로후서입니다. 1장 2절에 보면 “예수를 앎으로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지어다”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앎으로”라고 말하는 것은 베드로가 처음 믿을 때 예수님을 알았던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처음에 베드로가 주님을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하였으나 그것이 무슨 뜻인지는 잘 알지 못했고 살아가면서 점점 알아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더욱 알아가면서 점점 은혜도 커지고 평강도 커졌다는 의미입니다. 우리가 처음 예수님을 영접하게 되면 예수님에 대한 기대를 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나를 사랑하시고, 내 기도를 들어주시며, 내게 복을 주시리라고 기대합니다. 그래서 내 인생길의 모든 것이 다 잘되리라고 기대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모르는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나를 사랑하시고, 어떻게 내 기도를 들어주시고, 어떻게 복을 주실 지는 모르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내 기대대로 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그럴 때면 “아니 하나님은 나를 버리셨나? 나를 사랑하지 않으시나? 내가 믿는 하나님이 과연 전능하신 하나님이 아니신가?” 하는 의심을 하기도 하고 심지어는 “혹시 하나님은 안 계신 것은 아닌가?”라는 생각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가 자기의 체험을 통해서 나의 인생길에서 내가 원하지 않는 길을 가게 될 때마다 새롭게 하나님을 알게 된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나의 기대대로 움직여주지 않습니다. 내가 원하는 기도의 응답을 하지 않으십니다. 정말 가기 싫어하는 길을 가게 하십니다. 그때마다 좌절과 노여움, 불만을 가지게 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오히려 그러한 인생의 시련기를 통해서 나의 품성과 삶이 변하게 되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면서 내가 살아온 삶을 뒤돌아볼 때 드디어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을 비로소 알게 됩니다.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목적은 나를 신의 성품에 참여케 하는 것이구나"라는 것을 드디어 이해하게 됩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의 목적을 알게 되면 이제는 나의 인생에 시련과 아픔이 오더라도 이것이 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란 것을 알기 때문에 오히려 은혜와 평강을 누릴 수 있습니다. 우리는 신의 성품에 참여한다는 것은 좋아합니다. 그러나 그 과정은 원치 않습니다. 처음 예수님을 믿을 때 그런 과정은 대개 기대하지 않습니다. 한 어린 아이가 막 뛰어갑니다. 달리다가 돌에 걸려 탁 넘어집니다. 그는 엄마가 안아주기를 기대하면서 넘어진 채로 엄마를 쳐다봅니다. 그러나 현명한 엄마는 그 아이가 자기 힘으로 일어나기를 원합니다. 엄마는 아이를 위해서 배려한 것이지만 아이는 엄마를 향한 노여운 감정을 갖게 됩니다. 그러나 나중에 그가 커서 그때의 엄마의 사랑을 이해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사랑도 이러한 것입니다. 단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우리의 환경을 통하여 “기대하지 않은 하나님”을 만날 때 하나님의 뜻 안에서 “우리의 기대”를 바꾸는 것입니다. 여기에 성공한 사람은 신의 성품에 참여케 됩니다. 천국을 체험하게 됩니다. 그렇지 못할 때에는 하나님께 대한 노여움을 가슴에 안고 이 땅에서 고통과 탄식의 삶을 살게 됩니다. 앞에서 말한 시골 처녀를 기억하십니까? 그 시골처녀는 새로운 환경 속에서 자기의 기대를 얼마나 바꾸느냐에 따라 자기의 행복이 결정됩니다. 그냥 마음을 고쳐먹는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그녀 앞에 놓인 삶은 그녀가 바랐던 장밋빛 인생은 아니지만 그 속에 있는 하나님의 숨은 뜻을 찾기 위해 노력한다면 그녀도 얼마든지 행복해질 수 있습니다. 어느 자매가 미군 장교와 결혼했습니다. 신혼 초에 그녀는 행복한 미래를 꿈꾸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남편이 아리조나 사막 한가운데 있는 기지로 발령이 났습니다. 이사를 간 후에 주변을 보니까 어디를 보아도 황량한 사막 한 복판이었습니다. 전혀 그녀가 기대했던 환경이 아니었습니다. 처음에 그녀는 하나님을 원망하며 무료함과 답답함만 느끼며 지루하게 하루하루를 보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는 혹시 여기에도 자기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때부터 주변도 살펴보며 관찰을 시작했습니다. 그토록 황량하던 사막에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동식물들이 서식한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녀는 사막의 환경에 대한 공부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몇 년 뒤에 남편이 다시 새로운 임지로 떠나게 되었을 때 그녀는 이미 사막의 동식물에 대한 전문가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녀는 사막의 동식물에 관한 강의도 하게 되었습니다. 만일 그녀가 사막에서 사는 몇 년동안 그저 하나님만 원망하고 살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아마도 알콜중독자나 이혼녀가 되어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곳이 비록 자기가 원하는 환경이 아니었지만 새롭게 하나님의 뜻을 알기를 원했을 때 그녀는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의 뜻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신앙생활의 길목에서 기대하지 않았던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그럴 때마다 하나님을 향한 나의 기대를 바꾸면 그때까지 내가 알지 못했던 새로운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그러한 전환점을 돌아서 나는 점점 신의 성품에 참여하게 됩니다. 이 길로 처음 들어설 때는 “좁고 협착한 길”이지만 가다가 뒤돌아보면 그 길은 “축복의 길”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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