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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일어나 함께 갑시다 영적 무기력에 빠진 오늘, 생명 에너지 충전해야
밤과 낮은 하나님께서 시간을 구별해 놓으신 창조의 원리입니다. 그 창조의 원리 속에 인간의 잠도 있고 또 깨어남도 있습니다. 인간에게 잠은 꼭 필요한 것이지만 잠은 자야할 때가 있고 또 깨야 할 때가 따로 있습니다. 오늘 겟세마네 동산의 사건의 심각성은 바로 제자들이 잠이 들어서는 안 될 시간에 깊이 잠이 들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베드로에게 친히 다가오셔서 “시몬아 자느냐? 한시동안도 나와 깨어 있을 수 없더냐?”라고 물으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이 물음의 의미를 다 헤아릴 수는 없지만 주님의 심정은 대략 이해 할 수는 있습니다. 성경을 보면 “주님께서 심히 놀라시며 슬퍼하셨다”라고 기록하고 계십니다(33절). 또 히브리서 기자는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다(히5:7)”고 기록하고 계십니다. 지금 예수님은 인류를 구원하시고자 그 죗값을 대속하시기 위하여 십자가의 고난 앞에서 생사를 건 처절한 기도를 하고 계신 중입니다. 그러면서 주님은 제자들에게 함께 기도할 것을 당부하셨습니다. 그것은 주님의 십자가의 사명이 너무도 무겁고 힘이 드셔서 제자들에게 기도의 지원을 요청하셨는지, 아니면 이제 곧 제자들에게 시작될 시험과 죄의 유혹을 대비토록 하심인지, 주님의 그 깊은 뜻은 잘 알 수 없지만 주님은 분명 제자들에게 깨어 기도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때에 만일 베드로가 예수님의 수제자라고 한다면 그는 분명 이럴 때 예수님의 심정을 함께 공유 했어야 하며 아픔도 함께 나눌 수 있어야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때에 제자들이 보여준 반응은 무정한 저들의 잠이었습니다. 이것은 철저히 주님의 기대를 저버린 제자들의 행동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인간의 잠이란 생리적인 현상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잠은 인간에게 매우 필요한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잠은 자야할 때가 따로 있고 깨어야 할 때가 따로 있는 것입니다. 사람이 자야할 때 자지 못하는 것도 문제이지만, 깨어야 할 때 깨지 못하는 것도 심각한 문제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오늘 제자들이 주님이 그토록 필요로 하셨던 그 절박한 시간에 잠시도 주님과 함께 깨어 있지 못하고 있었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무엇이 저들로 하여금 그 토록 정신없이 잠을 자게 한 것입니까? 그 원인에 대하여 오늘 본문(40절)에서는 “저들의 눈이 심히 피곤함” 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제자들을 이 참담한 모습으로 끌고 간 저들의 피곤함은 도대체 어떤 피곤이었을 까요? 보통 사람들은 피곤을 말할 때 ‘정신적인 피곤’과 ‘육체적인 피곤’을 말할 수 있는 데, 당시 제자들의 피곤은 과연 어떤 것이었을까요? 분명 예수님께서도 우리와 같은 육체를 가지셨던 분이십니다. 그러나,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제자들보다 더 많은 시간동안 더 많은 일들을 하시고도 지금 밤새워 땀방울이 핏빛으로 변하도록 집중된 기도를 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그렇다고 한다면 지금 제자들을 짓누르고 있는 피곤의 정체는 무엇입니까? 사람들은 종종 피곤하다는 말들을 잘합니다. 그리고 많은 목회자들도 늘 피곤에 지쳐 있습니다. 일이 많아서 피곤할 수도 있고 잠이 부족해서 피곤할 수도 있고 또 많은 스트레스로 인하여 피곤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보다 더 심각한 문제는 주님 곁에 있으면서도 자신들의 사명을 인식하지 못함으로 인하여 오는 피곤함입니다. 영적에너지가 고갈됨으로 오는 피곤함입니다. 가슴 깊이 십자가의 정신이 없기 때문에 오는 피곤함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 중요하고도 절박한 시간에 그토록 습관처럼 잠들 수가 있었습니다. 이런 이들은 당시의 제자들뿐만이 아니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주님을 따르는 제자의 길은 먼저 주님과 함께 십자가를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십자가가 없는 신앙생활과 십자가 없는 사명의 길은 철저히 거짓입니다. 그래서 늘 피곤하고 그래서 늘 지쳐있다고 말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것은 일이 많아서가 아니라 영적 에너지가 없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예수님께서 “시몬아 자느냐?”라고 물으신 것은 영적에너지가 고갈되고 영적 자아를 상실한 제자 베드로의 모습을 보시면서 그 영적 잠에서 깨어나도록 부르시는 부르심이었을는지도 모릅니다. 겉으로는 주님을 따르고 또 형식적으로는 주님을 좇아 산에도 올라 왔지만 영적에너지를 상실하고 깊이 잠들어 있는 베드로를 깨우심이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어쩌면 예수님께서는 베드로를 향하여 “오늘밤 네가 닭 울기 전에 나를 세 번 부인하리라”고 말씀 하셨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왜 하필 예수님께서는 그 많은 세상의 소리들 중에 닭의 울음소리를 베드로에게 들려 주셨겠습니까? 닭은 새벽을 깨우는 동물입니다. 닭은 잠을 깨우는 동물입니다. 일어나야 할 시간이 되었음을 알리는 동물입니다. 필경 영적 잠을 자는 베드로에게 베드로야! 잠을 깨어라. 그 더러운 잠에서, 그 비겁한 잠에서, 그 비굴한 잠에서, 그 두려움의 잠에서, 그 사망의 잠에서, 그 영적 잠에서 베드로야 일어나라’고 명하시는 주님의 영적 계명성이 분명할 것입니다. 어쩌면 가야바 공정에서 들려주셨던 영적 계명성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주님께서 명하셨던 “일어나 함께 가자!” 라고 말씀하신 주님의 두 번째 음성이었을지도 모릅니다. 사랑하시는 여러분! 만일 우리가 지금 피곤에 지쳐 있다면, 그 피곤의 원인은 무엇입니까? 혹시 우리는 “시몬아 자느냐?” 라고 하는 주님의 지적이 필요한 사람들은 아닙니까? 과연 우리의 영적 현주소는 어디입니까? 이제는 일어나 함께 갑시다. 주님과 함께 십자가의 길도, 부활의 길도 이제 일어나 함께 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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