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숙 노 숙 김사인 헌 신문지 같은 옷가지들 벗기고 눅눅한 요 위에 너를 날것으로 뉘고 내려다본다 생기 잃고 옹이 진 손과 발이며 가는 팔다리 갈비뼈 자리들이 지쳐 보이는구나 미안하다 너를 부려 먹이를 얻고 여자를 안아 집을 이루었으나 남은 것은 진땀과 악몽의 길뿐이다 또다시 낯선 땅 후미진 구.. ........글/아름다운 시 2008.12.29
라디오와 같이 사랑을 끄고 켤수 있다면 라디오와 같이 사랑을 끄고 켤수 있다면 장정일 내가 단추를 눌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라디오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단추를 눌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전파가 되었다. 내가 그의 단추를 눌러 준 것처럼 누가 와서 나의 굳어 버린 핏줄기와 황량한 가슴 속 버튼을 눌러다오. 그.. ........글/아름다운 시 2008.12.29
나뭇잎 하나 나뭇잎 하나 김광규 크낙산 골짜기가 온통 연록색으로 부풀어 올랐을 때 그러니까 신록이 우거졌을 때 그곳을 지나가면서 나는 미처 몰랐었다 뒷절로 가는 길이 온통 주황색 단풍으로 물들고 나뭇잎들 무더기로 바람에 떨어지던 때 그러니까 낙엽이 지던 때도 그곳을 거닐면서 나는 느끼지 못했었다 .. ........글/아름다운 시 2008.12.29
흙발 흙발 손남주 변두리 비탈밭이 가뭄에 탄다 아프게 껍질을 깨는 씨앗, 물조로의 물도 목이 마르고 덮었던 마른 풀 걷어내자, 후끈 숨막히는 흙냄새 사이 노란 떡잎, 무거운 흙덩이 이고 푸른 뜻 굽히지 않는다 힘겨운 고개, 세상이 아무리 짓눌러 와도 하늘 보고 꼿꼿이 일어서는 흙발 지그시 디디고 섰.. ........글/아름다운 시 2008.12.29
껌씹기 껌씹기 강해림 개정판 국어사전을 찾다가 껌을 씹는다 천천히 아무 저항 없이 씹히는 껌은, 단물이 다 빠져나간 뒤부터는 껌이 나를 씹는다 무엇이든 오래 질겅거리고 씹고 탐닉하다 보면 말랑말랑해지고 어느 순간 카오스의 붉은 혀가 찾아든다 늦은 밤, 희미한 불빛 아래 야간작업 하던 나는 톱니바.. ........글/아름다운 시 2008.12.29
12월 12월 황지우 12월의 저녁 거리는 돌아가는 사람들을 더 빨리 집으로 돌아가게 하고 무릇 가계부는 家産 탕진이다 아내여, 12월이 오면 삶은 지하도에 엎드리고 내민 손처럼 불결하고, 가슴 아프고 신경질나게 한다 희망은 유혹일 뿐 쇼윈도 앞 12월의 나무는 빚더미같이, 비듬같이 바겐세일품 위에 나뭇.. ........글/아름다운 시 2008.12.29
그대에게 그대에게 최영미 내가 연애시를 써도 모를거야 사람들은, 그가 누군지 한 놈인지 두 놈인지 오늘은 그대가 내일의 당신보다 가까울지 비평가도 모를거야 그리고 아마 너도 모를거야 내가 너만 좋아했는 줄 아니? 사랑은 고유명사가 아니니까 때때로 보통으로 바람피는 줄 알겠지만 그래도 모를거야 .. ........글/아름다운 시 2008.12.29
나비키스 나비키스 장옥관 물이 빚어낸 꽃이 나비라면 저 입술, 날개 달고 얼굴에서 날아오른다. 눈꺼풀이 닫히고 열리듯 네게로 건너가는 이 미묘한 떨림을 너는 아느냐 접혔다 펼쳤다 낮밤이 피고 지는데 두 장의 꽃잎 잠시 머물렀다 떨어지는 찰라 아, 어, 오, 우 둥글게 빚는 공기의 파동 한 우주가 열리고 .. ........글/아름다운 시 2008.12.29
산 산 정희성 가까이 갈 수 없어 먼발치에 서서 보고 돌아왔다 내가 속으로 그리는 그 사람마냥 산이 어디 안 가고 그냥 거기 있어 마음 놓인다 ........글/아름다운 시 2008.12.29
오늘 오늘 구상 오늘도 신비의 샘인 하루를 맞는다. 이 하루는 저 강물의 한 방울이 어느 산골짝 옹달샘에 이어져 있고 아득한 푸른 바다에 이어져 있듯 과거와 미래와 현재가 하나다. 이렇듯 나의 오늘은 영원 속에 이어져 바로 시방 나는 그 영원을 살고 있다. 그래서 나는 죽고 나서부터가 아니라 오늘서.. ........글/아름다운 시 2008.12.29